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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400화 (1,398/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400화

피의 무도회(10)

“송정욱 그 새끼 어디 있대요?”

슬쩍 고개를 돌리자 드레스를 입고 있는 하연수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온다.

방금 전에 알프스, 벨리에와 함께 셸터 안으로 들어온 일행들에게 섞이기 위해 변장이라도 한 모양.

드레스가 꽤 어울리는 모습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불편했었던 건지 인상을 찡그리거나 몸을 뒤틀고 있었다.

“현재 왕성 5층에서 적 병력과 전투 중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어요.”

‘아직은 저항 중인가 보네.’

“현성이 쪽은요?”

“김현성 님께서는 아직 4층에 체류하고 계시고요.”

“4층까지 올라갔다고요? 근데 이동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 체류하고 있고요?”

“네. 현재 4층은 피아 구분이 확실하게 되지 않은 지역이거든요. 제국, 왕국연합, 공화국, 여단원들이 계속해서 뒤엉켜 있었던 터라, 김현성 님께서는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기 전까지 안전한 지역에 있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하신 것 같아요.”

‘아… 혼자가 아니구나.’

“무도회장에서 적 병력에게 쫓긴 이후에는 자신과 제국의 인사들이 목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신 것 같아서… 곧바로 위층으로 몸을 옮기다 안전한 곳으로 미처 피신하지 못한 왕국연합의 귀족들에게 시선이 닿았는지 그들을 구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서….”

4층이 격전지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아마 여단의 소모품들 역시 그곳에 체류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여단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른 변수가 5층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해야 할 테니 말이다.

당연하게도 여단원들이 김현성을 차선이라 생각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어떤 행보를 밟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현시점에서 1기영에게 1현성은 변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소모품들을 계속 뿌리며 혼란을 초래한 이유 역시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왕국연합의 근위대나 제국의 병력들이라면 부상당하거나 고립되어 있는 귀족들을 외면하기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더 공격적으로 셸터를 넓혀도 되겠는데.’

무도회장을 먹은 이후에는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도 크게 무리가 없는 것 같은 느낌, 이 세력은 점점 커지고 있었고, 어둠이 계속해서 걷히고 있다.

아마 1기영 입장에서도 상정하지 못한 변수일 것이다. 갑작스레 영애들이 들고일어날 거라고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을까. 지금 당장은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못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이후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놈 역시 그 사실을 잘 깨닫고 있을 터였다.

이 영역을 넓히는 셸터의 존재가치는 단순히 불을 밝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이 빛은 의도적으로 혼란을 초래한 상황에 명확한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 당장은 무도회장을 중심으로 안정화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지만, 이 집단이 3층, 나아가 4층에 자리 잡았을 때를 생각해 본다면 그 파급력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영애들이 이곳에서 빛을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 녀석의 귀에도 들어갔을 테니 어쩌면 의도적으로 급하게 일을 진행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일이 꼬일 것 같으니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목표만 빠르게 달성하고 탈출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상황이 언 듯 아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비춰지기도 했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이 새끼 완전 돌아버린 상태 아니야?’

말 그대로 이 새끼가 어떤 돌발행동을 할 수 있을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 본래 잃을 게 없는 새끼들이 가장 무서운 법이 아니었던가.

현재 1기영은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상태였고, 태초의 목표였던 복수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시기였다.

영애들의 이 유의미한 발버둥이 본인의 목표에 방해가 된다고 인지한다면 무슨 일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다.

‘누가 알겠어.’

이 왕성을 통째로 날려 버리려고 할 수도 있고, 제물로 삼으려고 할 수도 있다. 벨리엘과 계약된 시기인지, 계약되지 않은 시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역병을 풀어버릴 가능성이 없다 이야기할 수도 없다.

‘잃을 게 없으니까. 무슨 일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기는 해.’

“…….”

“…….”

‘이미 진행하고 있을 확률도 높고.’

여러 가지 변수를 생각하며 곰곰이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을 때, 다시 한번 하연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정답은 뻔하자너.’

“아무래도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요. 혹시 성 주변에서 일어나고 마력반응은 파악하고 있나요?”

“그… 그건….”

“할 일이 많았을 텐데. 어쩔 수 없죠. 일단 위로 올라가죠. 중간에 창렬 씨와 희영 씨랑 합류하고, 5층으로 향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혹시 알아놓은 길이 있나요.”

“네. 4층까지는 이미 확보해 놓은 상태예요.”

‘어떻게 확보했어?’

