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97화
피의 무도회(7)
농담으로라도 유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장난으로라도 전력이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전투 경험이 미천한 31인의 영애들과,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만 같은 방벽들이 아군이 가지고 있는 전부였으니 말이다.
투지나, 근성 같은 것들이 전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아군의 체급이 낮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마 평소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억지로 적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수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페인트 영애의 말처럼, 빛을 되찾는다는 발상은 현시점에서 쓸 수 있는 가장 괜찮은 작전이기는 하지만, 전력이 약하고 적과 아군이 모호한 상황에서 시선을 끌어들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합리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살롱을 무대 위로 끌어 올린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존재했다.
첫 번째 이유는 제니스 후작.
녀석이 이 살롱이 안전한 곳이라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녀석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다. 여단이 성내에 잠입해 있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들이닥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놈의 계산에 착오가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최소한 공화국은 살롱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든, 무슨 이상현상이 생기든 간에, 놈은 살롱에 오지 않는다.
저항의 불씨가 이곳에서 생겨났다는 걸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놈은 살롱으로 오지 않는다.
녀석의 성격상 절대로, 이곳의 불씨를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투입하지 않을 것이다.
“…….”
“…….”
여단 역시 마찬가지다.
김현성과 송정욱이 녀석들의 가장 최우선적인 목표라고 한다면, 구태여 이곳으로 찾아올 이유가 없다.
애초에 송정욱은 무도회장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체류하고 있고, 김현성 역시 살롱을 찾을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사건이 터졌을 당시에 무도회장에 있었으니 녀석들과 쫓고 쫓기는 전투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정진호와 1기영을 비롯한 여단의 핵심 멤버들, 대의를 위해 움직이는 공화국의 병력들까지 이곳에 오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남아 있는 놈들은 여단이 데리고 온 소모품일 뿐이다.
놈들을 예비단원들이라고 불러야 할지, 소모품으로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앞의 둘에 비하면 그나마 허들이 낮다.
‘그래. 걔네들에 비하면… 그나마… 낫지.’
물론 만만한 수준이라고는 볼 수 없다. 아무리 소모품이라고 한들, 작전에 투입된 인원들이었으니 말이다.
빛이 밝혀진 이후에 곧바로 이곳으로 올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더 빠르게 적들이 들이닥친 것은 당연지사.
다행히도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인간 같지도 않아 보이는 실험체 박덕구 같은 새끼들인지라 영애들의 심적 부담감도 한층 더 줄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첫 실전, 자신들이 지금 인간을 죽여야 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대신 영애들의 눈에 공포심이 깃든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같이 생긴 새끼들이 온몸에 피를 묻히고 있는 모습이 보였으니까.
내장이라든가 혈육처럼 보이는 것들이 놈들의 몸 곳곳과 무기에 묻어 있었고, 아직 굳지도 않은 붉은색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 있나 싶었는데… 흐흐흐… 귀족 영애들이네? 어라? 표정 좀 봐라.”
“저거… 싸울 작정인가 본데요?”
“저 알량한 벽을 믿고? 어이 영애님들 우리 대화 좀 합시다.”
앞에 보이는 인원은 정확히 다섯.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당연히 영애들을 무시하는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다.
‘방심해 주면 오히려 좋지.’
녀석들이 한 걸음을 옮기자 영애들이 주춤거리며 한 걸음 물러선다.
“흐흐흐흐흐.”
‘왜 꼭 악당들은 저딴 식으로 웃을까.’
“어이 세트. 장난칠 시간 없으니까. 빨리 처리하자고… 아직 할 일이 많아. 여단 놈들이 시킨 일이나 빨리빨리 마무리해야.”
자신의 몸보다도 더 커 보이는 커다란 망치를 들고 있는 녀석.
“흐흐흐… 알겠수다.”
쿵쿵 소리를 내며 녀석이 벽 앞에 선다. 그렇게 놈이 커다란 망치를 들어 올렸을 때.
“지금이에요!”
