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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387화 (1,385/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387화

뜻밖의 데뷔(22)

-지랄하지 마라! 이기영 개자식! 지랄하지 마라! 지랄하지 마! 개짓거리는 그만두고! 네 할 일이나 똑바로 하란 말이다! 제기랄!

“…….”

-제발… 제발! 지랄하지 마라… 이기영….

‘이 새끼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자너.’

만족스러운 목소리라 할 만했다.

‘괜찮다면… 괜찮다면 조금만 더 애원해 주지 않을래?’

-대답해라아… 이기영. 제발….

‘그래, 그거라구.’

-제발 대답하란 말이다. 내가…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심지어 본인이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 같단다. 녀석의 입에서 나왔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발언. 그 콧대 높은 자존심은 어디로 갔는지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다.

효과가 좋을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지 않은가.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대륙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일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순간이었지만 녀석은 온갖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다.

-이기영? 이기영. 내 목소리 들리나? 듣고 있는 건가? 단언하건대 지금 내가 상상하고 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맞다면 네놈을….

분노!

-아, 아니, 방금은 실언이었다. 사과하도록 하지. 네 심정은 이해한다. 그래. 기분이 나빠졌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이러지 말고 조금 더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게 어떨까 싶은데. 네놈만 좋다면 이리 와서 와인이라도 한잔하면서 말이다.

협상!

-그, 그래. 재미있었다. 네놈이 한 것치고는 무척 재미있는 장난이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네놈이 이겼다. 오랜만에 즐거운 장난이었던 말이다. 하하하하. 내 말 듣고 있나?

희망!

-제발… 그만… 이제 그만하란 말이다… 제발… 네놈의 의중은 알았으니 이제 제발… 그만….

체념!

순간적으로 보여주는 감정이 다채롭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사람이 점점 미쳐가는 과정일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기분이 이러할까.

마음 같아서는 통신 채널을 닫은 뒤 본격적으로 녀석을 골려줄 생각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만한 시간이 나오지 않는다.

슬슬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 자각했을 테니 이 정도 즈음에 대화를 나누는 게 정답이 아닐까.

-아아아아앗! 제니스! 아무리 그래도… 아… 아아아아아아앗!

-지랄하지 마라! 이기여엉! 그만 멈추란 말이다!

-…….

-…….

-알았어요. 안 할게요.

-어?

-안 한다니까요?

-…….

-…….

-그렇지. 하하하하핫! 그럴 리가 없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럴 리가… 후우… 그럴 리가 없어.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지.

‘진 군사 너 이 새끼… 우냐?’

-그래… 그런 끔찍한 일이… 그런 악몽 같은 일이 일어날 리가….

‘감정이 격해졌자너.’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말하건대 이 짧은 시간에 천당과 지옥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한 것 같은 목소리.

목이 쉬었는지, 아니면 기력이 다했는지 완전히 탈진한 것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망원경으로 모습을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는 진 군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언하건대 녀석을 만난 이래로 처음 보는 것 같은 모양새, 감옥에 있을 때도, 전쟁에서 털렸을 때도, 명예를 선택했을 때도, 심지어 뒈질 때조차도 품위와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녀석이 이렇게 망가진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망가진 모습이라고 해봐야 온 몸이 땀으로 젖고, 호흡이 고르지 않고, 눈이 충혈되고, 입이 바짝 말라 있고, 머리가 단정치 않는 것뿐이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진 진 군사를 보는 것은….

‘처음 아닌가?’

집무실에 컵케이크를 테러를 받을 때에도 코웃음을 치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긴장이 풀렸는지, 마치 쓰러지듯 의자에 앉아 있지 않은가.

마지막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을 보면 진 군사가 확실했지만 정말로 이 새끼답지 않은 모습이라 할 만했다.

-그래서… 지금… 혼자 있는 게 확실하겠지…?

-…….

-제발… 대답해라. 이기영….

-아. 혼자 있어요. 사람이 왜 그렇게 의심이 많아요?

-후우… 그, 그렇지. 혼자 있었겠지. 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이다. 네놈을 믿지 못해서 재확인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렇지. 혹시 지금 뭘 하고 있었던 건지 물어도 되겠나.

심지어 말투부터 달라지셨다. 마치 막 나가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눈앞에 둔 듯했다.

