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94화
피의 무도회(4)
폭음과 함께 무도회장 전체가, 아니 성 전체가 흔들린 것처럼 느껴진다. 곧바로 무도회장을 환하게 비추었던 야명주들이 일순간 꺼지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회장에 어둠이 드리운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뭐야… 뭐야! 뭐야!”
“피하세요! 모두 피해요!”
“제기랄!”
장내에 혼란이 찾아온 것은 당연지사. 여기저기서 깜짝 놀란 것 같은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누군가 어디론가 뛰어가는 소리, 서로 부딪치는 소리, 물건들이 깨져나가거나 떨어지는 소리, 공황에 빠진 사람들의 비명 소리,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은 제니스 후작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는 것. 계속해서 페넬로티 영애를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어쩌면 녀석이 방아쇠를 당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나 페넬로티의 안전이 녀석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라면 놈이 이걸 시작할 확률이 더욱더 내려갈 수밖에 없다.
정답은 둘 중에 하나다.
과잉충성을 하고 있던 진군사의 부하 녀석들이 참지 못하고 방아쇠를 당겼거나.
‘여단.’
물론 어떤 집단이 방아쇠를 당겼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미 일이 터지고 작전이 시작된 이상,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각 세력들은 각자의 목표를 위해 움직일 터였다.
여단놈들이 터뜨렸든 터뜨리지 않았든 간에 놈들은 이미 이 자리에 있을 확률이 높다.
골든타임은 길어야 15분, 아니, 10분 이하. 놈들이 이곳에 도착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일단 곧바로 몸을 일으켜 주변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페넬로티. 괜찮아? 페넬로티!”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은 모두 모여 있다. 이쪽을 감싸고 있었던 파스텔 영애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보인다.
커다란 소리가 들리자 본능적으로 나를 끌어안고 바닥을 구른 듯한 모양새. 계속해서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페넬로티의 안부를 물어보고 있었다. 그 이후에 보인 것은 페인트 영애와 팔레트 영애다.
“다들 괜찮으신가요?”
“괜찮습니다. 페인트 영애.”
그 와중에 극도로 불안해 보이는 브러쉬 영애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자꾸만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는 중, 혹시나 얘가 공황 상태에 빠졌나 걱정이 돼 몸을 가까이 붙이자 이상한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
“브러쉬 영애. 괜찮으신가요?”
“어떻게 하죠? 흐윽… 저희 어떻게 해야 되는 건가요? 이게 뭔가요.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냐고요!”
‘그래 당연히 이게 일반적인 반응이지.’
“시작된 거예요….”
“브, 브러쉬 영애?”
“드디어 시작된 거예요. 이제 왕국연합은 끝났어요. 전부 끝이라고요.”
‘뭐야 얘 너… 뭐 알고 있었어?’
“성난 민중들이 드디어 왕국연합을 상대로 깃발을 들어 올린 거라고요! 혁명이에요! 분명히 혁명이 시작된 게 분명해요! 이제 전부 틀렸어요! 왕국연합이 끝장났다고요!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요. 드디어 그들이 참지 못하고 일을 벌인 거예요! 이미 비밀리에 여기까지 일이 진행되고 있었던 거라고요! 무도회장까지 침입하다니!”
‘그거 아니야. 시바 혁명 터진 거 아니야.’
“이… 이럴 수는 없어요! 영애들! 전부 저를 따라오세요! 가담해야 해요! 혁명에 가담해야 한다고요! 그게 유일하게 살 수 있는 길이예요! 역사적으로도 혁명에는 무조건!”
‘아니라니까. 시바.’
“그런 게 아니에요. 브러쉬 영애.”
“…….”
“민중들이 혁명을 일으키거나 그런 게 아니라고요. 이건… 이건 테러예요.”
‘정답.’
“분명히 테러라고요. 그것도… 제니스 후작이 계획한 테러가 분명해요.”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 페인트 영애의 눈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분명히 모두 도망치라고 외친 것을 기억에 담고 있는 것이다.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제니스 후작과 함께 테라스에 들어갔다 나온 이후에 페넬로티 영애가 가장 처음 한 말이 피하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테라스에서 있었던 대화가, 페넬로티가 눈물을 흘린 원인이 둘의 사랑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당연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는… 제니스 후작이 아니에요.”
“네… 네?”