페인트 영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반사적으로 영애들이 주문을 내뱉는다. 겁에 질려 주문을 외우지 못한 영애들도 있었지만 무방비로 벽에 다가온 녀석의 몸을 넝마로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마력 능력치도 높고, 주문도 정확하다. 높은 내구를 가지고 있는 녀석처럼 보였지만, 마력을 채 일으킬 새도 없이 놈의 머리에 얼음송곳이 처박힌다.
“어?”
“계속 외워요! 계속!”
‘그래 전부 처음이 어려운 거야.’
얼음송곳을 쏘아 보낸 영애가 잠깐 충격받은 듯이 멍하니 놈이 피떡이 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반사적으로 이미 다음 주문을 외우고 있다. 눈에 눈물이 맺힌 채로 말이다.
‘아마 자기들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거야.’
지금은 그냥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공격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아드레날린에 집어 삼켜져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고 있다.
오히려 영애들보다 당황한 쪽은 동료를 잃은 쪽.
“뭐… 뭐? 세트!?”
“계속 주문 외워요! 계속! 다음!”
“제기랄! 전부 죽여!”
직후 놈들이 벽면을 향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에 있는 녀석은 마법사인지 곧바로 주문을 외우고 근접 직군인 녀석들은 각자 무기를 든 채로 벽을 두들긴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돼.’
“이 죽일 년들이! 감히!”
“막아요! 막아!”
“벽이 무너지지 못하게 해요! 보호마법부터 외우셔야 해요! 보호마법부터!”
방심해서 훅 가버린 놈과는 다르다. 영애들이 쏘아 보내는 마법을 실드로 막아내거나 쳐내고, 저항하면서 다가온 녀석이 암벽을 두들긴다.
영애들이 마력으로 쌓아 올린 벽면이 계속해서 흔들리지만 무너질 듯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다. 온몸으로 벽을 막고 있는 영애도 있고 계속해서 무너진 잔해를 입구 쪽으로 옮기는 영애도 보인다.
“으으윽!”
“막아야 해요! 막아요!”
“전부 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감히! 내 동생을 죽여?”
“막아! 막아!!”
1회용으로 만든 벽은 단단한 성벽이 아니다. 그냥 입구를 막아놓은 것이 전부다.
막상 보면 서로의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깝다. 녀석이 얼굴을 비집고 벽을 넘으려고 하자 가까이에 있던 영애들이 돌을 들어 놈을 후려치기 시작한다.
필사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손톱이 전부 빠져 피를 흘리는 손으로, 어떻게든 악착같이 녀석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넘어오지 못하게 해요!”
“꺄아아아악!”
“주문 외워요! 주문!”
“죽어! 이 나쁜 놈아! 죽어!”
“개 같은 년들!”
아직 처음이라 모든 것이 어색해 보인다. 로테이션으로 외우기로 했던 주문은 여기저기서 우왕좌왕 아무렇게나 주문을 외운 탓에 마력 소모도 심하고, 방어마법을 외우기로 했던 영애는 공격주문을 외우고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벽은 뚫리지 않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모두가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문을 외울 정신이 없어 보이는 영애고 떨리는 손으로 돌을 부여잡고 녀석에게 던지고 있다.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어 하는 이도 눈물을 흘리고 비명을 지르며 벽을 부여잡고 있다. 페인트 영애 역시 넘어오려고 하는 놈들을 향해 계속해서 마법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금방에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던 벽은 흔들리지 않는다. 무작정 벽을 넘어오려고 했던 연쇄살인마 녀석 역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씨발… 씨발!”
‘바보같이 벽에 끼었네?’
“어이! 멜! 나 좀 당겨줘! 제기랄! 당기라고!”
“…….”
“빨리 당겨! 뭣 하고 있어! 빨리 당기라고!”
한 영애가 쏘아 보낸 마력화살이 놈의 눈에 박힌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제기랄! 빨리 당기라고 했잖아!!! 뭣 하고 있는 거야! 아아아악! 죽여 버린다! 너희들! 전부 죽여 버린다!”
녀석의 팔에도 마법들이 틀어박힌다. 그사이에 한 영애가 놈의 팔을 돌로 후려쳐 놈이 무기를 떨어뜨린다.
