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402화 (1,400/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402화

피의 무도회(12)

-돼지 새끼… 데리고 와.

-…….

-그럼… 콜록! 그럼… 용서해 줄게.

-…….

-…….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야.’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이미 미국으로 가버린 돼지를 지금 쟤가 어떻게 데리고 와.

송정욱 역시 이쪽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이기영을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놀리기 위해 농담으로 던진 말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던진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둘 중 정답이 무엇인지, 아직까지도 정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이 새끼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 하나.

내 눈에도 녀석이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는다. 카스가노 유노와 함께 봤었던 검은색 세계의 녀석은 그나마 조금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건 그저 가면을 쓴 것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놈이 벗은 가면은 여단원들이 쓰고 있는 가면뿐만이 아니다. 이성이라는 가면을 벗어 던진 놈은 소름이 끼칠 만큼 이질적이었다.

어쩌면 자기 자신 역시 무슨 말을 던진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진심인지, 아닌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아무 소리나 지껄인 것이다.

그 소름 끼치는 눈빛 때문일까. 결국에는 고장이 나버린 송정욱이 아무 소리나 지껄이기 시작한다.

-내가… 내가 미안해. 응? 죽… 죽었구나… 네, 네 동생… 어? 그… 분이….

-…….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네, 네 동생이 죽을 줄 알았으면! 내가 그렇게 했겠어? 응?! 절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야! 나… 알잖아! 기영아! 어?

-…….

-우리 전부 잊자!

-…….

-어?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전부 다 잊어버리자! 왜! 너한테도 잘된 일일 거 아니야. 그… 그… 그 돼지 새끼 때문에 너도 힘들었었잖아. 응? 그 새끼 뒤치다꺼리하느라… 너도 고생 많이 했을 거 아니야?! 하고 싶은 것도 못 했고… 다른 길드에서 들어온 오퍼도 전부 거절했다고 들었었는데… 내 말 맞지? 응? 그렇지 않아?

-…….

-생각해 보면 너도 그 새끼 때문에 대륙 생활이 꼬인 거였다고! 처음부터 혼자였으면 더 잘풀렸을거라는 거 다른 누구보다도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 너 똑똑하잖아. 이기영 이 새끼야! 똑똑한 새끼잖아! 기영아… 기영아. 내 말 좀 들어봐. 이 대륙에서 말이다. 정 같은 건 하등 쓸모도 없어. 중요한 건 능력이랑 이기심이라고. 어?

-…….

-어? 지금부터 새 출발 하면 되는 거야. 전부 다 잊고… 응?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자각은 있는 거지? 어? 지금 이거, 제국을, 왕국연합을, 대륙을 적으로 돌리고 있다는 거. 이해하고 있는 거지?

-…….

-그렇게 하지 말고 전부 다 잊고 내 밑으로 들어와라. 내, 내가 이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부 없었던 일로 만들어줄게. 평생 그렇게 살 건 아닐 거 아니야. 평생 도망치면서 어? 범죄자 새끼들처럼 지낼 거야?! 너 야망 있는 새끼였잖아. 어?! 야망 빼면 시체인 새끼였잖아! 이기영! 너 그런 놈이었잖아! 이제 드디어 기회가 온 거라고!

-…….

-원래 성공하기 위해서는 잊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도 필요한 법이야.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돼지… 돼지 새끼는 잊어버려. 기회를 잡아.

-입 닥치는 게 좋을 겁니다. 시끄러우니까.

-어? 어? 아니. 아니면 다른 놈들한테 복수하는 거… 내가 도와줄까? 응? 정유라! 그래! 정유라한테도 복수해야지. 어? 청소가 나 혼자 동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거 너도 알잖아. 어? 아니면 명단이 필요해? 살생부라도 만들어줘?

‘이 새끼 진짜 혓바닥 한번 기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캐슬락을 구한 영웅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2회 차에서는 그렇게 영웅적인 행보를 보였던 녀석이었는데, 지금의 모습은 추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덩치값 좀 해라. 진짜. 그냥 겸허하게 받아들이라고. 아니면 최후의 저항 좀 해보든가.’

-이러지 말고! 우리 솔직해지자고! 솔직히! 그 돼지 새끼는 네 발목만 잡고 있던 짐 덩어리 새끼였다고! 제기랄! 나도 그 돼지 새끼만 아니었으면 제길! 너한테 진작 오퍼를 넣었을 거라니까! 블랙마켓에도 한자리 만들어주고! 어?! 돼지 때문에 불법적인 일은 안 한다며! 거절한 건 너였잖아! 네가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누가 방해했는지 기억 안 나? 그 무능한 새끼 때문에! 정말로 이런 기회를 날려버릴 셈이야! 오히려 잘된 거라고! 그 새끼 잘 뒈진 거라고!

‘뭐라고 지껄여도 안 흔들려요. 아저씨야.’

-정욱 씨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

-그렇지?

-근데 당신이 하나 알아야 할 게 있는데… 나는 내 걸 건드린 새끼는 절대로 용서 안 합니다. 무슨 이유가 있든, 무슨 사정이 있든 간에는 관계없다고. 내 걸 건드리면 뭐가 됐든, 누가 됐든 간에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라고.

