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99화
피의 무도회(9)
‘생각보다 빠른데.’
“…….”
“…….”
딱히 듣기 좋은 소식도, 안 좋은 소식도 아니었다.
구태여 어떤 쪽이냐고 묻는다면 이쪽에게는 좋은 쪽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석이 벌써 송정욱과 마주했다는 건, 적어도 김현성이 첫 번째 타깃은 아니라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애초에 김현성을 상정하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중간에 일이 꼬여 목표를 바꿨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김현성은 안전한 곳에 있다.
‘아니, 마주칠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 그냥 김현성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개수작일 수도 있을 테니까.’
송정욱이라는 인물에 대해 별생각이 없는 것 같았던 2현성이었으니 둘이 1회 차에 각별한 관계라거나 친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송정욱도 제국의 인사로서 이 자리에 있다.
녀석이 함정에 빠지거나 위험에 처했다면 어쩔 수 없이 녀석을 구하기 위해 움직여야 할 수도 있다는 거다.
물론 그게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라는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녀석은 어차피 뒈지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암튼 반가운 소식은 맞아.’
영애들이 조금 더 안전하게 활동할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혹시나 여단의 주요인물들이 이 셸터로 기어 들어오지 않았을까 하는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된 것이다.
심지어 여단의 소모품들의 시선 역시 그쪽으로 쏠려 있을 것이다. 해당 지역에 혼란을 초래하거나 동결시키려고 하지 않을까.
물론 위험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리가 필요했던 이 셸터에 적절한 시간이 찾아온 셈이었다.
“라이넬피아 영애. 괜찮으신가요?”
“네. 네… 괜찮아요. 아프기는 하지만… 저는 괜찮아요.”
‘조금 아픈 정도겠냐구. 아까까지만 해도 엉엉 울었으면서….’
“그것보다 거… 거울 있으신가요? 아무나….”
“보, 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라이넬피아 영애.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만 더 가면 왕실 창고를 확보할 수 있을 거예요. 생존자 중에 신관들이 남아 있을 수도 있고요. 이번 일이 끝난다면 저희 가문의 힘을 총 동원해서라도 치료해 드릴 거라 약속 드릴테니… 지금은 푹 쉬고 계세요.”
“많이 엉망인가요?”
“그럴 리가요. 아무튼 괜찮을 거라는 것만 알아주세요.”
‘그래 걱정될 만도 하겠지.’
라이넬피아 영애 외에도 지쳐 있는 영애들이 서로를 독려하고 있다. 대부분은 싸울 수 있는 마력을 모으기 위해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 그 와중에도 셸터는 계속해서 재정비에 들어간다.
마치 농성을 하는 것처럼 자체적으로 물자를 구한다거나, 벽을 막을 수 있을 만한 가구를 옮긴다거나, 살롱에서 여기까지 이어지는 길에 무엇이 됐건 간에 쓸모 있는 것들을 모조리 긁어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그 와중에는 양초나, 기름, 헝겊이나 옷가지, 예식용 장검이나, 장식으로 쓰였던 은 방패도 있었던 터라 파밍 아닌 파밍이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물론 일하는 것은 영애들뿐만이 아니다. 영애들과 함께 구출된 사용인들 역시 본인들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라 생각했는지 최선을 다해 영애들을 돌보고 있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반적은 응급치료 정도는 할 수 있는 인원들이 있었던지라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 영애들을 돌보고 있다.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다른 영애들이 찾아왔어요!”
“네?”
“숨어 있던 영애들이 찾아왔다고요!”
‘벌써 왔어?’
마리나 페넬로티와 카리나 페넬로티, 알프스와 벨리에가 찾아온 것이다.
“페넬로티 영애들이에요!”
“앗….”
“페넬로티 영애! 마리나 페넬로티 영애와 카리나 페넬로티 영애예요!”
생사를 알 수가 없었던 언니들의 등장. 그녀들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나 페넬로티로서는 반갑기 그지없는 소식이었다.
후다닥 그녀들을 마중하기 위해 뛰어나간 것은 당연지사. “페, 페넬로티?”라고 파스텔 영애의 짧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들과 이쪽의 가정사에 대해 대충은 알고 들었을 테니 조금은 긴장한 듯한 표정, 혹시나 그녀들이 또 아이나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걱정 아닌 걱정을 하는 듯했지만 사연 깊은 자매들의 이야기들로 분량을 할애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여기서는 극적으로 서로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진심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었다.
허겁지겁 뛰쳐나간 아이나 페넬로티의 앞에 있는 것은 힘든 전투를 치르고 온 마리나와 카리나 페넬로티. 뒤에는 그녀들을 따르는 영애들이 함께해 있다.
