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88화
뜻밖의 데뷔(23)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이쪽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제니스 후작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이 새끼….’
“페넬로티 영애?”
‘진짜… 감겼나?’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가능성을 아예 접어둔 것은 아니었지만 본인 아닌 본인에게 제대로 확인 도장을 받아온 상황, 이성으로서 관심이 있다와 단순히 인재에 대한 욕심이다의 확률을 50 대 50으로 상정하고 있었건만….
‘70 대 30으로 봐도 되나? 아니, 그 이상이야 설마?’
남녀상열지사라고는 책으로도 읽지 않을 것 같은 놈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당황스러운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진 군사가 소스를 어디에서 얻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일 녀석은 아니었으니 확률은 꽤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치욕을 감당할 수 없어 제대로 된 출처를 밝히지 못하는 것뿐이다. 공화국의 테러리스트 새끼들에게 들었든, 제니스 후작의 입에서 직접 들었든, 놈의 자의적인 판단이었든 간에 제니스 후작이 아이나 페넬로티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대업을 미뤄?’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이 냉혈한이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영애 때문에 대업을 미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단순한 인재 욕심 때문에 저지를 수 있는 짓이 아니라는 거다.
진 군사 같은 종류의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일정과 계획이다. 스스로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야 한다.
진 군사가 가지고 있는 결벽은 단순히 위생 같은 것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작전에 있어 그 어떤 불협화음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 바로 녀석의 성격이 아니었던가.
지혜 누나와 나 역시 녀석의 그런 결벽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 한데 본인이 직접 계획한 대업을 미루고 있다니… 이유가 뭐든 간에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도대체 뭣 때문에… 감긴 걸까?’
빛나는 재능? 무난한 성격? 얼굴이 은근히 취향 저격이었나? 아니면 시바. 2군사 이 새끼가 지금 작업 치려고 밑밥 깔고 있는 거 아닌가?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속이면 재미없습니다. 군사님. 지금 제 옆에 제니스 후작 있다고 확실히 말씀드렸어요.
-제길. 그런 게 아니다.
-어디서 얻은 소스예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분명히 이야기하지 않았나?
-아니, 무슨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그런 소리가 나온 거 아니에요. 솔직히 이상하잖아요. 상상이 가요? 진 군사님이 진심으로 누군가랑 응? 사랑을 속삭이고, 고백하고, 데이트하고, 신랑 신부 입장하고 이런 모습이 상상이 가냐고요. 내가 진짜 상상이 안 가서 하는 소리예요. 당신 무성애자잖아요.
-그런 쓸데없는 말에… 내가 대답이나 반응을 해야 하나?
-아니, 이해가 안 가서 그렇죠. 도대체 어쩌다가 감긴 거래요?
-나도… 나도 모른다.
-아니, 진 군사님의 개인적인 해석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래. 내가 지금 도통 이해가 안 가가지고. 진 군사님이 생각하는 아이나 페넬로티의 매력 포인트가 뭐인 것 같아요?
-…….
-진 군사님 대답하셔야죠.
-정말로 모른다. 나는 제니스 후작이 아니니… 말이다.
-쓰읍.
-하지만 대략적으로나마 유추해 볼 수는 있겠지.
‘그래야지.’
-아마… 아마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그게 중요하지. 원래 모든 관계의 시작은 호기심이자너.’
-네놈이 만든 아이나 페넬로티라는 인물은 제니스 후작 같은 녀석에게는 흥미를 끌 수밖에 없게 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그녀는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이다. 아스팔트 바닥에서 핀 꽃이야. 관심을 가지는 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저 당시의 제니스 후작은 인재 욕심이….
-아니, 그런 뻔한 빌드업 말고요. 어째서 이성적으로 관심이 생겨났는지가 중요한 거라고요.
-글쎄… 그건… 아이나 페넬로티가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해서 일지도 모르지.
-그게 말이 돼요? 진 군사님 지혜 누나를 이성적으로 생각해 본 적 있어요?
-그녀와 나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이다. 공통점이 없냐고 묻는다면 없다 말할 수 있겠지만 많은 부분이 다르다 이 말이다.
-아이나 페넬로티는 제니스 후작과 닮은 점이 많고요? 그림자 드립 친 게 유효했나? 같은 고독한 인간 재질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조금씩 달라지고 밝아지는 페넬로티가 마음에 들었다거나, 그러면서도 속에서는 깊은 어둠을 간직하고 있는 게… 진 군사님 진짜 그림자랑 마음속에 어둠 이런 거 좋아하네요.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터무니 없는 이유가 정답이라 확신할 수도 없고 말이다. 나는 제니스 후작과 달라. 놈이 정말로 그 이유로 페넬로티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애초에 그런 불필요한 감정이 어떻게 어떤 이유로 생겨났는지 말로 정의할 수 있을까. 네놈과 다른 평범한 인간들은 남을 좋아하는 데 딱히 이유를 붙이지 않나?
-왜 그걸 저한테 물어봐요?
-아무튼 나는 모른다. 최대한 성심성의껏 대답하려고 했다만… 제니스 놈은 나와 다른 사람이야 내가 완전히 놈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해.
‘거짓말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데.’
