회귀자 사용설명서 1380화
뜻밖의 데뷔(15)
누가 봐도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첫째 언니 알프스와 예상외로 몰입하고 있는 둘째 언니 벨리에.
갑작스레 일어난 소란과 함께 등장한 신캐의 모습에 당황스러움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녀들의 표정을 보고서는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얘네… 진 군사가 보냈구나. 시바.’
이 새끼 안 본다고 하더니 다 보고 있었구나.
“제니스 후작님. 동생에게 도움을 주신 것은 감사드립니다만… 더 이상 무도회장을 소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번 일은 여기에서 마무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장내를 정리하기 시작하는 벨리에, 카리나 페넬로티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갑작스럽게 뜨거워진 온도로 인해 결투라도 일어날 것 같았던 타이밍.
흥분해서 이성을 잃은 핑크레인 공작과 녀석의 텐션에 맞춰 함께 온도를 올리고 있었던 제니스 후작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었다.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묘하게 싸늘해 보였던 터라, 더욱더 무도회장에 차가운 기운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과정이야 어떻게 됐든 간에, 상황이 더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준 셈이다. 제니스 후작이 페넬로티 영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망나니 핑크레인 공작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갖은 노력 끝에 승리해 결국 약혼 엔딩으로 가는 루트를 사전에 차단한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공화국으로 가는 배드 엔딩을 회피한 것이다.
‘벨리에… 괜찮게 몰입한 것 같은데?’
“언… 언니.”
“입 다물고 있으렴. 아이나. 폐 끼치지 않고 쥐 죽은 듯이 지내라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여기까지 와서 말썽을 피우는구나.”
“그건… 그, 그리고 언니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가만히 있었는데 분명 핑크레인 공작님께서….”
“아이나 페넬로티. 그래서 지금… 네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거니? 네 행실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참 많단다. 아이나. 밤을 지새워? 아무 일도 없었다? 여전히 한심하구나.”
“한… 한심하구나… 아… 아이나. 한, 한심해.”
‘알프스 쟤는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낫겠다. 로헨 때도 발연기였지 아마.’
설정상 아이나 페넬로티는 친구라고는 그림자밖에 없는 외로운 영애였으니 두 언니에게 미움받고 있는 포지션에 있는 게 당연했다.
이미 미움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언니들에게 더는 미움 받고 싶지 않다는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기까지 하다.
아니나 다를까 벨리에의 얼굴에서 언뜻언뜻 혐오감이 비치기 시작한다. 도저히 자신의 동생을 보는 것 같지 않은 표정과 행동, 마치 벌레를 보는 것만 같은 눈빛이지 않은가.
‘근데… 뭔가 다르네….’
단순하게 아이나 페넬로티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1차원적인 캐릭터를 스스로 거부하고 싶은 것일까. 언뜻언뜻 아이나 페넬로티에 대한 애정이 섞여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성장했구나… 벨리에. 아니… 이미 시바 카리나 페넬로티가 되어버린 거자너.’
단역 캐릭터에 스스로 서사를 부여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카리나 페넬로티는 아이나 페넬로티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사랑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숨겨져 있는 듯하다.
시바 나도 모르는 설정이었다. 아이나 페넬로티 세계관을 생각해 보면 아마 대충 가문 내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거지?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정확히 뭐가 어떻게 저주받았는지 설정하지도 않았지만 아마 거기에 키워드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아이나 페넬로티 때문에 카리나 페넬로티의 어머니가 죽었다든가. 아이나 페넬로티의 저주 때문에 가문 내에 커다란 불화가 닥쳤다든가 뭐 그런 이야기겠지.
“핑크레인 공작님.”
“무, 무슨 일이십니까. 카리나 페넬로티 영애.”
“페넬로티 가문을 모욕한 것을 사과하십시오.”
“뭐… 무… 무어….”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변경의 가문이라 페넬로티 가문을 모욕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크… 크흠….”
‘아이나에 대한 모욕에 대한 사과를 바라는 건 아니구나. 척하면 척이자너. 캐릭터성 확고하자너. 가문이 제일 중요하다 이거지?’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적절한 배상이 이루어지기를 요청드리겠습니다.”
“큼… 그건 내가… 너무 흥분한 듯….”
