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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383화 (1,381/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383화

뜻밖의 데뷔(18)

“페넬로티는 괜찮은 걸까?”

“평소랑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니야. 팔레트. 분명히 평소랑은 분위기가 달라. 그날 이후로 뭔가가 달라졌다니까?”

“정확히 뭐가 어떻게 달라진 겁니까?”

“몰, 몰라!”

“네?”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뭔가 달라졌다고! 지금도 발코니에 나가 있잖아. 최근 들어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든가. 계속해서 정원을 살펴본다든가. 난데없이 한숨을 푹푹 쉬기도 하고, 가만히 있다가 혼자 고개를 푹 숙이고, 깊은 고민이라도 있는 것처럼 행동한단 말이야.”

“파스텔 영애는 그걸 전부 지켜보고 계셨던 겁니까? 그건 좀….”

“아니야. 내가 특이한 게 아니라… 에잇! 팔레트야 매일 나가서 연초나 태우느라 못 봤겠지! 가까이에 있으면 누구나 알 수 있어! 최근에는 잘 웃지도 않는 것 같다니까. 왜 저번에 그 놈팽이 놈들이 우리 살롱에 찾아왔을 때도, 평소랑 달랐잖아. 마치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것처럼… 맞아. 나랑 있을 때도 도통 대화에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았어…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분명히.”

“확실히…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핑크레인 공작 사건부터 해서… 페넬로티의 장녀와 차녀를 생각해 보면….”

“역, 역시 페넬로티… 가문에서 소외당하는 걸까.”

‘소외당하는 정도가 아니자너.’

“아마 그럴 확률이 높을 겁니다.”

“이… 이상하지 않아? 페넬로티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저주받았다느니 불길하다느니 하는 말도 조금 이상하다고… 그, 그리고 설사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게 정상이야? 페넬로티도 같은 가족이잖아! 어떻게 그렇게 남 대하듯이 대할 수가 있냐고.”

“…….”

“나. 이대로는 가만히 못 있겠어. 팔레트. 카리나 페넬로티를 찾아가서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왜 페넬로티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건지, 전부 물어봐야겠어.”

“그만두는 게 좋을 겁니다. 물론 파스텔 영애의 심정도 이해가 가지만… 이건 페넬로티 가문의 일입니다. 파스텔 영애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나 행동이 페넬로티 영애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 그렇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팔레트? 네 일이라고 생각해 봐!”

“만약 제 일이라면, 더욱더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기를 바랄 겁니다. 어차피 페넬로티 영애가 이번 데뷔탕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면, 페넬로티 자작가와는 자연스레 멀어질 테니 말입니다.”

“그래도… 그래도 가족이잖아! 그게 맞다고 생각해?! 응원해 주고 보듬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팔레트 너 정말!”

‘목소리 너무 크다. 얘들아. 전부 들리자너.’

“저는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파스텔 영애.”

“하… 하지만… 브… 브러쉬!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내 말이 맞지? 응? 그렇지?”

“글쎄요….”

“뭐, 뭐라고? 브러쉬 너까지….”

미리 심어놓은 브러쉬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니요. 제 말뜻은 그게 아니에요. 파스텔 영애. 오히려 파스텔 영애의 말에 동의해요. 저희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당연히 도와드리는 게 이치에 맞겠죠. 위로를 드리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것만으로는 찜찜하잖아요.”

“그렇지? 근데….”

“제 말은 최근에 페넬로티 영애가 이상해진 이유가 핑크레인 공작이나 페넬로티가의 차녀 때문이 아니라는 소리였어요.”

“뭐…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많이 당황한 것만 같은 파스텔 영애의 목소리, 그리고 평소처럼 텐션이 올라간 브러쉬 영애.

“혹시 듣지 못하신 건가요?! 페넬로티 영애가 정원에서 김현성 백작과 만나셨다는 거….”

“어? 페… 페넬로티는 나한테 그런 이야기 해준 적… 없었는데….”

“말씀을 드릴 정신이 없었나 보네요… 사실 페넬로티 영애가 한밤중에 제 방에 찾아왔었거든요.”

“어? 어?! 으응? 뭐라고?!”

화들짝 놀란 파스텔 영애의 모습이 보인다. 조금 과민반응을 하는 건 아닌가 싶기는 했지만….

‘그럴 만하긴 해.’

자신과 가장 많이 붙어 있던 페넬로티 영애, 단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페넬로티가 자신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은 것들을 이미 브러쉬와 공유했다니, 은근히 여린 감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섭섭해하는 게 당연했다.

마치 자신만 빼고 단둘이 놀러 간 소식을 뒤늦게 친구에게 전해 들은 것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실상은 김현성과의 정원 만남이 끝난 이후에 유일하게 잠들지 않은 영애를 찾아갔을 뿐이었지만, 그게 파스텔 영애의 귀에 들어올 리 만무, 아니,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첫 번째로는 브러쉬 영애를 찾아갔을 것이다.

‘쟤가 제일 호들갑 잘 떠니까.’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시동을 거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입이 근질근질한지 쉴 새 없이 입술을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어? 정,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줄 수 있어? 브러쉬?”

