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89화
뜻밖의 데뷔(24)
맑고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눈빛이 녀석을 직시하고 있었다.
순수한 호기심 때문에 던진 질문이었고 아무런 악의 없이 던진 질문이었지만 녀석이 페넬로티의 질문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특히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말이다.
“…….”
“…….”
아이나 페넬로티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
정확히 무엇을 알고 있는지, 본인이 알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페넬로티의 질문은 흔하디흔한 최후통첩이나 머리 아픈 수 싸움이 아니다. 본능적인 육감으로 인해 던진 질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저주라 불리는 제한적 미래 예지 능력의 발현이라 표현하는 것이 옳을까. 본능적으로 페넬로티는 이 문제에 있어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
‘왜 청혼 안 해. 시바. 간만 오지게 보고 말이야.’
이미 청혼하고도 남을 시간이었자너.
제니스 후작이 정말로 청혼할 생각이 있었다면 이미 페넬로티 가문에 관심이 있음을 표현했어야 했다.
귀족 간의 결혼이라는 건은 본래 가문과 가문의 만남인지라, 사실상 상대의 가문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먼저다.
때에 따라서는 이쪽의 허락 없이 결혼이 진행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단 가문의 허락을 받는 것이 제대로 된 청혼의 시발점이자 절차라는 거다.
그 이후 밟아야 하는 스텝은 당연히 페넬로티 영애에게 직접 뜻을 전하면서 청혼하기. 간혹 순서가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지만 제니스 후작은 두 가지 선택지 모두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뻔할 뻔 자.
‘애초에 모든 게 새빨간 거짓말이었자너. 완전 쓰레기자너.’
놈은 제니스 후작이 아니다. 물론 거짓 신분으로 절차를 밟는 것이 딱히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찌 됐건 간에 놈이 허투루 가짜 신분을 만들 수 있을 리 만무했고, 마음만 먹는다면 제니스 후작으로 살아갈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심지어 위장 결혼을 하는 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이 앞선 선택지에 발을 디디지 못한 이유는… 아마….
‘거짓된… 관계는… 싫은 거냐구요. 제니스 후작.’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인지도 모르겠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냐구! 젠장! 비극적이라고!’
그런 식으로 페넬로티 영애를 얻는다고 한들, 그 모든 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제니스 후작을 보니 놈이 생각보다 더욱더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식부터 올리고 뒤통수를 치기보다는 페넬로티의 마음을 얻는 것이 먼저인 거야?’
어떻게 고백할 생각이었을까. 이 새끼. 복면가왕마냥 진실을 드러낸 이후에,
저는 사실 제니스 후작이 아닙니다. 공화국에서 온 진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페넬로티 영애에게 청혼을 하지 못했던 겁니다. 아. 깜빡했는데 사실 제가 무도회장에 테러를 일으킬 계획으로 여기에 왔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갑자기 영애에게 진심이 되어버렸지 뭡니까. 이런 저지만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공화국으로 같이 갑시다.
라고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다소 급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아마 저런 빌드업을 거치려고 했을 테고, 계획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이 즐거운 순간을 즐기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그런 의미에서 페넬로티 영애의 질문은, 이 즐거운 시간을 마무리하고 현실로 돌아가자는 표현이나 다름이 없었다.
‘청혼을 못 하는 이유가 뭐야.’
“그건….”
“역시 제가… 몰락한 가문의 저주받은 3녀이기 때문일까요?”
살짝 슬픈 페넬로티!
“그런 하찮은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몰락한 가문이든, 저주를 받았든 그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페넬로티 영애. 저는 여전히 페넬로티 영애와 함께 있을 때 가장 즐겁고, 가장 기쁩니다.”
“아니면 뒤에서 들리는 안 좋은 소문 때문인가요?”
“그런 것 때문이 아닙니다. 페넬로티 영애. 전혀 관계없습니다. 제가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페넬로티 영애가 제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청혼하시지 않는 건가요. 저… 제니스 후작님께 청혼하라 종용하는 것이 아니에요. 제… 제 주제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페넬로티 영애. 그런 표현은….”
