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85화
뜻밖의 데뷔(20)
왕국연합에 체류해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이 새끼들이 이번 이벤트에 등장할 것이라 판단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여기에 볼일이 있을 수도 있고, 제국에 쫓기다 보니 여기까지 닿았을 수도 있다. 혹은 타이밍 좋게 자리해 있을 확률도 없지는 않겠지만….
‘아무렴… 여기서 영애들이 노는 거 구경하려고 이렇게 멀리 출장 나왔겠냐구. 그렇게까지 할 일 없는 놈들은 아니자너.’
제국을 기점으로 활동하는 놈들이 무거운 엉덩이를 옮겼다는 것만으로도 괜한 의심을 하게 된다. 물증은 없었지만 동기는 있으니 말이다. 전쟁을 바라는 것은 공화국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공화국보다 더욱더 여단이 전쟁을 바라고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목적은 달랐지만 여단의 공통적인 관심사, 혹은 방향성은 대륙에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이었으니까.
그동안 뚜렷한 방향성 없이 목적 없는 살인을 저질렀던 놈들이 1기영의 합류로 조금 더 조직적이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시기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게 대륙전쟁의 시발점이 되는 이 무도회라면 딱 적당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무도회장에서 데뷔하는 것은 영애들이나 영식들뿐만이 아니다. 어떤 경로로 정보를 입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들은 공화국이 전쟁준비를 할 걸 알고 있다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혹시라도 1군사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을 때 방아쇠 역할을 하겠다는 심산, 그게 아니라면 본인들이 먼저 도화선에 불을 붙일 가능성도 있다.
내가 1기영이라고 해도 현시점이 가장 좋은 타이밍이라고….
‘아니지. 이게 아니지.’
“…….”
‘큰 그림은 같지만… 조금은 다르지.’
스스로를 1기영이라고 가정하자 불현듯 정신이 든다.
‘지금 이 시점은 1기영은 회귀라는 키워드에 닿지 않았을 테니까.’
대륙을 혼란스럽게 하려고 한다는 목적은 변함이 없겠지만 현시점의 1기영은 장기적인 플랜보다는 단기적인 목표에 더욱더 초점을 맞추려고 할 것이다.
그 목표가 무엇인지는 뻔할 뻔 자.
‘안 봐도 비디오자너.’
저도 모르게 보고서 한쪽에 글씨를 끄적거렸다.
[복수]
무조건 복수일 것이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을 시기라고 보는 것이 맞다.
박덕구를 잃은 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정확하게 특정할 수 없지만, 시기상 청소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으니 더욱더 그것 외에는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단을 왕국연합으로 끌고 가야 할 명분이 필요하니 여러 가지 스토리로 개소리를 싸질러 정진호를 꼬드겼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놈의 목적은 복수하는 것 하나였다.
대륙에 혼란을 야기시키기 위한 무대가 아니라 복수하기 가장 편한 무대를 선택했을 뿐이다.
공화국 놈들이 작전을 시작하면 보안에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진 군사 역시 녀석들이 이곳에 와 있다는 걸 알고 있겠지? 예전에 봤던 1회 차의 편린을 떠올려 보면 1군사와 1기영은 서로를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분명히….
‘군사님 때문에 어긋난 계획이 한두 개도 아니고… 심지어 우리를 이용하기까지 했잖습니까. 몇 번이나.’
라는 대사를 친 걸 들은 기억이 있다.
1군사와 1기영은 직접적으로 마주쳐 작당 모의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대략적으로 서로의 계획을 알고,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에 있었으니까.
한쪽은 전쟁의 시발점으로, 한쪽은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서로를 이용하고 있을 것이다.
[목적은 김현성.]
지금 여단의 전력으로 그게 가능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무리하는 건 아닌가 몰라.’
김현성이 뒈지지 않게 돕는 게 이번 미션의 목표인 걸까,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조용히 허벅지를 두들기자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창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컨디션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눈으로 확인하고 귀로 들어야 할 사안이 있었으니 말이다.
곧바로 창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부길드마스터.”
우리 파란의 보배, 기영이의 보배 김창렬이었다.