슬그머니 이쪽을 보호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는 파스텔 영애와 팔레트 영애. 눈빛에는 은은한 적대감이 자라나고 있었지만, 대충 상황을 눈치를 챈 마리나 페넬로티가 흥분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으로 주변 영애들을 밀치며 다가오고 있다.
“아이나….”
“…….”
“아이나!”
“언니….”
카리나 페넬로티 역시 마찬가지. 그래도 알프스의 발연기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을 보여주는 중.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그녀가 시야에 비친다.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차오른다.
그간 증오했었고, 싫어했다고 생각했었던 동생이었지만 이렇게 살아 있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운 것일까.
아니, 그녀는 처음부터 아이나를 미워한 적이 없다. 가문에 들이닥친 화와 자신의 분노를 그녀에게 쏟아냈을 뿐이다.
지금에서야 그 사실을 깨달은 듯한 표정이다. 이쪽을 보호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던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도 긴장이 풀린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언니!”
“아이나….”
포옹 씬은 당연히 국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 그녀들이 이쪽을 꽉 껴안는다.
“아이나!”
“흐윽….”
“모양새가 엉망이구나. 아이나. 칠칠치 못해.”
“죄송해요. 죄송해요.”
몸이 으스러질 것만 같은 포옹,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카리나 페넬로티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있던 영애들 역시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다.
감동적인 연출도 감동적인 연출이었지만 그녀들이 감정적이 된 이유는 아마 소중한 이들이 다시 만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농담으로라도 희망차다고 말하기 힘든 분위기이기는 했지만 이곳에서도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든, 아니면 이 낯선 장소에서 만난 친구들이든, 아니면 혼약을 약속한 연인이든 간에 그들과 다시 만나는 것을 그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아직까지도 이쪽을 꽉 껴안고 있는 그녀에게 귓속말을 보낸다.
“포션 가져왔어요?”
“네. 부길드마스터.”
“뺨이 부어 있네요? 상대는 누구였어요?”
“아. 이건 전투가 있었던 게 아니라… 아… 아니. 네. 그… 아무래도 이곳에 침입한 이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준이 꽤 높았나 본데….’
벨리에의 얼굴에 상처를 낼 수 있을 정도라면 말이다.
아무튼 간에 그녀와는 슬슬 떨어져야 할 타이밍. 그녀들이 구출해 온 다른 영애들과도 해후해야 했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는 이들이 시야에 비친다. 헤어진 친구와 꽉 포옹을 하는 영애나, 같은 살롱의 동기를 버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이들끼리 미안함과 감사함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흐윽… 흐으윽.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영애.”
“죄송해요. 미안해요.”
같은 소리들이 여전히 울려 퍼지는 중, 물론 울고 있을 수만은 없다.
가까스로 감동의 파도에서 빠져나온 페인트 영애는 곧바로 마리나 페넬로티에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페넬로티 영애.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네. 페인트 영애.”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지, 어디에서부터 오신 건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무도회장이에요.”
“네?”
“무도회장에 계속해서 숨어 있다가 남아 있는 영애들을 이끌고 무조건 빛이 있는 곳으로 달렸어요.”
“테러리스트들은….”
“무도회장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어요. 몇 명과 마주치기는 했지만 다행히….”
‘몇 명이 아니라 최소 몇십은 썰어버린 것 같은데….’
말을 멈춘 마리나 페넬로티가 슬그머니 자신의 손으로 눈빛을 돌린다. 예식용 검에 묻어 있는 피를 보고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깨달은 페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가 있었군요.”
“네.”
“그렇다면 지금 무도회장은….”
“제가 알기로는 아무도 없어요. 어디로 이동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잔당들 몇이 남아 있을 뿐이에요. 마치 적 병력이 어디론가 향하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로 향했을까요?”
마리나 페넬로티에게 던진 질문이 아니다. 페인트 영애가 자신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그다지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아마 그녀라면 충분히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 테러리스트가 단순히 영애들이나 영식들을 노린 것이 아니라는 걸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왕국 연합의 귀족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고는 하지만 실상 이들이 현 왕국연합을 이끌어 나가는 이들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애초 자신들을 암살한다고 해서 공화국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를 떠올린다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코흘리개 들을 암살할 정도로 공화국의 수뇌부들은 한가하지 않다. 당연히 어떤 목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째서 지금인가. 어째서 현시점인가.
페인트 영애의 생각이 혼인동맹을 위해 찾아온 제국에 닿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진짜 닿았네.’
물론 제국과 왕국연합의 동맹회의는 극비 중에 극비다. 김창렬과 하연수가 정보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이쪽 역시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인트 영애는 위에서 무언가가 이루어지고 있었을 거라 확정 짓고 있었다.
단순히 혼인동맹을 위해 제국의 사절단이 이곳에 도착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극비에, 다른 곳에서는 자신들이 모르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느끼는 것이 합리적이다.
결론에 다다른 페인트 영애가 입을 열었다.