‘그래. 시바. 나 잘못 건드리면 안 되는 거 이제야 깨달았자너.’

-뭘 하고 있는 건지는 왜 궁금한데요? 이거 말만 믿는다고 하고 하나도 안 믿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이기영. 너를 재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네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정말로 궁금해 던진 질문이었단 말이다. 진정… 진정해라.

-시바. 진정하게 생겼어요?

-그래서. 내가….

-어? 진 군사가 나라면 진정할 수 있겠냐구. 내가 한 번 아니라고 했으면 아닌 거지. 왜 자꾸 꼬치꼬치 캐물어요? 내가 그렇게 신뢰가 없는 사람이었나? 우리 신뢰가 그것밖에 안 돼요?

-그… 그럴 리가.

-그러니까 그렇게 불안해하고 응? 못 볼 꼴 볼 줄 알았으면, 어? 처음부터 아이나 페넬로티를 자극하지 말았어야지.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말이야. 작전이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통신 채널을 끊어놓지를 않나. 독단적으로 작전을 진행하지를 않나. 진 군사님이 잘한 것 같아요? 못한 것 같아요?

-…….

-대답 안 해요? 시바. 평행세계에서 진영이 태어나는 꼴 보고 싶나 봐,

-실수였다.

-제가 왜 화가 났는지 알겠어요?

-이해하고… 있다.

-알았으면. 알아서 잘 처신해요. 여기 있는 동안 페넬로티 자극할 생각하지 말고.

-전적으로 네 말에 따르도록 하지. 그래서… 몸은 좀 어떤지 물어도 되겠나?

-그건 또 왜요?

-데뷔탕트 무도회 일정이 빠듯했으니 말이다. 네 말대로 무도회에 나가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니지 않나. 수면시간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겠지. 육체적 정신적으로도 혹사되고 있는 데다가, 최근에 다른 일도 있었으니… 휴식이 필요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기는 한데 아쉽게도 통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너무 1차원적이잖아요. 군사님. 하지만 그 따뜻함만은 인정하겠습니다. 한결 화가 누그러졌어요.

-그래? 몸은 확실히 괜찮은 거겠지?

‘이 새끼… 따뜻하자너.’

이기영 가라사대, 대접을 받으려면 지랄을 해야 한다고 하셨노라. 언제 어디서나 먹힐 수밖에 없는 격언, 진 군사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피곤하기는 하죠?

-그렇다면….

-그런데 어쩌겠어요. 일이 터지기 일보 직전인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진짜 사고 칠 뻔했잖아요. 진작 연락 좀 받으시지.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일이 있었다. 맹세컨대 독자적으로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단지 양동으로 움직이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물론 그렇다고 소통을 거부할 필요까지는 없었다는 건 인정하마. 당시에는 내가 개인적인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개인적인 문제를 일로 끌어들인 건 명백히 내 실책이겠지.

-반성하는 모습 보니까. 더 좋네. 우리 진 군사. 그럼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대충 알고 계시겠네요.

-물론.

결과적으로 일은 창렬이와 하연수가 하는 만큼 보고서는 비슷한 것으로 받았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차이점이 있기야 하겠지만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겠지. 데이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리고 개인적으로 입수한 정보 몇 줄 정도가 끝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한번 말은 맞춰봐야 하니까.’

아마 녀석은 여단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다. 1희영에 대해서 들었다면 예상은 할 수 있겠지만, 녀석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는 특정하기 힘들겠지. 이를테면 1기영의 목적이 캐슬락의 송정욱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렇듯 한 가지 정보도 여러 가지로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거다. 아마 진 군사라면 더욱더 숨기고 있는 것이 많지 않을까. 기본이 음습하고 야비한 만큼 본인만 아는 정보를 꽁꽁 숨겨뒀겠지.

단언하건대 하연수나 김창렬에게도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녹취 아티팩트를 설치하라고 명령을 내린 뒤 정보를 독점한다거나, 독자적으로 움직인다거나 하는 짓거리를 하고 있었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아마 여단이 개입할 것 같아요.

-그래?

-네. 목적은 아마 김현성 백작, 혹은 송정욱이 될 것 같고….

