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93화
피의 무도회(3)
조금 오바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의 격한 반응이었지만 이 정도 반응도 모자라다. 하루아침에 비극의 여주인공이 되어버린 아이나 페넬로티.
믿었던 사람에게, 의지하고 싶다고 생각한 상대와의 관계가 모두 거짓이었단다. 어쩌면 평생을 함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상대가 사실은 신분을 숨긴 채로 무도회장에 잠입한 테러리스트였단다.
이 시대의 감성으로는 대 충격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맞다. 온갖 막장드라마로 단련되어 있는 현대인들의 경우에는 그나마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이성적으로 상황을 지켜볼 수 있겠지만, 아이나 페넬로티의 경우에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이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당연지사. 그간 해왔던 모든 말들이 사탕발림이었다.
자신이 아는 제니스 후작은 제니스 후작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는 거다.
손과 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과호흡까지 찾아오려고 한다. 눈물이 눈에 맺혀 제대로 앞이 보이지도 않았을 정도, 그 와중에 제니스 후작이 다가오려고 했으니 당연히 소리를 지르는 것이 맞다.
눈앞에 있는 것은 제니스 후작이 아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가까이 오지 마!”
그 와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1군사의 모습이 참 대단해 보이기야 했지만….
‘속은 문드러지고 있는 것 같자너.’
그 단단한 가면에 균열이 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흔치 않은 절경, 천천히 다가온 녀석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뭔가 해야겠다고 느끼기는 했는지 이쪽을 부축하려는 모습을 취하고 있었지만 녀석의 손을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틱하게.
분노한 표정으로.
탁!
“페넬로티 영애.”
“…….”
“…….”
“페넬로티 영애.”
이다음에 나오는 것은 근본의 그 대사.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당신은… 어째서… 흐윽… 어째서!”
“…….”
“이럴 거면 어째서 나한테 접근한 거야. 어째서!”
“용서나 이해를 바라지는 않겠습니다. 모든 것이 제 잘못입니다. 그걸 부정하거나 변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영애.”
‘그래 시바 하나같이 열까지 잘못했지. 임무 뛰러 왔으면 그냥 임무만 뛰고 가지 무슨 욕심이 나서 영애 살롱에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고 같이 게임 하고 웃으면서 즐겼어? 도대체 시바 생각이 있었던 거야 없었던 거야.’
속으로는 부정하고 있었지만, 아닐 거라고 뭔가 사연이 있었을 거라고 스스로를 자위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용서나 이해를 바라지는 않는다는 발언 때문일까. 페넬로티의 머리가 한층 더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전부… 전부 거짓이었군요.”
‘전부 거짓말이었어.’
“…….”
“함께 한 시간들 전부가 거짓말이었던 거군요. 전부 다 거짓말이었어요. 첫 만남부터, 그간 함께한 시간들도… 그날 함께 밤을 지새우고, 테라스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것도… 전부 다 거짓말이었어요. 당신은… 당신은 저를 속인 거예요.”
“그건 거짓이….”
“재미있으셨겠군요. 정말로… 재미있으셨겠어요. 제가 얼마나 멍청해 보였을까요. 바보처럼 보였을까요.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비참해요.”
눈물 일발 장전.
“전 제니스 후작님을… 당신을 진심으로 믿었는데….”
녀석 역시 급하게 말을 이어온다.
“저 역시 그 순간만큼은 페넬로티 영애에게 진심이었습니다. 그것만큼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매일매일 나누었던 대화들이나, 함께 보낸 시간은 결코 꾸며낸 것이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냐고. 네가 말하면서도 말 안 된다는 거 느끼고 있는 거 아니냐고. 지금에 와서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냐구.’
“페넬로티 영애.”
“…….”
“저를 신뢰해 달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영애를 속인 것은 사실이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힌 것 역시 사실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영애. 영애 스스로를 생각해 주십시오. 무엇이 옳고 그른 판단인지는 영애께서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훗날 영애의 계획에 제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최소한 공화국에서는 영애가 저주받은 3녀나 결혼에 인생을 걸어야 하는 귀족 영애의 삶을 살아갈 일은 없을 겁니다.”
“그곳에 가면 무엇이 있나요.”
“…….”
“만약 공화국으로 간다면 무엇이 저를 기다리고 있나요. 여전히 저는 혼자일 거예요. 매일 아침노을이 뜨기를 기다리게 될 거예요. 네. 꿈이요. 꿈을 펼칠 수도 있겠죠.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제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그게 더 행복한 삶이 될 거라 확실하게 장담하실 수 있나요? 아니, 그 이전에 귀족 영애의 삶이 그리 불쌍하고 애잔하게 느껴지셨나요?”
“영애는….”
“우습게 보지 마세요. 떠밀렸다고 한들, 제가 선택한 삶이에요. 이 무도회장에 나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배우고, 얼마나 많고 다양하고 친절한 사람들을 만났는지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실 거예요. 그래요. 멍청하게 느껴지시겠죠. 더 넓은 세상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살다가 온 당신의 눈에는 이 모든 것들이 하찮고 바보처럼 느껴지실 거예요. 하지만….”
“…….”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요.”
“…….”
“여기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장소라고요. 치열하고, 끈기 있고,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장소란 말이에요. 뭐가 그렇게 불쌍해 보이셨나요? 얼마나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계시길래 타인의 삶을 쉽게 재단하고 평가하시는 건가요. 여기에 모인 영애들 중에 필사적이지 않으신 분들은 단 한 명도 없어요. 그 누구도 스스로의 삶을 원망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고요.”
“…….”