“사용인들이 이동하던 통로인데….”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싹 다 정리했다 이거지?’

물론 떠나기 전 브러쉬 영애에게 포션을 건넨 것은 당연지사, 그녀가 기쁜 얼굴로 라이넬피아 영애에게 달려가는 사이에 드레스를 입고 앞장서는 하연수의 뒤를 따라간다.

사용인들이 이용하는 길 외에도 이런 종류의 커다란 성에는 주인도 모르는 비밀공간이 하나쯤 있게 마련, 하연수가 제법 능숙하게 벽면을 밀자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통로 하나가 시야에 비쳐왔다.

‘레인저 직군들이 이래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거자너.’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하연수는 고양이 눈이라도 가지고 있는지 복잡한 길을 잘도 빠져나간다.

“혹시 안아드려도 될까요?”

‘이런 건 사양하지 않자너.’

약간 몸을 낮추고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허리가 아파온다. 슬쩍 하연수에게 몸을 맡기자 꽤 능숙하게 이쪽을 안아 드는 모습, 생각보다 뛰어난 승차감에 탄성이 나올 정도였다.

매일매일 지혜 누나를 안거나 업고 다녔던 실력이 발휘된 것일까. 층고가 낮아 허리를 전부 다 펼 수가 없고, 오르막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코어 힘으로 안정적인 감각을 선사하고 있다.

물론 마냥 편하게 안겨 이동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았지만 말이다.

“지금부터는 걸으셔야 해요. 혹시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어서.”

비밀통로를 지나 사용인들이 다니는 통로에 닿은 것이다. 그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검은색 머리에 키가 크고 사제복을 입고 있는 남성, 처음에는 누구인가 싶었지만 그게 선희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얘도 변신한 거구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기영 님.”

“…….”

“…….”

‘본판이 좋으니까 남자가 돼도 잘생겼자너.’

평소와 다른 목소리, 하지만 분위기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는 눈앞에 있는 남자가 선희영이라는 것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어쩌다가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뻔할 뻔 자. 모르긴 몰라도 임무를 뛰고 있지 않았을까.

사실 오히려 좋다. 이곳에서의 선희영과 구별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잘생겼네요. 희영 씨.”

“감사합니다.”

“분위기 있어요.”

물론 그녀가 있는 풍경은 그런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여기를 봐도 시체, 저기를 봐도 시체, 바닥은 따뜻한 피에 젖어 축축해져 있었고 걸을 때마다 철퍽철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 하나를 완전히 점거한 것이다.

분명 하연수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사제복 곳곳에 묻어 있는 흔적을 보니 주요 원인은 선희영인 것처럼 보였다.

그녀야 엘레나처럼 단순한 사제직군이 아니라 이럴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내가 상정하고 있었던 것 보다 더 레벨이 높은 개인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진짜 포스 넘치자너.’

왠지 모르게 조금 더 차가워진 것 같은 느낌, 덩치도 살짝 있고 키도 컸던 터라 괜스레 주눅이 든다. 슬쩍 올려다보면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이 시야에 비쳐왔다.

하연수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함께 주고받는 중, 아무도 이쪽의 안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양인지 얼굴이 더없이 진지해 보인다.

“위험하시니 조금 더 붙어서 이동해 주셔야 합니다. 이기영 님.”

“이미 들어서 알고 있어요.”

“창렬 씨가 있었다면 조금 더 안전하게 호위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사온데 혹시….”

“아니요. 그쪽은 빼면 안 돼요. 사람 하나는 붙어 있어야죠. 알프스와 벨리에도 마찬가지로 영애들 쪽에 계속 붙어 있어야 하고요. 4층이 그렇게 위험한가요?”

“아무래도 전위 하나로는… 물론 하연수 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냥 올라가죠. 희영 씨도 계시니까요. 연수 씨 앞장서주시겠어요?”

“네.”

‘그래도 걱정할 정도는 아닐 거 아니야.’

물론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그녀들이 잘 알고 있을 터였지만, 알프스나 벨리에 같은 병아리들도 아니고 선희영 정도의 인선이 함께 하는데 무서운 게 있을 리가 없다.

현시점에 완전히 성장을 마친 선희영의 존재는 크랙에 가깝다. 아니, 치트키 그 자체라고 표현해도 부족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와 김현성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그녀를 감당하기 힘들지 않을까.

4층에 뭐가 있든 간에 선희영의 적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으아아아아악!”

“죽여! 죽여!”

“막아! 밀어내! 제기랄!”

“죽어라! 전부 개새끼들아!”

