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95화
피의 무도회(5)
다시 생각해도 당황스러운 일이다. 정체를 숨긴 게 이쪽과 제니스 후작뿐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얘는 혹시 어디에선가 파견된 요원 같은 것이 아닐까. 공화국의 음모를 사전에 캐치해 비밀리에 숨어든 비밀영애집단 같은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팔레트 영애의 오리지널 스펠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파란 유소년 교육 시설에서 그리폰 어쩌구 하는 마법을 사용했던 녀석보다 더욱더 퀄리티 있는 주문, 겉멋만 잔뜩 들어 있는 그 녀석의 마법과는 질이 다르다.
실제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실용성이 있다는 소리다. 마력의 연비, 위력, 심지어 독창성까지, 다시 보니 연초도 공정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연초를 매개체로 주문을 구동하고, 본인이 뿜어내는 연기를 마력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라 타 주문보다 훨씬 더 간결하다.
지금은 어디서 뭐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마치 안개 소환사 천관위가 생각나게 하는 마법.
물론 현 교국의 기둥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녀석과 팔레트 영애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실제로 녀석을 생각나게 할 정도의 모습이었다.
‘천재’.
이 여자는 천재다.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하얀이 같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괴물은 아니었지만, 평범한 이들을 기준으로는 충분히 천재라고 부를 수 있는 인재였다.
팔레트 영애의 입에서 다시 한번 연기가 뿜어져 나오자, 어두운 공간에 연기가 또 한 번 가득 들어찬다.
기존에 있던 연기들과 섞인 연기는 이번에는 어떤 물리력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조용히 퍼지며 공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감지계열 복합주문?’
“페인트 영애, 오른쪽으로 이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팔레트 영애. 부탁드릴게요. 파스텔 영애.”
“응. 맡겨줘. 페넬로티. 나한테서 절대로 떨어지지 마. 알았지?”
“네… 네.”
연기를 먼저 보내 앞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미리 확인한 것이다.
“…….”
“…….”
‘진짜 무슨 비밀결사 같은 거 아니냐구….’
물론 그게 아니라는 것은 스스로가 가장 잘 실감하고 있다.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영애들의 호칭에는 그런 정보가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믿기지는 않지만 팔레트 영애가 직접 밝힌 것처럼 단순 교양의 일환인 것처럼 보였다.
‘왕국연합 결혼 시장이 이렇게 빡셌었던 거야?’
스펙 때문이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렵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당장 어릴 때부터 이 혼인 시장 하나만 보고 달려온 영애들의 교육 열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물론 영애들 자신의 의지가 아닌 가문에 의해 시행되는 교육들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영애들은 적극적으로 이 모든 교육들을 받아들이고 흡수한다.
춤이나 악기 같은 것은 기본, 대륙사와 대륙지리 같은 사회 문화 영역, 수학과 미술도 당연히 교육을 받는다.
괜히 영애들을 초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의 학생들보다도 더욱더 가혹하고 쉴 틈 없다. 교육, 교육, 교육의 연속이고, 교육과 함께 살아간다.
기본 교양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마법 역시 그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던지라, 어느 영애든 간에 가문의 지원 안에서 마법을 공부하는 경우도 많다.
능력의 차이는 있지만 이곳에 있는 영애들의 대부분이 마법이나, 정령술, 마도학, 같은 것들이 상태창에 찍혀져 있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인기가 있는 과목은 아니었지만 심지어 교양검술 같은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페인트 영애.”
“네. 페넬로티 영애.”
“혹시 기초 교양으로 전투훈련 비슷한 것도 교육받으셨나요?”
“네. 당연한걸….”
‘당연한 거였냐구.’
“아. 페넬로티 영애는… 가문의 지원을 받지 못했… 아! 죄, 죄송해요.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불쌍하게 쳐다보는 거냐구… 너희들이 더 불쌍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시대상이 시대상인지라 실제로 교육을 받은 이들도 있는 것 같았다.