-송정욱?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인데… 캐슬락에 있는 블랙마켓 관계자였나?

-알고 있었네요? 2회 차에서는 빨리 뒈졌어요. 별 볼 일 없는 새끼라고 생각했었는데. 여기서는 제법 잘 나갔었나 봐요. 모험가로서는 딱 평균 이상이었던 것 같은데… 기본적인 정치 감각은 또 있었던 것 같고, 시대를 잘 타고났다고 봐야죠. 아무튼 간에 누군가가 신호탄을 던지면 여단은 독자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고요. 여기서 뭐가 일어날 거라는 건 알고 있죠?

-물론이다. 나는 너처럼 타임라인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전쟁의 시발점이 될 가능성이 높겠지. 공화국과 제국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전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접경지역에서는 매번 소규모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으니 안 터지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제국을 견제하고 있었던 공화국의 입장에서는 이런 동맹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겠지.

-참 공화국이 문제기는….

-제국 역시 내부를 결속하고 힘을 모으고 있다. 전쟁을 바라는 것은 공화국뿐만이 아니야. 제국의 지도부 모두가 전쟁을 원하고 있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만 최소한 일부는 전쟁을 종용하고, 기다리고 있다. 강한 권한으로 여왕 아래 힘을 집결하고 있다고 한들, 그건 허상에 불과하다. 정상적으로 승계되지 않은 권력에는 언제나 한계가 따르게 마련이야. 김현성에게 백작 위를 주고 모험가들을 정치판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지는 칭찬해 줄 만하겠지만 정말로 그걸 원하고 축하하는 귀족이 얼마나 있을까. 내 생각이 맞다면… 몇몇 귀족은 아마도….

-김현성 백작이 죽기를 바라고 있다고요?

-단순한 가정이다. 보고서를 토대로 얻은 정보에 내 생각을 조금 끼얹었을 뿐이지만 확률은 낮지 않지. 왕국연합에서 매 시즌마다 열리는 데뷔탕트야 이미 유명하지만 제국의 귀족들, 그것도 김현성 백작 같은 거물이 방문했을 때, 공화국이 들어와 있다는 것은 비정상적이지.

-정보가 샜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네요. 그걸 흘린 게 왕국연합이 아니라 제국이라는 소리죠?

-아마도.

-확실히 잡히지는 않는 모양이네요. 이 시점이면 샤를롯트가 제국을 완전히 장악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정말로 가능할 거라고 보나?

‘…불가능하겠지.’

공포정치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반발과 증오를 부를 수밖에 없다.

그녀가 권력을 승계받기 위해 저지른 일들이나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했던 업보가 돌아오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녀는 선택지 안에서 최선의 판단을 내린 것이겠지만 때로는 최선이 최악으로 찾아올 때가 있다.

청소 사건처럼 말이다.

-뭐… 불가능하겠죠. 그래서 공화국 애들은 지금 어때요? 방아쇠 언제 당긴데요? 군사님이라면 대충 예상할 수 있잖아요.

-그건….

-…….

-왜 그렇게 뜸을 들여요? 뭐 숨기는 거 있어요?

-아니… 그건….

-아. 숨기는 거 있구나? 그렇구나.

-아니, 숨기는 것 따윈 없다. 준비라면 한참 전에 된 것 같더군.

-아 그래요? 근데 왜….

-결정권자는 제니스 후작이다.

-그러니까 제니스 후작이 뜸을 들이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게 뭐냐고요. 군사님이면 대충 예상할 수 있지 않아요?

-…….

-…….

-그건….

-네.

-…….

-…….

-아마… 아이나 페넬로티 때문인 것 같다.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놈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이유는 아이나 페넬로티 때문이다. 어째서인지는 정확히 모르고 있으니 묻지 말도록. 그저 아이나 페넬로티에 의해 대업이 미루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아둬라. 그, 그러고 보니 지금 녀석은 어디에 있지? 내가 지금….

-제니스 후작이요?

-그래.

-지금 제 옆에 있는데요?

-뭐?

-지금 제 옆에 있다고요.

-너… 너 이 미친 자식!

-아니, 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걍 옆에만 있는 거라고요.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이쪽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제니스 후작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이 새끼….’

“페넬로티 영애?”

‘진짜… 감겼나?’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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