“공식적인 사과입니다. 핑크레인 공작님.”
“…….”
“페넬로티 가문을 모욕한 것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와. 카리스마 쩔자너. 카리나 페넬로티.’
아무리 막 나가기로 유명한 핑크레인 공작이라도 여기서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다.
아이나 페넬로티와 얽힌 이야기와는 관계없이 페넬로티 가문을 싸잡아 모욕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본인이 불의를 본 김명원마냥 뜨거워졌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 터.
궁지에 몰리자 본성을 드러냈을 뿐이었고, 본인의 영지에서 하던 것마냥 패악질을 부렸을 뿐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막장으로 치달았다면 놈도 대중의 눈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으니 이제는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할 때,
어찌 됐건 간에 양보해야 할 타이밍이었다는 거다.
“큼… 흥분해 무례한 언사를 했던 것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이후에 공식적인 서신을 통해 입장을 밝힐 수 있도록 하겠… 원하시는 배상 또한… 큼…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이럴 때는 튀는 게 답이겠지.’
부끄러워졌는지, 아니면 카리나 페넬로티의 등장으로 인해 본인이 불리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곧바로 빤스런을 하는 녀석.
상황이 얼추 정리된 것 같기는 했지만 당연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갤러리들이 모두 무도회장에 새롭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떠들고, 저마다 할 일을 하기 위해 흩어질 때까지 아이나 페넬로티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벨리에가 바로 그 원인이었다.
이윽고 장내가 겨우 진정되었을 즈음에 아이나 페넬로티를 향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후에… 마음이 진정이 되었을 때 서신으로 짧게나마 핑크레인 공작님께 사과드리렴. 아이나.”
누가 봐도 정상적인 자매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이쪽을 옹호하는 제니스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페넬로티 영애는 사과할 만한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카리나 페넬로티 영애.”
“…….”
“…….”
“누가 잘못을 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제니스 후작님. 이곳에서 죄의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그건….”
“페넬로티 가문은 제니스 후작가나 핑크레인 공작가처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 아닙니다. 왕국연합이 중간에서 제지를 한다고 해도, 핑크레인 공작가가 마음먹고 페넬로티가에게 해를 끼치려고 한다면… 저희로서는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제니스 후작님. 후작님께서 제 못난 동생을 데려가 책임지실 것이 아니라면 한발 물러나 주셔야 합니다. 그게 저희에게, 아이나에게 도움이 되는 길입니다.”
“…….”
“더불어, 만약 그러하신다 하더라도… 아이나는 아직 제니스 후작가의 사람이 아닙니다. 페넬로티 가문의 일원이지요. 물론 도움을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그 선의로 만들어진 결과를 감내해야 하는 것은 저희 페넬로티입니다.”
“가, 가, 가문의 일입니다. 제니스 후작님.”
‘알프스 너는 진짜 후임보다 못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카, 카리나의 말대로 하렴… 아이나 페넬로티.”
별안간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슨 사과를 하라고 하는 거예요! 대체!”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이 등장한 것이다.
“당신은… 파스텔 영애로군요,”
“페넬로티가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사과하라느니 뭐 어쩌냐느니 하는 거예요?! 누가 봐도 잘못은 핑크레인 그 돼지 공작이 먼저 저질렀어요! 페넬로티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요!”
“파스텔 영애의 말이 맞습니다. 카리나 페넬로티.”
“비합리적이에요! 여기서 페넬로티 영애에게 사과를 하라는 건 도대체… 혁명적이지 않다고요!”
“브러쉬 영애의 말이 맞습니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페넬로티 영애.”
“모, 모두들….”
‘밍… 밍나….’
“가문의 일입니다. 다른 분들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아이나 내 말이 들리지 않니?”
물론, 아이나 페넬로티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을 리 만무했다. 당당하게 사과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페넬로티 가문을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 없다.
카리나의 말처럼 만약 오늘 일어난 사건에 핑크레인 공작이 앙심을 품는다면, 페넬로티 가문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의 얼굴이 조금 굳은 듯한 느낌이다. 제니스 후작 역시 마찬가지.
이미 아이나 페넬로티와의 노을 그림자 토크로 인하여 그녀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예상하고 있었던 눈치였지만 생각보다 더 안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분명하리라.