몬스터 놈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 재난교육이나 전투 훈련은 기본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물론 그리 전문적인 훈련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현대에서도 초등학교에서 재난대피훈련 같은 것들을 하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은 별로 없는 것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그냥 지나가는 느낌으로 교육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나 열악한 상황에서도 꽃을 피우는 이들이 있는 법이다.
기본 교양으로 배운 마법에 흥미를 느껴 스스로 더욱더 파고들게 된다거나, 교양으로 배운 검술에 재능이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거나, 하기 싫은 기본전투교육이나 재난교육에 그 누구보다 심취해 있는 이들도 있는 법이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서든,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위해 진취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아이나 페넬로티로서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 행세를 하기는 했지만 진짜로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들은 이곳에 있다.
이곳에 있는 영애들 거의 전원이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그 자체였다.
‘대충 봐도 쓸 만한 애들이 수십이자너.’
대부분이 실전 경험이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처음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누구나 처음을 겪지.
영애들 서로가 서로를 독려하고 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똘똘 뭉쳐 있는 영애들의 모습은 장관 아닌 장관.
손에 손을 꼭 잡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그 결실이 눈앞에 보이고 있었다.
무도회장을 빠져나와 살롱을 눈앞에 둔 것이다. 페인트 영애가 가장 적극적으로 그들을 이끌고 있는 모양새.
팔레트 영애는 마력을 많이 사용한 것인지 살짝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드디어 위험지역에서 탈출했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긴장이 풀린 몇몇 영애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야명주가 완전히 나가지는 않았는지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고 있는 중, 무도회장에서 봤던 화려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깨끗했던 드레스는 모두 피와 먼지와 잔해들로 얼룩져 있었고, 잘 정돈되어 있었던 머리들은 모두 풀어져 있다.
잘 관리받아 잡티 하나 없었던 얼굴도 마찬가지다.
“살았다.”
“살… 살았어요. 살았다구요.”
“흐윽… 흐으으윽… 엄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가요.”
“흐윽… 끄윽… 여기는 안전한 건가요?”
페인트 영애가 다시 한번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모두 일어서세요. 안전한 곳은 없어요.”
“흑… 흐으윽….”
“울지 말고 일어서세요. 아직 상황이 끝난 게 아니에요. 테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요. 아무도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고요. 근위대도, 가문의 호위기사들도 없어요. 살롱이 그나마 안전하다고 판단해 이곳으로 이동한 것뿐이에요. 이곳도 언제 위험해질지 확신할 수 없어요.”
“흑….”
“우리 스스로 우리를 보호해야 해요.”
“하지만….”
“계속 이곳에서 울고 있을 생각인가요? 왕국연합이 공격당한 거예요. 적들이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고요. 그냥 여기에서 멍하니 누군가 우리를 도와주기를 기다릴 셈인가요.”
“…….”
“아직도 많은 영애들이 이 성 어딘가에서 울고 있을 거예요.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둘 셈인가요. 우리들이 받아온 교육은 이럴 때를 위한 거예요. 그냥 멍하니 앉아서 누군가가 도와주기를 기도하고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요. 가문이 그 막대한 재산을 쏟은 것은 모두 이럴 때를 위해서 라고요. 일어서야 해요. 지금 당장 정신을 차리고 저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한다고요.”
“…….”
“루스빌라 영애.”
“네… 넷.”
“유서 깊은 마도 가문의 일원이잖아요? 마도의 끝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던 루스빌라 영애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건가요. 언젠가 모험가들처럼 모험을 떠나, 던전을 탐험하고, 밝혀지지 않은 신비를 탐구하고 싶다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영애는 대체 어디로 간 건가요.”
‘그래. 그런 동기부여 좋다. 꼭 필요한 씬이자너. 이런 거 완전 필요 하자너.’
“함가르디아 영애. 함가르디아 공작님처럼 전쟁에 나가 이름을 날리고 싶다고 말한 것은 어디 사는 누구였나요. 어렸을 적 교양검술이라 비웃던 영식들에게 결투를 신청한 사람은 이제 없는 건가요?”
“그건… 그냥 어릴 때였어요. 저도… 저도 이제 그런 건 그만뒀다고요.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이랑은 다르다고요. 저… 저는 철이 들었단 말이에요.”
