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98화
피의 무도회(8)
저 멀리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켜지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를 들은 다른 이들이 반응한 것이다. 31인의 영애들 외에 숨어 있었던 다른 영애들, 무도회장에서 무작정 도망친 영애들이 하나둘씩 주문을 외워 불을 켜고 있었다.
살롱을 밝히라는 목소리가 닿은 것이 분명했다. 물론 합리적인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모두가 함께 벽에 의지해 빛을 지키고 있는 이쪽과는 다르게 저쪽에는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자신들의 위치를 노출 시키는 것과 진배없는 행동이었지만 아예 의미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최소한 숨어 있는 영애들이 이쪽에 힘을 보태주고 싶어 하는 것은 느껴졌으니 말이다.
“뭐야… 제기랄! 이게 무슨 개지랄이야!”
“도대체 뭐냐고!”
여기저기서 켜지는 불빛에 당황한 것은 이곳에 있는 영애들뿐만이 아니다.
갑작스럽게 밝아지기 시작하는 무대에 놈들 역시 평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사방팔방에서 빛이 켜지고 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어딘가에서 마법이 날아올지도 모른다. 아마 저기에 선 연쇄살인마 새끼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들이 함정 속으로 발을 디뎠다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
“이게 도대체 무슨 거지 같은 상황이냐고! 나와! 제기랄! 거기 숨어 있는 새끼들 전부 나오란 말이야!”
“다른 영애들이에요! 다른 영애들이 도와주고 있다고요!”
“웃기지 마! 제기랄! 웃기지 말라고! 이딴 곳에서 어이없게 발목 잡힐 것 같아!”
‘보통 그렇게 전형적인 대사 던지는 애들은 일찍 퇴장하더라.’
“다른 영애들이 있어요!”
“살롱에 불을 밝히세요!”
“다른 영애들이 근처에 있다고요!”
“살롱을 밝히세요!”
“이 새끼들아! 우습게 보지 말라고! 뭣도 모르는 년들이!”
‘응. 아니야. 쟤네들 다 알 만큼 알아. 너보다 아는 거 많은 얘들이야. 얘네 어딜 가도 수석 먹을 얘들이야.’
“쏴요! 계속 쏴요!”
“꺄아아아아아아악!”
“벽에서 떨어지지 마요! 밀어붙여요! 밀어! 밀어! 앞으로 밀어요!”
“아아악! 제기랄!”
“빛을 밝히세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기가 올라갔다는 것이었다. 이 장소에 자신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영애들의 눈에 희망이 차오른다.
곳곳에서 밝혀지고 있는 빛은 장관이라면 장관이라고 할 만한 광경이었으니 그녀들이 힘을 얻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점점 체력과 마력이 고갈되어 가는 영애들이 다시 한번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받은 것이다. 이제 남아 있는 적은 겨우 둘, 당연히 꼬리를 내린 것은 녀석들 쪽이었다.
“제길!”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곧바로 몸을 내빼려고 하는 놈들이 시야에 비친 것은 당연지사.
“바깥으로 나가야 해요!”
“어? 페넬로티?”
“다른 영애들이 불을 켠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고요!”
내 말에 곧바로 파스텔 영애가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은 모습, 솔직히 조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그녀 역시 제대로 실전을 치른 것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벽 안쪽은 안전하지만 바깥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알고 있을 터, 하지만 움직임에 망설임이 보이지 않는다.
눈에는 약간의 공포와 두려움이 숨겨져 있지만 그녀는 작은 체구로 이를 악물며, 벽을 넘기 위해 몸을 던지고 있었다.
“빨리요! 빨리!”
“페넬로티 영애?!”
“벽을 허무세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페…넬로티 영애?”
“일단 허물어요! 페넬로티가 허물라고 했잖아요! 빨리 벽 치우라고욧!”
브러쉬 영애가 잔해를 치운다.
“모두 빠져나와요!”
‘우리 시바 땅따먹기한다고 했잖아. 지금 움직여야 된다고!’
“부상당한 영애들을 부축할 영애들만 남고 모두 따라오세요! 대기실 앞까지 가서 다시 벽을 세울 거예요.”
“아!”
그제야 내가 원하는 그림이 뭔지 캐치한 페인트 영애가 다른 영애들을 독려한다.