‘분위기 한번 살벌하자너.’

피아 구분이 어려운 전장,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도 힘듦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소규모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지역, 눈먼 검과 눈먼 화살들이 계속해서 날아다니고 있는 장소, 보이는 것이라고는 간혹 터져 나오는 마법의 잔빛밖에는 없는 공간이다.

아마 아군을 향해 칼질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거기에다가….

‘많이도 섞었네.’

착란, 광폭화, 혼란 같은 종류의 저주가 이 층에 겹겹이 쌓아져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히…히하하하하하하핫!”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가슴에 도끼가 박힌 녀석 하나가 땅바닥을 나뒹군다.

“죽여줘! 죽여! 죽여!!!”

“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하핫! 하하하하핫!”

떨어진 팔다리를 주워들고 행보하고 다니는 미친 녀석도 가까이게 있다.

마력 저항이 낮은 인간들이라면 벌써 미치고도 남았을 것 같은 공간, 장담하건대 공화국의 인원들이 원하는 그림은 이런 게 아니었을 것이다.

이건 명백히 여단의 작품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어째서 김현성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 층에서 묶여 있었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뭔가가 딸려 있다면 더욱더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그게 우리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키야….’

선희영은 조용히 목에 걸려 있는 로자리오를 잡고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주변에는 그녀가 기르는 괴물이 있다.

검을 내지르는 괴한이 “으악… 으아! 으아아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에 빨려 들어간다.

잠시 후에는 와그작와그작 생살과 뼈를 씹어 먹는 소리가 들려온다. 철퍽철퍽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뱉어낸다.

저 멀리서 활을 쏘고 있는 녀석 역시 마찬가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는 이형의 짐승에게 한입에 삼켜지고 있다.

피슉!

콰지지지직!

으직!

“아악! 아으아아악!”

“뭐야! 씨발 뭐냐고!”

“…….”

“아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뭔가가 날 물었어! 제기랄! 아악! 끌어당기지 마! 끌어당기지 말라고!”

“이게 뭐야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악!”

“뭐가 날 생으로 씹고 있다고… 살려줘… 살려달란… 아!”

눈알이 수십 개가 달린 괴물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며 놈들을 먹어치운다. 마치 슬라임 같은 모양과 질감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욱더 끈적거리고 기분 나쁘다.

“신이시여….”

액체도 고체도 아닌 그것들은 철퍽철퍽 소리를 내며 점프하듯 이동하며 이곳으로 오려고 하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사실 하연수가 나설 필요도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하연수 역시 이런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인지 괜스레 침을 삼키며 선희영을 바라보는 중.

이미 정상에 오른 모험가 중 하나인 그녀에게는 후위 직군이라 분류할 수 있는 암흑사제가 기르는 괴물들이 그리 두렵게 느껴지지 않겠지만 보이는 비주얼은 또 다른 법이다.

“이들에게 안식을 내려주시옵소서.” 같은 소리를 하며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가 이상해 보일 만도 하겠지.

조금 질렸다는 표정이다. 내 해석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마치 이 길드에는 정상이 없는 게 아니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갑작스레 인상을 찡그린 것은 이제 막 5층에 진입했을 때였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심하게 훼손이 된 것 같은 시체, 아니, 단순히 훼손이 됐다고 설명하기 부족할 정도로 망가져 버린 녀석이었다.

애초 이게 인간이었던 게 맞는 건지 의심이 될 정도.

이건 정진호의 작품이 아니다. 녀석은 이런 식으로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다. 고깃덩어리에 가슴에 박혀있는 엠블럼만이 놈의 소속을 말해주고 있다.

‘캐슬락.’

저도 모르게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텅 빈 것 같은 통로가 눈에 비쳐왔지만 망원경은 시야를 계속해서 뻗어 나간다.

벽을 통과하고, 다시 한번 통과하고, 또 다시 한번 통과한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

싸우고 있는 제국의 인사들, 그들의 목에 검을 꽂아 넣고 있는 정진호.

이미 쓰러져 있는 시체들, 광소를 터뜨리고 있는 쌍둥이, 도망치고 있는 귀족들, 벽에 걸려 있는 시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노인, 웃고 있는 여자.

시야는 계속해서 길을 따라간다. 문을 뚫고, 화살과 마법으로 인해 만들어진 구멍을 뚫고, 죽어가는 기사와 뿜어져 나오는 혈액을 뚫고 순식간에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

“…….”

-오랜만이네요? 정욱 씨?

가면을 벗고 놈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1기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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