“이상하네요. 제가 알기로는 분명 아직도 검을 놓지 않으셨다고 들었는데 말이에요. 그냥 취미생활이라고 하시기에는 아침 훈련도 빼먹지 않는다 하시지 않으셨나요. 제가 잘못 알았나 보네요.”
‘그래. 쟤 능력치 괜찮은 거 같더라. 조금 시기를 놓친 것 같기는 한데… 정식으로 훈련받으면 이름 날릴 확률도 있을 것 같아.’
“모두 싸울 수 있어요.”
“…….”
“우리라고 싸우지 못하는 게 아니라고요.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충분히 대처할 수 있어요. 어릴 때 받아왔던 교육들을 생각해 보세요. 물론 싸우기 위한 훈련은 많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고 여기까지 닿은 거예요. 그런 것들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일어서세요. 지금 여기서 울기보다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그게 귀족영애로서의 의무라고요.”
‘조금 간질간질하기는 한데 딱 괜찮은 것 가터.’
하지만 영애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서로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다.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총을 들고 있다고 한들, 직접 전쟁터로 나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 다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심지어 실전 경험이 있는 것은 극소수다.
그 실전 경험이라는 것도 아마 병력에게 둘러싸여 먼발치에서 활을 쏘거나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끝이었을 터다. 기껏해야 경험 삼아 출정한 잡몹 토벌대였겠지.
아직 자신들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에 페인트 영애도 패드립을 박을 수밖에 없었나 보다.
“비상시 그렇게 행동하라고! 가문에서 그렇게 가르치셨나요!”
‘너희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가, 고조할아버지, 고조할머니, 조상님들이 그렇게 가르쳤어!?’
“정말로 실망이군요!”
‘안 봐도 뻔한 가문이로구나!’
“우리는 귀족이에요. 왕국연합을 대표하는 귀족이라고요! 언제까지 배부른 돼지처럼 행동하실 건가요! 우리가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정말로 혼인동맹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이에요! 우리는 왕국과 왕국의 시민들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 특권을 가진 거예요. 당신들의 영지민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세금으로 인해 교육받으며 그 권리를 누렸다면 이제는 그 책임을 다할 차례란 말이야! 이 멍청이들아!”
“…….”
“매일매일 욕하던 능력 없는 돼지 놈들이랑 똑같아질 셈이야? 우리 가치는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법이야! 매일매일 해왔던 일이라고! 여기에 오기 전까지 수백 번은 치러왔던 일이야! 죽고 다치는 게 무서워? 여기에 가만히 있는다고 정말로 안전할 것 같아! 선택받는 쪽이 아니라 선택하는 쪽에 있고 싶다면 싸워야 해! 절대로 멈춰서면 안 된다고. 우리는 행동해야 돼. 여태까지 해왔던 것처럼 우리 가치를 증명해야 돼!”
“…….”
“…….”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
“…….”
어째서 하필 이곳으로 떨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왔는지 알 것 같은데….’
지금까지의 게이트에는 정확한 목적성이라는 게 결여되어 있었다. 아니 애초에 방향성 같은 것들을 잡을 필요도 없었다.
첫 진입의 목표는 라파엘 파티를 구하는 것이었고 어차피 육망성 게이트를 통한 1회 차 여행은 이쪽이 무슨 행동을 하든 간에 본래의 역사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습성이 있었으니까.
나는 정진호의 죽음에 개입했고, 김현성에게, 차희라에게 개입했다. 정하얀에게 개입해 외신전쟁의 시작을 봤고, 그녀의 죽음을 지켜봤다.
그 모든 것이 개연성을 부여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막연히 그 개연성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목적 없이 행동하는 것을 지양하는 경향이 있어 이번 게이트의 목표가 무엇인지 습관적으로 찾으려고 했었던 것은 당연지사.
사실 이번 게이트의 목표는 1현성을 보호하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현시점에서 이곳으로 떨어진 이유는,
“…….”
“…….”
어쩌면 눈앞에 있는 이 보석들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