“제국과의 동맹 회의로군요. 이 왕성에서… 제국과의 동맹이 진행되고 있었군요.”
‘완벽하게 정답.’
“테러리스트들의 목적은 제국과 왕국연합의 동맹을 추진하는 이들의 암살이었어요.”
“어? 뭐, 뭐라고? 페인트?”
“그들이 노리는 것은 저희들이 아니에요. 극비로 이곳에 파견된 왕족과 제국의 인사들이에요.”
“뭐… 뭣 그게 뭐야. 조금 이상하잖아. 아니, 그런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건 듣지도 못했었는데… 그, 그리고 동맹이 진행되고 있다면 더 이상하지 않아? 공화국이 벌집을 건드릴 필요는 없잖아. 오히려 이번 사건이 제국과 왕국연합이 더욱더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될 수도….”
“반동맹파가 있었겠죠.”
“뭐….”
“처음부터 이상했어요. 공화국의 오호대장군 정도나 되는 거물이 제니스 후작의 이름을 가지고 이 무도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부터가요. 왕국연합에도 제국과의 동맹을 고깝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거예요. 제국에서도 마찬가지고요. 동맹을 바라지 않은 이들과 공화국과의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이에요. 친동맹파를 전부 제거하는 것이 이번 테러의 목적이겠죠. 남의 손을 빌려서 말이에요.”
“어….”
“지금 당장 이동해야 해요. 마리나 페넬로티 영애. 무도회장에 테러리스트들이 없다는 게 확실한 정보인가요?”
“확신할 수는 없어요.”
“그래도….”
‘가야지.’
지금은 주사위를 던질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니까.
그 누구보다도 페인트 영애가 그 사실을 가장 잘 인지하고 있다. 물론 모든 병력을 움직일 수는 없다. 시간이 필요한 영애들이 대부분 이었으니까.
약간의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도박, 완전히 이성적인 판단은 아니었지만 본래 이런 종류의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가끔 과감한 수를 던져야 할 때도 있다.
운이 좋다면 무도회장을 먹어 위층과 아래층까지 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할 수 있다. 이 층 전체에 있는 다른 영애들과 다른 부상자들을 모두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주사위를 던질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냐 아니냐였다. 다른 이들의 목숨도 함께 던질 수 있는 진 군사, 이지혜 같은 종류의 인간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도회장으로 가겠어요.”
“뭐… 뭐?”
‘와… 얘 봐라.’
“제가 앞장서겠어요. 마리나 페넬로티 영애의 말대로라면, 그리고 제 예상이 맞다면 지금 무도회장은 완전히 비어 있을 거예요. 물론 잔당들이 아예 남아 있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없어요. 하지만 기껏해야 소수일 거예요. 우리 전력이라면 그들을 충분히 돌파하고도 남아요.”
“…….”
“마리나 페넬로티 영애. 카리나 페넬로티 영애?”
“함께하겠어요.”
‘물론 너희들은 같이 가야지.’
“팔레트 영애. 함가드리아 영애.”
“네. 저희도 힘을 보탤게요.”
“파스텔 영애?”
머뭇거리는 파스텔.
겁이 나는 것이 아니다.
힐끔힐끔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눈에 띈다. 아무래도 전투능력이 없는 페넬로티를 두고 이 셸터를 떠나기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
하지만 뭐가 중하고 뭐가 중하지 않은지는 얘도 잘 알고 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파스텔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곧바로 무도회장에 진입해 벽을 만들고, 이쪽으로 전령을 보내겠어요. 그 이후에 브러쉬 영애와 페넬로티 영애께서는 다른 영애들과 사용인들을 이끌고 저희 쪽으로 따라 들어오시면 돼요.”
“네!”
나름의 별동대가 꾸려진 것이다.
“시간이 없어요. 지금 당장.”
“네.”
“빨리 준비하세요. 파스텔 영애.”
‘그래 빨리 가. 시바. 나도 할 거 많어. 네 마음이 고맙기는 한데… 지금 복수에 미친 살인귀 새끼가 이 왕성을 배회하고 있다구. 그 새끼는 김현성 죽이겠다고 여기 왕성을 통째로 폭파시켜도 이상하지 않을 새끼라니까.’
“저… 저. 페넬로티! 나… 나 다녀… 아니… 역시 나는 그냥 여기에….”
“파스텔 영애.”
“으… 응?”
“타이가… 삐뚤어졌네요.”
“…….”
용기를 주듯이 살짝 웃어주며 그녀의 타이를 고쳐 매준다.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파스텔 영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은 당연지사. 반드시 살아 돌아오고 말겠다는 그녀의 뜨거운 의지가 느껴져 온다.
그렇게 그녀들과의 아쉬운 작별을 치른 직후, 당연히 조심스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
“…….”
“송정욱 그 새끼 어디 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