사과하는 것이 맞다. 앞으로 가문에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 아이나 페넬로티 개인의 불명예를 감수하고 형식적으로나마 핑크레인 공작가에 엎드려야 한다.
하지만 아이나 페넬로티는 자신을 믿어주는 제니스 후작과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용기를 낸 페넬로티.
“저… 저 사과하지 않을 거예요.”
조금은 당당해진. 페넬로티.
‘이… 이젠 혼자가 아니니까.’
모… 모오 히토리가 아니니까.
“뭐?”
“사과하지… 않겠어요. 저는 잘못한 게 없어요. 오히려 제, 제가 사과를 받아야 해요.”
“너는 끝까지 네 생각만 하는구나. 아이나 페넬로티.”
“제, 제 생각만 하는 게 아니에요. 언니! 저는….”
“입 다물고 따라오렴.”
“…….”
“네게는 벌이 필요하겠구나.”
저벅저벅 홀로 걸어가는 카리나 페넬로티. 이쪽을 걱정하고 있는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과 계획 실패의 쓴맛을 삼키고 있는 제니스 후작.
따라갈 필요 없다고, 여기에 함께 있자고 말하고 있는 팬들의 얼굴이 보이기는 했지만 카리나 페넬로티의 말을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다란 복도를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는 중, 카리나 페넬로티가 아닌 벨리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김현성 백작님 근처로 이동하면 될까요? 부길드마스터? 지금 정원에 나가계신 것 같은데.”
“아. 네. 그렇게 하면 될 것 같네요.”
‘눈치 빠르게 바로 파악하는 것 봐. 든든하자너. 진짜.’
이쪽이 1현성과 끈을 데려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심지어 다른 것은 물어오지도 않는다. 몰입이 깨질까 봐 걱정하고 있는 것인지, 누가 보면 카메라라도 돌고 있는 줄 알고 있을 것이다.
알프스는 아직 캐릭터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했는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 여러 가지 사항들을 전해주고 있는 중, 그사이에 페넬로티 3자매는 김현성이 산책 중인 정원에 발을 들였다.
‘방금은 나설 타이밍이 없었던 거야. 전부 다 제니스 후작 때문이지.’
“…….”
‘우리 현성이도 도와주고 싶었을 거야.’
아직도 마음속 한구석이 찜찜하지 않을까 싶다.
그 찜찜한 속을 환기시킬 수 있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것이 맞다. 벨리에의 목소리가 아닌 카리나 페넬로티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아이나 페넬로티.”
“네? 언니.”
“이 악물렴.”
“어? 왜… 왜?”
장갑은 왜 벗어?
‘이는 왜 악물어야 돼?’
손은… 왜 올려?
‘아까 벌이 필요하겠다고 했던 게 이거였어?’
우리 자매… 체벌하고 체벌받는 그런 설정이었어? 그 설정 참신하기는 한데 좀 이상하지 않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시바 이제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을 지경, 나조차도 아는 게 없는 페넬로티 세계관에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나쁜 선택은 아니다.
아무래도 어그로를 끌기에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테니까.
단순한 말싸움이라면 그저 자매끼리의 일이라며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손찌검은 또 다른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귀가 좋은 김현성이라면 반드시 들을 수 있을 터였다. 때마침 제니스 후작 이 새끼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좋아! 시바 굿 아이디어야!’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걸 깨달은 것일까. 카리나 페넬로티의 허락을 구하는 듯한 눈빛이 보여.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
짜악!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아니, 예상보다 강한 손짓에 몸 전체가 휘청거리며 바닥에 철푸덕 나가떨어진다.
‘시… 시바 입술 찢어졌어. 시바… 피… 피나….’
“똑바로 서려무나. 아이나.”
쟤 눈빛이 이상해졌다는 걸 나만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 미친 후배가 지금 뭐 하는 짓인지 경악하는 알프스의 표정이 벨리에에게 틀어박혔다.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벨….”
“카리나입니다. 언니.”
“어?”
“그리고 지금은 못난 동생을 교육하고 있는 중이니 방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언니.”
“어… 어?”
시바 메소드도 이런 메소드가 없었다.
‘우리 세이프 워드 안 정하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