“페넬로티 영애의 말이 맞아요! 빨리! 움직이세요!”
“팔레트 영애! 파스텔 영애를 부탁드려요!”
“네. 알겠습니다.”
‘시바 든든하자너.’
연초를 깊게 빨아들인 시가레트가 연기를 내뿜고, 그 연기가 파스텔의 몸을 휘감는다.
벽 없이 맨몸으로 살인마 새끼들과 마주한 파스텔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기는 하지만 그동안 잘 훈련받아온 몸이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한 번 겪었잖아.’
할 수 있다는 거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거 아니냐고.
몸이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무서울지도 모른다. 아마 첫 실전이었다면 그녀는 공포에 매몰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전이라면 이미 겪었다. 그게 벽 안에서 안전하게 치른 데뷔였다고 한들 깨달은 것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것들을 깨닫지 않아도 괜찮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자신감이다.
‘너 스탯 괜찮은 편이야. 저 새끼들이랑 별반 차이도 안 난다고.’
“꺄아아아아악! 파스텔 영애에!! 꺄아아아악!”
“페넬로티!”
“이… 이! 개새끼들이! 페넬로티에게 감히!”
“뭐? 우리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곧바로 몸을 날리는 파스텔 영애, 눈을 깜빡이지도 않는다. 적을 눈앞에 둔 파스텔이 집중 상태로 들어간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집중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린 것 같은 모습, 연기의 도움을 받기는 하고 있지만 저 살인마 새끼들과 실제로 몸을 부딪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 짝이 없다.
휘두르는 검과 마법을 피해내며 체구에 비해 긴 다리로 계속해서 상대방의 하체를 두드린다.
뻐억!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다리가 꺾여 나갈 정도로 힘을 실은 발차기를 보니 입이 떡 벌어진다.
‘재능충이자너.’
거리를 재는 방법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다. 본인이 지닌 강점이 뭔지, 어떻게 해야 상대를 공략할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다.
자신감을 얻은 다른 영애들 역시 전투에 참가한 것은 당연지사. 검을 얻은 함가르디아 영애도 이를 악물고 전투에 합류해 본격적으로 교양검술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아직 마력이 남아 있는 영애들도 일단 마구잡이로 주문을 외운다.
당연히 페넬로티는 영애들을 이끌고 목적지 앞으로 향하는 중, 우르르 몰려다니는 영애들을 이끌고, 포인트에 도착한 이후, 재빠르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벽을 세워주세요.”
“네! 페넬로티 영애.”
“아까 전과 똑같이요!”
‘우리 잘 해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최소한 희미한 빛이 보이는 지역은 전부 가져간 것처럼 보인다.
“혹시 다른 분들 계시면 나와서 이것 좀 도와주세요!”
“…….”
“이곳에 벽을 세울 거예요!”
“여기 부상자가 있어요! 페넬로티 영애!”
“지금 갈게요! 부탁드려요!”
‘진짜 정신 없자너.’
그 정신 없는 와중에 숙달된 조교 같은 움직임을 선보이는 영애들이 눈에 띄었다. 대충 자신이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하는지 깨닫고 있는 것이다.
주어진 일은 간단하다. 그리 어려운 것도 없다. 벽을 세우고, 적을 막는다. 빛을 피우고, 다시 이동하며 벽을 세운다. 그 이후에는 가져온 지역을 정리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아직도 빛을 유지하고 있는 영애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 영애는 사용인들을 보호하고 있었는지, 우리가 갑작스레 나타나자 벌벌 떨면서도 돈가스 칼을 겨누고 있었다.
“이제 안심하세요.”
“…….”
“함께 싸워요.”
처음에는 살롱에서 시작했던 쉼터가 어느새 대기실까지 진출했다. 영애들뿐만이 아니라 영식이나 귀족들 역시 곳곳에 숨어 있었는지 싸울 수 있는 인원들도 늘어난다.
우리들이 해냈다거나 결국에는 할 수 있다거나 하는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된 첫 발자국을 찍은 셈이었다.
아마 모두가 성취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우리 손으로 지켜내고, 우리 손으로 얻어낸 것들이 눈앞에 있었으니 말이다.