사실 진 군사처럼 계산적인 인간이 이런저런 이유를 따지지 않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지만 녀석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딱히 이유가 없는 거일 수도 있자너.’
어쩌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감겨 있을 수도 있다. 조금 다른 경우기는 하지만 나도 사람을 좋아하는 데 딱히 이유를 붙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미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어떻게 된 게 분명하자너.’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흔들리고 있는 거자너. 잠잠히 고민을 하며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을 때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은 페넬로티 영애의 차례입니다.”
“…….”
“…….”
“페넬로티 영애?”
“아. 죄송해요. 제니스 후작님.”
‘네가 나한테 왜 감겼는지 생각하느라 늦었어요. 시바.’
어떻게 생각해도 만들어진 모습,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살롱에는 몇 번째 방문이더라.’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녀석이 왔다 갈 때마다 꽤 오랜시간을 즐겁게 보내고 간다는 것.
페넬로티를 유혹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본인이 즐거워지기 위해서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일정 역시 꽤 단순하다. 입장하고 선물 증정식을 마친 이후에 이야기를 나눈다. 그 와중에 차를 곁들이기도 하는데 대화의 주제가 꽤나 다양했다.
보통 녀석이 말을 하고 내가 공감해 주는 식, 지식을 뽐내려는 느낌보다는 함께 소통하려고 하는 느낌인지라 그다지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 와중에 크게 리액션을 해주는 것은 덤이다. 목이 아파질 때 즈음에는 차나 커피를 리필하고, 이후로는 진 군사가 좋아하는 게임타임.
체스나 카드로 워밍업을 한 이후에는 예의 그 전쟁게임으로 돌입한다. 중간에 룰을 바꾸기도 하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한 이후에 게임이 마무리되면 함께 복기하기까지.
‘생각해 보면….’
이 새끼 진짜 즐거워 보이지 않았나.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웃는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하다. 돌아갈 때는 특히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거 그냥 평범하게 사이좋은 거 아닌가?’
제대로 진도 빼고 있는 거 아니야?
그동안 보내왔던 시간을 평범하게 되돌려보자 어쩌면 녀석이 아이나 페넬로티에게 감기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단 매번 좋은 시간을 보낸다는 게 유효하다. 아이나 페넬로티는 확실하게 대화가 통하는 상대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름답고 영특하기까지 하다.
가문에 하자가 있는 것이 흠이기는 했지만 그게 흠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물 흐르듯이 관계가 이어진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주 작은 호감으로 발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는 거다.
‘봐. 지금 이 새끼 걱정하고 있는 것 같자너.’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으니 정말로 걱정해 주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괜찮으십니까? 페넬로티 영애?”
“네?”
“아무래도 생각이 많으신 듯해서…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집중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한 마음입니다. 페넬로티 영애. 혹시나 제가 좋지 않은 타이밍에 살롱을 방문한 것은 아닌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페넬로티 영애를 심란하게 한 원인이 무엇인지 귀띔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혹시 최근에 무도회장에 나오지 않은 이유도….”
“…….”
“핑크레인 공작 때문입니까? 그 일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그 일이라면 저도 잊었… 거든요. 그런 일을 계속해서 마음속에 담아두는 성격도 아니고요. 물, 물론 처음에는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이렇게 제니스 후작님께서 매번 찾아와 주신 게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러고 보니 따로 감사의 인사도 드리지 못했네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페넬로티 영애께서….”
슬슬 떡밥을 뿌리는 것도 좋겠는데.
“단지!”
“네?”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될지 모르겠지만… 최근 불길한 꿈을 꾸거든요.”
“…….”
“꿈 말입니까?”
“네.”
“…….”
“…….”
“무척 생생해요. 그런데 또 깨어나면 잘 기억이 나지 않고요. 다만 그때 느꼈던 감정은 그대로 남아 있어요.”
“혹시 어떤 감정을 느끼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글쎄요….”
씁쓸한 웃음을 보이는 페넬로티.
슬퍼하고 있는 페넬로티.
녀석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사실은… 예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어본 적이 있었어요….”
“네?”
“제가 저주받았다는 이야기. 혹시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당연히 들어봤을 것이다.
“자세히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그때도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이유 없이 계속 악몽을 꾸고… 악몽을 꾸고… 결국에는 가문에 좋지 않은 일이 찾아왔거든요.”
사실은 저주가 아니었다는 빌드업이다. 페넬로티는 꿈으로 미래를 엿볼 수 있다.
가문 내에서는 그녀의 이능을 저주로 취급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주인공은 특별함을 숨기는 법이 아니었던가. 오해를 받는 것 또한 국룰 아닌 국룰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니스 후작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이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녀석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자너.’
본의는 아니었지만 아이나 페넬로티는 녀석들의 대업에 근접했다. 무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다.
어쩌면 아이나 페넬로티는 꿈으로 짧은 미래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1군사라면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표정이 굳어 있는 제니스 후작.
페넬로티는 녀석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저… 제니스 후작님.”
“네. 페넬로티 영애.”
“제니스 후작님은 어째서….”
“…….”
“어째서… 정식으로 청혼하시지 않는 건가요?”
놈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