함가르디아 영애가 검을 들어 올린 이후에 놈의 목에 그대로 검을 찔러 넣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헛구역질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끝까지 손에서 검을 놓지 않는다.
우당탕탕 벽을 넘으려고 시도했던 놈이 힘없이 쓰러져 시야에서 사라진 것은 당연지사.
“저 빌어먹을 벽부터 날려 버려!”
“아까부터 계속 쏘고 있었어! 제길! 뭐야… 이 연기는 뭐냐고! 떨어져! 일단 물러나! 일단!”
“계속 쏴요! 계속!”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이 멍청한 새끼들아! 겨우 이딴 벽에 가로막혀서 쩔쩔매고 뭣 하고 있는 거냐고!”
“그냥 밀어버려! 그냥 쓸어버리라고!”
“꺄아아아아악!”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한쪽 벽이 무너진다.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공간이 생긴 곳은 인간이 비집고 들어오기 힘든 모양새.
학습능력이 없는 녀석 한 명이 다시 한번 몸을 들이밀어 보면서 검을 휘두르자 벽에 붙어 있던 영애 한 명이 검에 긁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에 찔린 영애는 놈의 팔을 잡고 놓지 않고 있었다.
마법들이 다시 쏟아진 이후에 놈이 우당탕 밀려난 것은 당연지사.
‘진짜 처절하자너.’
한편으로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어렴풋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잘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앞서 괜찮은 출정식을 거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치거나 낙오하는 영애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어딘가에 구멍이 생길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혼란스러워할지언정 자리를 떠나는 영애들은 없다.
이곳을 사수하는 것이 곧 생존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본인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자신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애들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고 있다는 것이었다.
방법이 어떻든 간에, 작전이 어떻든 간에 본인들이 싸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와중에 살롱을 비추는 빛은 점점 희미해지는 중.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상황이었다. 마력은 무한하지 않았으니까. 벽을 유지해야 하고, 넘어오려는 적에게 마법을 퍼부어야 한다. 살롱을 빛내는 마법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몇몇 영애들은 이미 마력탈진을 앞두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런 이들 또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빛을 밝히세요!”
“빛을 밝히세요!”
“빛을 밝혀요!”
서로가 서로를 독려한다.
“빛을 밝혀요! 빛을 밝혀요!”
“이 미친! 미친! 제기랄! 당장 집어치우지 못해!?”
“꺄아아아아아악!”
“페넬로티!”
물론 페넬로티도 목이 터져라 외치는 이들 중에 하나다. 그래도 칼침을 맞는 것은 아플 것 같아 슬그머니 몸을 사리고 있었지만 개자식들에게 열심히 돌을 던지며 영애들을 독려하는 중.
“살롱을 밝혀요!” 같은 소리를 지껄여대며 앞선에서 돌로 살인마 새끼의 몸을 후려친다.
“살롱을 밝혀!”
“꺄아아아아아아악!”
당연히 부상자도 생긴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거나, 벽을 두드리는 화염마법에 화상을 입은 이들도 보인다.
‘아이고… 어떻게… 쟤… 얼굴에….’
“아아아아악! 아파요. 흐윽… 아파… 뜨거워! 뜨거워요! 흐윽… 아아악! 엄마… 흐으윽… 엄마아아아아… 흐으으윽… 아아아아!”
“라이넬피아 영애!”
뜨거워진 벽면을 계속해서 붙잡고 버팅기고 있는 영애들의 살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치이이익, 치이이익, 같은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영애들은 절대 몸을 벽면에서 떨어뜨리지 않는다.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고, 손과 등에 화상을 입고 있었지만 그녀들은 악에 받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막아아아아아아아! 흐으으윽! 막아아아아! 끄윽….”
“이게 무슨 꼴이야… 제길! 웬 계집애들한테!”
“막아아아아! 살롱을 밝혀!!”
“빛을 밝히세요!”
“살롱을 밝히세요! 살롱을 밝히세요!”
마치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 같다 생각했을 때였다.
“살롱을 밝히세요!”
저 멀리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켜지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를 들은 다른 이들이 반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