“가치 있다고 생각하시는 일을 하고 계셔서… 참 좋으시겠네요. 이 무도회장에서 하시려고 하는 일들이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이신가 보군요. 뻔하겠죠. 대륙을 위해서, 국익을 위해서, 하지만 저희 역시 마찬가지예요. 이 혼인동맹은 저희 왕국연합의 국익과 대의를 위한 일이에요.”
“…….”
“저는 제 삶을 원망할지언정, 제가 선택한 일에 의문을 표하거나 부정한 적이 없어요. 저는 페넬로티 자작가의 3녀 아이나 페넬로티입니다. 당신의 생각처럼, 웃기지도 않는 혼인동맹을 위해서 먼 길을 찾아온, 아이나 페넬로티예요.”
“영애.”
“저는 조국을 배신할 생각도, 가문을 배신할 생각도, 제 긍지를 배신할 생각도, 제 명예를 배신할 생각도 없습니다.”
페넬로티의 눈에는 자신이 페넬로티 자작가의 3녀라는 긍지가, 왕국연합 귀족가의 일원이라는 신념이 담겨 있다.
‘성장했나?’
아니, 어쩌면 성장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따위가 아니다. 아이나 페넬로티는 본래부터 보석이었다.
이미 그녀는 왕국연합에서, 페넬로티 자작가에서 다듬어졌다. 그게 비록 고통 받고, 찢어지고, 상처 입는 방식이었을지언정,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와 신념, 명예를 가지고 이 자리에 있다.
눈물이 가득 차 있는 아이나 페넬로티의 눈이 빛나는 걸 녀석 역시 분명히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녀석의 눈이 다시금 나와 마주친다.
“…….”
“…….”
‘반했…어?’
새삼스럽게 이런 말 하기도 좀 부끄럽기는 한데….
‘너 진짜로 다시 한번 반했…니?’
1군사는 꽤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 같은 모습이다.
물론 아이나 페넬로티의 말을 무시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말들이 떠오르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그녀와 부딪히는 대신 아이나 페넬로티의 뜻을 존중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야 다른 것도 아니라 명예라 말하지 않았던가. 아이나 페넬로티는 절대로 자신의 명예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자신의 긍지를, 삶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명예에 환장하는 1군사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뜻을 웃음거리나 조롱거리로 소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녀석의 입장에서 이 무도회가 전부 헛짓거리처럼 비추어 졌었다고 한들 그곳에 있는 아이나 페넬로티라는 한 인간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 아이나 페넬로티는 왕국의 귀족으로서 무도회에 자리해 있었으므로.
“페넬로티 영….”
녀석이 입을 뗀 순간,
곧바로 발걸음을 돌린 것은 순식간.
녀석이 저도 모르게 채 손을 뻗기도 전에 페넬로티 영애는 곧바로 테라스를 박차고 무도회장으로 들어간다.
곧바로 영애들의 시선이 쏟아진 것은 당연지사.
“제니스… 제니스 후작 이 개새끼야아아아아!”
파스텔 영애의 커다란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물론 그런 것보다 더 심하기는 한데. 막 상처받고 그런 건 아니야.
짧은 시간이었지만 눈물로 얼룩져 있는 페넬로티 영애의 얼굴,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은 모두가 함께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보나 마나 제니스 후작이 페넬로티 영애에게 다시 한번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
청혼을 할 것처럼 데리고 가 마지막 순간에 도망쳤다든가, 사실은 처음부터 청혼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든가 하는 흐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1군사 이 새끼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아직도 황급히 이쪽을 쫓고 있었다.
그 앞을 브러쉬가 가로막는다.
“페넬로티에게서 떨어지세요!”
곧바로 옆 테이블에 있는 것들을 집어 1군사에게 집어 던지기 시작, 그게 컵케이크였다는 게 조금 아이러니하기는 했지만 놈의 가슴에 컵케이크가 부딪힌다.
“페넬로티 영애에게서 떨어져! 이… 이! 쓰레기!”
“페넬로티! 괜찮아?”
“페넬로티 영애! 괜… 괜찮으신가요?”
“진정하세요. 페넬로티 영애. 일단은 진정… 괜찮아요. 전부.”
“전부 괜찮으니까. 진정하세요. 제니스 후작은 저희가 막아드릴 거예요. 일단 방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얘네들 아직 사태파악 못 하고 있자너.’
당연히 전부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구태여 내게 당장 돌아가라고 말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분명히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 상황으로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가 아닐까.
페넬로티가 이런저런 돌발행동을 하는 것도 모두 상정해 놓은 상태겠지만 굳이 내 입을 막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일차적으로 대처할 시간이 없을뿐더러… 페넬로티가 진실을 알았다고 한들,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여기에서 뭐라고 설명해 봤자 다들….’
저 영애가 무슨 미친 소리를 하겠냐는 반응이겠지.
지금도 그렇다.
울면서 테라스를 빠져나오는 페넬로티는 구경거리나 다름이 없다.
모두가 흑장미 살롱 영애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결국에 페넬로티 영애가 상처를 받았다느니,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느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도,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처럼 이쪽을 위로해 주기 위해 다가오는 영애들까지, 들어온 풍경은 평소와 같은 무도회장이었다.
춤을 추고, 대화를 나누고,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로운 풍경, 최소한 아이나 페넬로티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던 풍경, 언제나 세상을 밝게 비춰 그림자들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를 새로운 곳으로 인도해 준 풍경이었다.
그 가운데 아이나 페넬로티는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 도망치세요! 피하세요!”
“어?”
“모두 피하세요!”
“페넬로티 영애? 갑자기 무슨….”
“지금 당장! 피하세요! 이곳을 벗어나세요!”
“어… 어?”
“당장 도망쳐!!!!!!!!!!!!!!!”
그와 동시에, 커다란 폭음이 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페넬로티 영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