“그날 있잖아요.”

“응? 그날?”

“네. 그날이요. 카리나 페넬로티가 페넬로티 영애를 데리고 갔던 날. 사실 그날, 정원에서 무슨 사고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페넬로티 영애가 자세히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좋은 일은 아니겠죠.”

“그… 그래?”

“네. 아무튼 그렇게 페넬로티가 정원에서 혼자 숨을 죽이고 있었을 때, 김현성 백작이 찾아왔다지 뭐예요?”

“뭐어?”

“상심하고 우울해하고 있는 페넬로티 영애를 그, 김현성 백작이 직접 위로해 주셨다는 거예요! 정확히 어떻게 위로해 주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김현성 백작이 페넬로티 영애의 마음을 빼앗았다는 사실이에요.”

“…….”

확실히 잘하자너.

“글… 글쎄… 그건 너무….”

“시기상조가 아니냐고요?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무려 그다음 날에도 페넬로티 영애가 찾아와서는….”

“으응….”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지 뭐예요?”

“어?”

“자꾸만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 한가운데가 저릿하게 아픈 것 같고… 한 사람이 조금씩 생각나는 것 같다고… 아무튼 페넬로티 영애가 묻더군요.”

“뭐라고?”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요.”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뭐긴 뭐겠어요! 사랑이라고 이야기했죠!”

“뭐?!”

“당연히 사랑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날부터 페넬로티 영애가 저렇게 하늘을 쳐다보고, 정원을 바라보고 한숨을 푹푹 내쉬는데…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너무 뻔하잖아요! 제니스 후작 부인이 아니라! 김 백작부인이 되게 생겼다고요! 물론 제니스 후작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페넬로티 영애에게는 기쁜 일이죠! 무려 제국의 백작이라고요! 제국의 백작! 혁명적이라고요! 왕국연합 역사에 없었던 혁명적인 데뷔탕트예요!”

“어….”

“그런 의미에서 페넬로티 가문이 뭐라고 한들, 신경 쓸 필요가 있겠어요!? 행복해지는 것이야말로 최고로 혁명적인 복수에요! 이미 그쪽에서 뭐라고 한들, 페넬로티 영애는 제국의 백작에게 시집가기로 내정이 되어 있다고요! 이후에 페넬로티 영애가 피의 복수하고 싶으면 당연히 할 수도 있고요! 거기에 저희가 조금 손을 보태준다면 페넬로티 가문과 카리나 페넬로티의 삶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거예요!”

‘아니, 그건 좀….’

팔레트 영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페인트 영애는 크게 숨을 내쉬고 있다. 계속해서 흥분해서 떠들고 있는 브러쉬 영애의 모습, 파스텔 영애는 아직도 배신감과 섭섭함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발코니에서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 마치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모양, 내게 가장 처음 입을 열어온 것은 지금껏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페인트 영애였다.

“페넬로티 영애. 전부 다 들었어요.”

“아… 네? 페인트 영애?”

“제니스 후작인가요. 김현성 백작인가요?”

“네에?”

“페넬로티 영애가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저희 살롱의 방향성을 더욱더 확실하게 결정할 수 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제니스 후작가를 선택했으면 하는 바람이기는 해요. 아무래도 제국은 너무 머니까. 저희들이 페넬로티 영애를 만나기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물론 김현성 백작도 나쁜 선택지는 아닐 거예요. 제국과 동맹을 맺는 교두보 역할로 상징적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고… 게다가… 제국은 제국이니까요. 하지만 역시 페넬로티 영애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겠죠.”

‘얘 진짜 확실하게 하네. 내가 영애들 덕을 많이 보자너.’

기왕 밀어줄 거 확실하게 밀어주겠다는 뜻이었다. 만약 김현성을 선택한다고 하면, 브런치나, 살롱 간의 만남, 그것 외에도 제국에서 온 귀족들과 자리를 만든다거나, 제국과 친분이 있는 왕국연합 내의 귀족들과의 자리를 만들 것이 분명했다.

데뷔탕트도 중요하지만 데뷔탕트 이후를 생각해 미리 친분 작을 준비해 주겠다는 뜻이라는 거다.

핑크레인 공작 사건의 파동으로 살롱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자신의 능력 내에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는 거겠지.

“결혼이라거나, 미래라거나, 그렇게 진지한 이야기를 생각해보지 않으셔도 돼요. 그저 어느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울고 있으신지, 그것만 말씀해 주셔도….”

“아…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서요.”

물론 균형은 유지되어야 했다.

‘김현성한테는 개인적으로 알아볼 게 있었고….’

1군사는 뭔가 일을 벌이려고 이곳에 있다는 게 정설이었으니까. 사건이 언제 터지고,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확실히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급하게 결정을 내릴 필요는 없지 않아? 페인트? 페넬로티가 혼란스러워하잖아.”

“…….”

“…….”

“맞아요. 제가 조금 급해 보였을 수도 있겠네요.”

‘맞아.’