“그는 자신을 공화국의 오호대장군, 진청이라 소개했어요. 자세한 건 몰라요. 저와 함께 공화국으로 갔으면 한다는 말을 전해왔어요. 곧바로 무도회장을 떠나 살롱으로 돌아가라고요. 그리고… 자신들과 함께하고 싶다면 정원에서 기다리라는 말도… 정황상 그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 확실해요.”
“잠, 잠깐만요. 저…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러니까.”
“…….”
“그러니까 제니스 후작이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무도회장으로 잠입한 테러리스트였다는 뜻인가요?”
“그 말 그대로예요. 페인트 영애.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분명히… 분명히 이건 그의 짓일 거예요.”
“머리가… 아프네요.”
“미친… 그, 그게 뭔가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러운데… 그게, 정말인가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페넬로티. 그게 정말이야? 아니 지금 그게 무슨….”
페인트 영애가 급하게 말을 이어왔다.
“사실 확인이나 질문은 나중에, 일단은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요. 영애들.”
‘그래. 그게 맞아. 괜히 눈먼 칼에 맞고 싶지 않으면….’
“공화국에서 온 게 맞다면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날 거예요. 어쩌면 요인암살이 목적일 수도 있겠죠. 이곳에 있는 귀족들 중에 몇몇이 그들의 목표물일 수도 있고요. 일단은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요.”
“페인트, 그렇다면 그냥… 도망친다는 거야?”
‘그럼 도망쳐야지 뭐 어쩌게? 맞서 싸우기라도 하게?’
“도망치는 것이 아니에요. 전장을 옮기자는 소리죠.”
‘뭐 전장을 옮겨? 너희들 뭐 하게?’
“아직은 정보가 너무 부족해요. 제니스 후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살롱 쪽은 안전하다는 게 보장된 셈이니… 그곳에서 이후의 일을 도모하는 게 나아요. 당장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뭘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그래요.”
‘왜 이렇게 침착하지.’
특히나 냉정하게 상황을 지켜보는 페인트 영애가 꽤 인상이 깊다.
“아마 왕국연합의 근위대가 상황을 통제하려고 할 거예요. 어쩌면 전투가 일어날 가능성도 높고 말이에요. 저희들에게까지는 화가 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며 자연스럽게 영애들을 진정시키고 있다.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 말고도 다른 영애들이 하나둘씩 모이는 중, 모두가 그녀를 중심으로 몸을 낮추고 빙 둘러앉아 있지 않은가.
물론 모든 영애들이 저렇게 침착한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눈물을 훌쩍이는 이도, 두려움에 몸이 굳어버린 이들도 있기는 했었지만, 주변 영애들의 도움으로 대부분은 빠르게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일단 불을….”
“아니요. 불은 켜지 마세요. 저희들의 위치를 알릴 수는 없어요. 이대로 몸을 낮추고 최대한 빠르게 무도회장을 빠져나가겠어요. 파스텔 영애가 앞장서 주시겠어요?”
“괜, 괜찮을까요?”
“네. 괜찮을 거예요.”
‘그래. 내 생각도 그래…. 아마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적어도 공화국 놈들이라면 굳이 필요 없는 타깃에 손을 대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녀석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아아아아아악!”
“살… 살려줘. 살려… 아아아악!”
‘시X… 왔다.’
“빨리빨리 움직여!”
보지 않아도 놈들이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황상 근위대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한두 놈이 아니다. 어디에서 범죄자 새끼들이라도 주워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존 여단 멤버들 외에도 미친 살인귀 놈들이 더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긴 그냥 눈속임인 건가? 정진호는? 정진호도 여기에 있나?’
이곳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여단이 타깃을 송정욱으로 잡았을지, 김현성으로 잡았을지에 따라 행선지가 바뀌었을 것이다.
만약 이곳에 정진호가 있는 게 맞다면…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알프스랑, 벨리에 여기로 보내요. 걔네 어디가 있어요? 군사님?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렇지 않아도 준비하고 있었다.
-하연수는 김현성 쪽에 붙여 주시고요. 가능성은 낮지만 만약에 현성이가 여단 놈들이나 공화국 놈들한테 뒈질 것 같으면 바로 개입해 주셔야 합니다. 김현성 백작이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죠? 창렬이는 회장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영애들 구출에 투입해 주세요.
-네놈은….