“저 역시 제니스 후작님과 함께 있으면 즐겁고 행복해요. 제니스 후작님께서 저를 위하는 마음도 느껴지고요. 이성적인 관심이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저는 제니스 후작님을 믿고 신뢰하고 있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
“부끄럽지만 제니스 후작님께서도 저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단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뿐이에요. 제가 제니스 후작님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전에… 지속적으로 제게 마음이 있다 표현하시면서… 어째서 거리를 두시는 것인지, 이렇게 매번 찾아와 주시면서… 정작 중요한 말씀은 왜 하지 않으시는 건지… 아니면… 뭔가… 뭔가 숨기시는 게 있는 건지….”
“…….”
“가끔… 가끔 제니스 후작님은 다른 생각을 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 무도회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저희의 삶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끼시는 것처럼 보여요. 제니스 후작님은 그럴 자격이 있으시겠죠. 태어날 때부터 결혼하기 위해서 달려온 제 삶이 한심하게 보이실지도 몰라요. 그런 법칙 위에 있는 분이시고 실제로 능력도 가지고 계시니까요.”
“후우… 페넬로티 영애.”
“하지만 저는 이렇게 살아가야 해요. 그, 그만큼 제게는 이게 중요한 문제라고요. 제니스 후작님께서 이걸 모르실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어째서… 어째서 페넬로티 가에 의사를 전달하시지 않으시는 건, 건가요.”
놈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인다.
“…….”
“…….”
“저는….”
‘할 말 없죠?’
전부 사실이죠?
실제로도 바보 같은 무도회라고 생각했었죠? 의미 없는 일이라고 비웃었을 게 뻔하죠? 페넬로티만 아니었으면 비웃었을 게 분명하겠죠?
외통수라는 것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이다. 유려한 혓바닥을 지닌 녀석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말을 고르고 있는 듯한 모습, 당연하지만 정답 따위는 없다. 진실을 고백하는 것은 하책이다. 그렇다고 이걸 계속 진행할 수도 없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내 모습을 확인하는 녀석, 아마 페넬로티 영애의 얼굴이 눈에 보일 것이다. 약간은 감정적인, 그리고 불안해하는 듯한 표정, 본능적인 직감이 제발 정답이 아니길 바라고 있는 듯한 얼굴, 무엇보다 큰 용기를 낸 것이 눈에 띄지 않을까.
실제로도 아이나 페넬로티의 몸이 떨리고 있다. 당당해 보이는 것도, 자신만만해 보이는 것도 억지로 용기를 쥐어 짜냈기 때문이다.
‘제니스 후작님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요?
‘제니스 후작이 맞기는 한 건가요.’
끝까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질문이었고, 이 의문에 숨겨져 있는 속뜻이었다. 청혼을 빗대어 돌려 말한 것이다. 페넬로티 스스로도 완벽하게 자각하지 못한다는 설정이었다.
“모든 것을 걸고 이야기하건대 결코 페넬로티 영애를 욕보이거나, 모욕하거나, 이 관계를 장난처럼 여긴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언제나… 진… 진심으로 페넬로티 영애를 대해왔고….”
‘이 새끼. 거짓말하는 거 봐.’
“다만, 지금 당장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을 뿐입니다.”
“말… 말씀해 주실 수는 없으신 건가요.”
“지금 당장은 어렵습니다. 페넬로티 영애.”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냐고. 제니스 후작. 아니, 진 군사.’
당연히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다.
“…….”
“…….”
“이… 이만 돌아가 주세요. 제니스 후작님. 몸이 피곤하네요.”
“저, 페넬로티 영애.”
“화… 화가 나거나…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조금… 조금 피곤해서요. 단지 그것뿐이에요. 뭐가 뭔지… 조금 혼란스러워서… 꿈 때문에… 아마 꿈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
“…….”