‘잘 지냈지? 창렬아?’
급하게 온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얼핏 보면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 같았지만 조금은 찝찝해 보이는 눈빛, 뭔가 내가 보고서에 불만족스러운 것 같다고 착각하는 것만 같았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네요. 아! 보고서 때문에 부른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여전히 훌륭하고 만족스러웠으니까요. 아무래도 통신 채널이나 서면으로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얼굴 직접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바쁘실 텐데 오라 가라 해서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차라도 드실래요?”
“감사히 들겠습니다.”
‘괜히 불러서 미안하자너.’
“그래서, 요즘에는 뭐 하고 계셨어요?”
“진 군사님의 명령으로 이쪽 세계의 선희영 님을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만났다고 하셨죠?”
“네. 도시 외곽의 부랑자의 거리에서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습니다만… 선희영 님이 확실했습니다.”
“주변에 다른 사람은요?”
“키가 큰 인물이 한 명 있더군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짧은 전투가 일어났고, 제압할 수는 있었지만 소란스러워질 것 같아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아아아….”
“혹시… 그 건 때문에….”
“아니요. 희영 씨 때문은 아니에요.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호출 드렸어요. 김현성 백작 주변은 좀 어떤가요? 혹시 확인해 보신 적 있나요?”
“이쪽 세계의 길드마스터 또한 기감이 특출나신 듯하여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음… 파보지는 않으셨다는 거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죄송할 게 뭐가 있겠어요. 안 그래도 다른 일 하느라 힘드셨을 텐데. 사실 현성이 파보는 건 이쪽 일이었고, 창렬 씨가 죄송할 일은 없죠. 진 군사님이 부탁하신 일도 많을 텐데.”
“…….”
“…….”
‘진짜 많은가 보네.’
“괜찮습니다. 하연수 님께서 독자적으로 이쪽 세계의 정보 길드와 접선에 성공해 그들과 협력해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안 힘들겠냐구. 딱 보니까 걔도 발바닥에 땀띠 나도록 뛰어다니고 있는 것 같구만.’
다시 말하면 현지의 정보 길드에게 의뢰를 요청할 만큼 인력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그 정보 길드를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거니와 어느 정도 확인 과정을 거쳐야 하는 만큼 사실 일이 줄었다고도 볼 수 없다.
2회 차에서도 소수의 팀으로 활동했던 김창렬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환경, 거기에 지휘체계가 두 개로 갈라져 있었으니 몸이 두 개라도 부족했을 것이다.
‘물론 힘든 건 힘든 거고 일은 일이자너.’
당장 움직여야 할 인선을 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고해 주시네요. 조금 더 수고해 주셔도 괜찮죠?”
“네. 문제없습니다.”
“김현성 백작 주변을 좀 파주셨으면 좋겠어요. 딱히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내부에서는 제가 팔 수 있으니까. 김현성 백작, 그리고 현성이랑 같이 온 인선들부터 시작해서, 고용인들까지. 성 밖에서 머무르고 있는 이들도 있을 테니 전부 지켜봐 주시고 특이사항이 생길 때마다 보고해 주시면 될 것 같네요. 동시에 희영 씨의 뒤도 계속 밟아주시고요.”
“네.”
“혹시 공화국 말고, 제국 쪽 인선 중에서는 업데이트된 게 있나요? 공식적인 인선 말고도, 비공식적인 인선이 있다면 알고 싶은데. 정확하지 않아도 되니 가감 없이 말씀해 주시면 좋겠네요.”
“제가 알기로는….”
“네.”
“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들의 숫자는 약 200명 안팎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시 한번 확실히 조사를 해야겠지만… 그중 전투 인원은 약 160명 정도로 보이며 성의 출입 권한을 가지고 있는 인원은 20명 정도입니다.”
“동맹회담에 참가하는 인원들인가 보네요.”
“네.”
“동맹회담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극비로 진행되는 터라….”
“그럴 만하죠.”