놀라웠던 것은 페인트 영애가 꽤 능숙하게 그 모든 것들을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
부상자들을 한곳에 모으고, 힘을 합쳐줄 수 있는지 의사를 묻는다. 물론 그 과정이 마냥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게… 뭣… 하는 짓입니까?”
“빛을 되찾으려고 하고 있어요.”
“그걸 누가….”
“자의적인 판단이에요. 도움을 주고자 했을 뿐이에요.”
“더 위험하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곧바로 이곳에 놈들이 몰려올 겁니다. 차라리 외부에서 병력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게 더욱더… 나았을 터인데! 벌집에 불을 붙인 꼴이 아닙니까!”
“뭐가 어찌 됐건 간에 그냥 가만히 앉아서 죽는 것보다는 나아요. 싸울 생각이 없다면 살롱 안에 숨어 계세요. 함께 해달라고 빌거나 구걸하지 않을 테니까.”
‘꼭 비협조적인 사람들이 나오긴 한다니까.’
쓸데없는 짓을 하려고 한다든지, 너희들 때문에 더 위험해졌다고 말한다든지 하는 놈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구태여 설득할 필요도, 언쟁을 벌일 필요는 없다. 비록 한시적이고, 제약된 공간이기는 하지만 페인트 영애는 이 자리에 있는 영애들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
누가 옆에서 뭐라고 지껄여대든 간에 영애들은 이미 자신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닫고 있다.
모두가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다음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페넬로티 영애.”
“식당까지 길을 뚫으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적들이 공격해 오지 않네요. 전, 전부 물러난 걸까요?”
“아니요. 분명히 인원을 더 꾸려서 이곳에 찾아올 거예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을 테니까요. 짧은 시간이지만 지금은 일단 벽을 더 강화하고 부상자들을 돌보는 게 먼저예요. 아직까지 숨어 있는 영애들과 사용인들을 찾아야 하고요. 경계를 세우는 인원들을 벽에 배치하고 나머지는 내부수색을 해주셔야겠어요. 어쩌면 적이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팔레트 영애. 맡겨도 괜찮을까요?”
“네. 페넬로티 영애.”
‘나는 딱 2인자 포지션이자너.’
이 셸터의 작전참모 같은 느낌이다. 실세 아닌 실세이기도 했지만 일단 대외적으로 영애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페인트 영애였으니까.
‘왠지 모르게 잘 보여야 될 것 같은 느낌이기는 해.’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도중 힘든 싸움을 마친 파스텔이 말을 걸어온다.
“저… 저기, 페넬로티. 아까 다친 곳은 괜찮아?”
“네. 문제없어요. 파스텔 영애. 파스텔 영애는 괜찮으신가요?”
“응… 팔레트가 도와준 덕분에… 그것보다 다친 영애들이 너무 많아. 급한 대로 처치는 했지만… 혹시 성안에 있는 창고로 먼저 길을 뚫을 수 있을까? 그곳에 가면 포션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무기도 마찬가지고….”
“창고라면… 아래층이네요.”
“역시 조금은 힘들까.”
“…….”
“…….”
“지금 당장은 힘들어요.”
‘거기 포션으로 치료가 될지도 의문이고….’
일단 이곳을 안정화시키는 것이 먼저다. 많은 영애들이 지쳐 있다. 방금의 전투로 얻은 것도 많았지만 잃은 것도 많다.
지친 이들을 독려하고, 다시 한번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을 때까지는 지금 얻은 셸터를 관리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까지 빠르게 오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층까지 진출하는 건….”
“…….”
“라이넬피아 영애 때문이군요….”
‘그래. 얼굴에 화상 입은 걔….’
“응….”
‘그래. 웬만한 건 그냥 놔두려고 하기는 했는데… 그건 좀 치료해야겠더라.’
당연히 메시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군사님. 벨리에랑 알프스는 요 근처에서 구조 활동 펼치고 있는 거 맞죠?
-네놈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이쪽에 올 때 포션 몇 병만 가져와 달라고 말해주세요.
-…….
-…….
-그렇게 하지. 아무튼 잘됐군, 그렇지 않아도 연락할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오!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이네요. 뭔데요?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놈이 송정욱과 접촉한 것 같더군.
여단이 타깃에 닿았다는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