뭐라고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살짝 몸을 일으키자 녀석 역시 몸을 일으켜왔다.
‘혼란스러워?’
갑자기 이야기가 너무 급하게 전개된 것 같고 그래?
‘진짜 설마 설마 했는데 이 새끼 진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놀기 바빴나 보네.’
따로 지침 매뉴얼 같은 게 없으셨나 보다. 아이나 페넬로티가 먼저 허를 찔렀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허를 찔린 것보다 더욱더 당황스러운 것은 아마 자신의 마음일 것이다.
도대체 이 새끼는 뭘 어떻게 하고 싶었던 걸까?
자기 스스로에게도 하고 싶은 질문이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난 도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걸까. 어째서 페넬로티 영애와….’
이 지랄 하고 있겠지 뭐.
페넬로티와 자신 사이에는 절대로 허물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소꿉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은 것일까. 혼란스러운 녀석을 더 혼란스럽게 할 수밖에 없는 시점.
“그럼… 편히 쉬세요. 제니스 후작님.”
문이 닫히기 직전에 바로 울어버리기. 꾹꾹 참아왔던 눈물을 흘리면서 바로 울어버리기. 이유는 없고, 왜 우는지도 모르고 개연성도 없지만 일단 냅다 울어버리기.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이 다가와 위로해 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다.
“페… 페넬로티.”
“괜찮습니까? 페넬로티 영애.”
“페…페넬로티 영애….”
“뭐… 뭐 저딴 새끼가 다 있나요? 오늘부터 제니스 후작에 대한 모든 지지를 철회하겠어요! 할 거 다 해놓고… 달콤한 말은 전부 다 해놓고. 다이아몬드 목걸이고 뭐고 세상 다 줄 것처럼 해놓고… 정작 중요한 청혼은 못 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뭔가요? 아주 악독한 사람이었군요. 제니스 후작은….”
‘할 거 다 하지는 않았는데.’
제니스 후작의 지지율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애초에 데뷔탕트 무도회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거라고요. 저런 사람들은… 그저 재미있게 즐기는 것 만이 전부인 사람들이에요. 결국에는 나 몰라라 할 거면서… 한 가정을 책임질 용기도 없는 머저리 같은 남자라고요! 페넬로티 영애! 울지 마세요. 저, 저런 사람 때문에 괜히 울 필요 없어요. 괜… 괜히… 울… 흐윽… 끄으윽….”
“울… 울지마 페넬로티. 흐윽… 흐으으윽.”
‘너네 왜 같이 울어주니.’
“다… 다들 우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알이라도 품고 있는 어미 새마냥 이쪽을 꽉 껴안고 있는 영애들의 모습은 가관이라 할 만했다.
‘얘들아.’
“김현성 백작으로 갈아타요. 사, 사실 저는 처음부터 김현성 백작을 밀고 있었다고요.”
“그런 남자들 전부 신경 쓰지 마. 페넬로티. 우리들끼리 똘똘 뭉치면 되는 거니까. 그, 그러지 말고 오늘은 거실에서 다 같이 잘까? 응?”
영애들의 위로에 살며시 미소짓는다. 그 와중에 망원경으로 제니스 후작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평소처럼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평소보다 더 무거운 것처럼 느껴진다.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당최 저 표정은 풀 생각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본인의 부하들을 만난 이후에도 상태가 그대로였다.
-저… 군사님. 드릴 말씀이….
-나중에 듣겠습니다.
-급한 일입니다.
-나중에.
-군사님.
-…….
-…….
-나중에 듣는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제길!
‘너… 화낸 거니? 지금 흥분하고 있는 거니?’
-제기랄….
-…….
-제기랄!
심지어 방으로 들어가 물건을 집어 던진다. 이후에는 손바닥에 머리를 기대고 깊은 고민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제길!
‘완전히 드라마 퀸이자너.’
언뜻 보니 남주가 자신의 진짜 마음을 자각하는 순간처럼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