제국 쪽에서도 공을 들이고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 많은 사절단들이 찾아와 단순히 데뷔탕트 무도회만 하고 돌아갈 리 만무, 동맹이 계속해서 논의 중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무대가 따로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나라와 나라의 관계라는 게 ‘우리 동맹합시다.’라고 말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사절단의 인원이나 오고 가는 내용들 역시 극비, 데뷔탕트 무도회라는 건 그냥 눈속임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김창렬이 이쪽 일에 집중했다면 뭔가 성과를 얻을 수 있었겠지만 아무리 쟤라고 해도 단신으로 왕국연합의 경비를 뚫고 회의실 안으로 잠입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위험을 감수하면….”
‘가능성은 있겠지만.’
구태여 우리 존재를 알릴 필요도 없고, 경각심을 줄 필요도 없다.
“현재까지 확인된 인원은 6명입니다. 물론 이마저도 확실하지 않아 보고서로 전해 드리지는 못했지만….”
‘믿고 있었다구 젠장!’
“일단 김현성 백작이….”
“…….”
“…….”
‘아니, 그건 너무 당연한 거고… 당연히 걔도 회담에 나가겠지.’
“카트린 공작도 자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정보 길드에서 전해 듣기로는 카트린 공작이 며칠째 부재중이라고….”
“…….”
“…….”
‘그건 그냥 추정이자너.’
말 그대로 정확한 정보는 아니었던 셈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이 많이 섞여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지 녀석의 얼굴이 붉어져 있다.
속으로 암살자 실격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커리어의 오점이라고 할 만큼 일 처리가 녀석답지 않았으니 저런 표정을 지을 만도 하다. 어째서 보고서에 누락되어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사실 현 상황에서는 이런 정보도 감지덕지였다.
“그리고….”
“…….”
“남은 한 명은 캐슬락의 송정욱입니다.”
불현듯 머릿속에 1회 차의 편린이 스쳐 지나간 것은 바로 그때였다.
“…….”
“…….”
‘제국의 여왕 샤를롯트.’
‘네.’
‘캐슬락의 송정욱.’
‘죽였고.’
‘교황청의 말렌 추기경.’
‘죽였고.’
‘검은백조의 정유라.’
‘네. 네. 네.’
‘그리고….’
‘…….’
‘린델의 김현성.’
그 외에도 몇몇이 더 있기는 했지만 틀림없이 죽어가던 1군사에게 들었던 명단이었다.
청소사건에 연루되어 있던 관계자들, 정확히는 청소에 동의한 놈들의 명단이었을 것이다.
“캐슬락의 송정욱이요?”
“네. 마를린 영애와 함께 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캐슬락 공성전에서 단역으로 생을 마감했던 작은 바위의 송정욱이 이 정도까지 컸다는 게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애초 청소사건의 관계자가 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지위에 올랐다고 보는 것이 맞다.
심지어 지금은 그 사건이 끝난 이후의 시기였으니 놈의 영향력이 더 커지지 않았을까. 김현성 백작과 함께 제국의 정치에 밀접하게 관여하고 있는 소환자 중 한 명이라면 이번 동맹회담에 참여할 만하다.
아직 귀족 위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보였으니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석하지는 못했겠지만 놈도 놈 나름대로 일을 하고 있다는 거겠지.
‘송정욱이 타깃인가?’
진청이 뒈진 시점에서 송정욱은 이미 미국여행을 간 상황이었다. 무리하게 김현성을 건드려 벌집을 쑤시기보다는 송정욱을 먼저 사냥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정보들을 취합해 보기 시작하자 어느 정도는 결론에 다다른 것 같은 느낌.
“…….”
“…….”
“진 군사는 뭐 하고 계세요?”
“아마 지금쯤.”
“아니 제가 연락을 넣어보는 게 좋겠네요.”
냉전체제를 끊고 녀석의 생각이나 계획을 들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했다.
-군사님?
-…….
-군사님? 연락 주세요. 진짜 중요한 일 때문에 연락….
-…….
-군사님?
여전히 통신 채널이 닫혀 있는 상황.
‘이 새끼… 시바….’
-군사님?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진지하다니까요.
‘아니….’
-진 군사?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