-저는 일단 여기 영애들이랑 같이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살롱에 도착한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뭣 하고 있어요! 빨리 움직여요. 페넬로티 영애.”
“네.”
무도회장이 무척 넓다 보니 기어가기에 꽤 길다. 여기저기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특정하기 불가능한 상황.
정황상 근위대, 공화국놈들, 여단놈들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지만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공간에 연기까지 들어차 있으니 나를 제외한 다른 영애들은 한 치 앞도 확인하기 힘들지 않을까. 아마 보인다고 하더라도 피아식별이 불가능할 것이다.
‘시X 뭔 가짜들이 이렇게 많냐고.’
제니스 후작부터 시작해서, 전부 가짜 신분을 달고 온 가면무도회이다 보니, 어제같이 인사를 나누고 춤을 추던 놈들도 무기를 꺼내 들고 서로를 겨누고 있다. 계속해서 피가 튀고 비명이 들려온다.
두려움에 귀를 꽉 막은 영애들이 눈물을 훔치며 기어가고 있었고, 그들의 옆으로 사람들이 죽어간다. 계속해서 음악을 켜고 있었던 음유시인들도, 무도회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사용인들도 모두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 피 웅덩이를 밟았는지 철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아아아악!”
“살… 살려….”
“…….”
“앞만 보고 걸어가세요. 영애들.”
“…….”
“어깨에 손 올리고 앞만 보고 걸어가는 거예요. 다른 곳에 눈 돌리지 마세요.”
‘얘네는 왜 이렇게 안 와?’
그 와중에 이쪽에 합류하지 않은 알프스와 벨리에에 대한 원망이 무럭무럭 자라난 것은 당연지사. 흰둥이가 무도회장에 반입불가가 되어 제대로 이쪽을 찾을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이쪽 어딘가에서 이미 전투 중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되겠는데.’
“파스텔 영애. 왼쪽으로.”
“응. 페넬로티.”
“뛰어요.”
“다들 뛰어요!”
“빨리!”
기어서 이동하던 영애들이 일순간 몸을 일으켜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중간에 뭔가에 걸렸는지 넘어지는 영애를 다시 손으로 끌어 올린 이후에 희미한 빛이 보이는 곳으로 이동한 순간. 옆쪽에서 칼날이 날아 들어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발 늦게 고개를 돌리며 몸을 옆으로 날렸지만, 이미 칼날은 배에 닿기 직전. 기분 나쁜 금속이 몸을 파고들 거라고 생각해 인상을 찌푸렸지만 예상했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
칼날이 뭔가에 막힌 듯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 제니스 후작이나 김현성 백작이, 혹은 알프스와 벨리에가 제때 도착했나 했었지만 칼날을 막아준 것은 녀석들이 아니다.
“어어?”
뿌연 연기에 막혀 있다. 그걸로도 모자라 칼날을 막은 연기는 점점 형태를 만들어가는 중, 마치 괴물처럼 보이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것은 당연지사.
자연스럽게 연기가 시작된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뭐… 임?”
여전히 감정이 없는 표정을 한 채로, 연초를 입에 물고 연기를 뿜어대는 팔레트 영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쓰으으읍.
하는 소리와 함께 팔레트 영애가 숨을 들이마시자 길었던 연초가 순식간에 타들어 가는 것이 보인다.
그녀가 후우우우우우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내뱉자, 입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와 함께 막혀 있던 칼날이 으직으직하는 소리와 함께 으스러진다. 심지어 연기는 검을 내 질렀던 괴한의 몸을 꺾어버렸다.
‘고유마법?’
“쓰으읍….”
“…….”
“후우우우우우우우우우.”
저도 모르게 입을 열 수밖에 없다.
“팔… 팔레트 영애… 그건….”
“교양입니다.”
“네?”
“교양으로 배운 마법입니다. 페넬로티 영애. 배웠다기보다는 만들었다는 표현이 더 올바르겠지만….”
‘아니 시바. 니들 교양으로 마법이랑 이것저것 배운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멍하니 마음의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지금껏 확인하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
‘뭐야. 니들?’
“…….”
“…….”
“…….”
왜 이렇게 능력치가 높은 얘들이 보여?
‘뭐가 이렇게… 배운 게 많아?’
너희들… 유사시에 전쟁이라도 나가?
“후우우우우우….”
시가레트 영애가 다시 한번 연초를 깊게 빨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