하지만 그녀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페인트 영애의 입장에서는 이 화제성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거라는 보장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아무리 개성 넘치는 이들이 모인 흑장미 살롱이라고 한들, 계속해서 이런 인기를 유지할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왕국연합의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통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잔인하게 이야기하자면 지금이 가장 가치가 높은 시기라는 거다. 내가 빠르게 제니스 후작, 혹은 김현성 백작과 이어지길 바라고 있는 것은 그녀가 페넬로티 영애를 얼마나 많이 생각해 주는지에 대한 방증이었다.

“일단은 두 분을 동시에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후보군을 확 줄이고 나머지 신사분들은 전부 다 거절하도록 해요. 페넬로티 영애도 제 말에 동의하시죠? 혹시 아직도 다른 분들 모두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나요?”

글쎄… 어떨까. 싶기는 했지만 일단 고개를 젓는다.

핑크레인 공작 일도 있었고, 다른 이들과 섞이고 소통하는 것 정도야 살롱 모임으로도 충분했으니까.

“휴… 다행이네요. 만약 페넬로티 영애가 계속 고집을 부렸다면 제가 말렸을 거예요. 여러모로 지금은 두 분한테 집중하는 게 맞아요. 웬만하면 한 분으로 좁히는 것 추천드리고 싶지만 페넬로티 영애의 마음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하니 어쩔 수 없겠죠.”

“네.”

“이후부터는 조금 더 공격적인 스케줄을 잡아야겠네요.”

‘가만히 있어도 얘들이 알아서 다 해주자너.’

이래야 친구지.

심지어 누가 더 페넬로티에 짝에 걸맞을지 토론까지 해주고 있는 중이다.

“하나하나 재보자고요. 일단 가장 중요한 건 외모예요. 혁명적인 외모라고요.”

“개인적으로 얼굴은 제니스 후작님이 더 잘생기신 것 같습니다. 페넬로티 영애.”

“뭔?”

아니, 일단… 취향은 존중해 드리겠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으니까.

“어? 물론 제니스 후작님도 훤칠하시지만… 객… 객관적으로 보면 김현성 백작님이… 더… 잘생기시지 않았나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브러쉬 영애.”

“역시 페인트 영애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파스텔 영애는 어때요?”

“나? 나… 나는 굳이… 굳이 고르자면 제니스 후작… 물, 물론 제니스 후작도 그렇게 잘생긴 건 아니지만… 그래도… 김현성 백작은 뭔가… 싸하달까… 사람이 좀… 좀… 그래….”

와. 이게 2:2가 나오네.

“성격은 김현성 백작이죠. 아직 두 분의 인격이 어떤지 파악하기는 어렵기는 하지만… 김현성 백작의 인품은 제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어요. 공명정대하시고 불의를 보면 절대로 참지 못하신다고 하시네요.”

‘불의 잘 참던데?’

“그에 비해 제니스 후작은 뭐랄까…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실 것 같은 느낌이죠. 왕국을 지켜온 그림자로서는 당연하겠지만… 물론 그게 흠이라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요.”

“재산은 제니스 후작이 더 많을 거예요! 물론 제국의 지원을 받는 김현성 백작도 상당하겠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명문가에 이름을 올렸던 제니스 후작가가 이제 막 백작위를 받은 김현성 백작보다 재산이 적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을 것 같거든요.”

“…….”

“…….”

“아이들에게 더 다정할 것 같은 사람은 김현성 백작님이죠? 조금 냉정해 보이시기는 하지만 가끔 보여주시는 따뜻한 미소가….”

“의외로 제니스 후작님 같으신 분들이 가족에게는 더 신경을 많이 쓰십니다.”

그렇긴 하더라.

“…….”

“…….”

“김현성 백작님은 모험가 출신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분명히 거친 면이 있으실 거라고 생각….”

“무슨 소리를! 김현성 백작은 분명 소환되기 전에 온 세상에서도 귀족이셨을 거라고요. 딱 보면 모르세요? 그 분위기. 그 기품. 귀족으로 태어난 거예요.”

뭐 현대판 귀족이라면 현대판 귀족이기는 하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간다. 누가 더 말을 잘하냐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전부 파고 들어가는 모습, 문제는 이 대화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미쳤어요! 미쳤다고요! 그건 분명히 김현성 백작이에요!”

“그건. 동감합니다. 이번만큼은 저도 냉정하게 김현성 백작에게 한 표를 던지겠습니다.”

“저도… 저도 김현성 백작이요.”

“분명하다고요! 분명히 그게 맞을 거라고요! 혁명적이에요!”

이제는 아예 날 빼놓고 이야기하는 중, 아마 중간에 편지가 오지 않았다면 오늘 밤이 새도록 떠들지 않았을까.

“…….”

“…….”

“편지 왔어요! 페넬로티 영애! 제니스 후작이에요! 김현성 백작님도 있어요!”

“…….”

“오, 오늘따라 편지가 유독 많아 보이네? 페넬로티.”

평소 도착하는 편지의 양보다 훨씬 많다.

슬그머니 편지뭉치를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

‘좋네.’

길드원들이 보내온 보고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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