-…….

-당신은 약속을 지켰어야 했어.

-…….

-…….

-그, 그딴 거래! 누가 관심이나 있었을 것 같아! 제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젠장! 원래 이런 일 비일비재하잖아. 너도 알잖아! 왜 말을 못 알아들어!

-너는 운이 좋은 거야. 송정욱. 이렇게 뒈지는 것도 너한테는 과분한 거라고… 너는 메시지야. 그래서 이렇게 편하게 뒈질 수 있는 거야. 그걸 다행으로 생각해.

-…….

-…….

‘저거 진짜 또라이자너.’

메시지란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메시지란다. 고작 메시지 하나 남기겠다고 왕국연합과 제국, 공화국에게 선전포고를 한 셈이었다.

그 많은 인적 소모품들과. 그 많은 희생자들이 전부 다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단다.

‘차라리 시바 캐슬락에서 하지 그랬어?’

그게 더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확실하게 더 쉬웠을 것이다. 이 정도의 인원을 왕국연합의 왕성으로 밀어 넣을 수 있을 만한 재량이 있었다면 캐슬락에서 테러를 일으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이 없다.

녀석이 이걸 해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했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심지어 그걸로 끝이 아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본인이 직접 왕성에 행차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송정욱과 이 방에 함께 있기 위한 상황을 만드는 것 또한 그렇다.

지금도 밖에서는 한참이나 격렬한 전투가 진행 중이다. 정진호는 여전히 남은 이들의 목과 가슴에 검을 꽂아 넣고 있었고, 물밀 듯이 밀려들어 오는 적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물론 녀석은 즐거워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곳에서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고립되면 결국에는 죽는다. 지금부터 탈출로를 확보하는 게 당연한 상황, 그런 상황을 눈앞에 두고 이기영은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여단의 모든 일을 뒤로하고 있었다.

이 시간을 만들기 위해, 많은 것들을 희생하며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근데 전부 다 이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란다. 비효율적이고,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놈에게는 현재 이 시간이 가장 중요하게 느껴졌다.

녀석은 조용히 송정욱을 향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가기 시작한다.

바닥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녀석은 계속해서 몸을 뒤로 움직이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벽에 가로막혀 버렸다.

흑마법이라도 사용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녀석이 선택한 것은 도끼.

‘뭔… 갑자기 도끼야…?’

누군가가 미리 준비해 준 것처럼 방 안에 놓여져 있는 도끼였다. 무슨 시바 전설의 도끼 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나무꾼이 쓸 법한 도끼다.

물론 꽤 적절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송정욱이 아무리 몸을 움직일 수가 없고, 마력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한들, 놈의 내구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근력 스탯이 낮았으니 평범한 단검으로는 놈에게 상처를 입히기 힘들다. 장검 역시 마찬가지다. 그나마 단검보다는 나았겠지만 단순히 휘두르는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도끼가 가장 적절한 무기처럼 느껴졌다. 무게 중심 때문에 쉽게 힘을 실을 수도 있고, 내려치기에는 그만큼 효율적이었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끼를 들어 올리는 폼이 어색하기 짝이 없게 느껴진다.

지금의 나보다 형편없어 보이는 근력으로 들어 올린 도끼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인다.

솔직히 말해 그리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팔을 위로 들어 올리자 자연스럽게 보이는 앙상한 팔목으로 도끼를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마 녀석이 나무꾼이었다면 누군가 대신 나무를 패주지 않을 정도로 절망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곧 나무토막이 날 입장에 선 녀석에게는 이기영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양. 녀석이 곧바로 허겁지겁 말을 꺼낸다.

-하… 하지 마. 이기영… 제기랄! 어?! 정말로 많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맞아? 정말로 이 새끼야! 제국 전체를 적으로 돌릴 생각이야! 그걸 감당할 수 있겠어!? 대륙을 적으로 돌리게 되는 거라고! 제정신이야?!

-응. 또렷해. 정욱아.

-내가… 내가 전부 다 알려줄게! 네가 궁금해하는 거! 어? 전부 다 알려줄게!

-필요 없어.

-그래. 그… 그래! 김현성도 여기에 있어! 김현성도 여기에 있다고! 너 알고 있었어?! 그 새끼도 청소에 동의한 거 알고 있었….

-…….

-…….

-알고 있어.

-왜 하필… 나야! 제기랄! 왜 하필 나부터냐고! 어?! 청소에 동의한 인간들이 한둘도 아닌데! 어! 왜 하필! 나야! 왜 하필! 제기랄!

-너.

-어… 어?

-지금 생각해 보니까. 네가… 예전에 돼지 새끼 손가락 부러뜨렸었지?

-그… 그건 그 새끼가 건방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도끼 날이 아니라 등으로 놈의 손을 내려찍는 1기영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온다.

으득! 하는 소리 먼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 개새끼… 이 개새끼야! 이기영 너 이… 새끼! 죽고싶아아아아아아아악!

‘기합 소리 한번 우렁차네.’

-돼지 새끼는 비명 소리 한 번 안 질렀었는데….

이번에는 날로 놈의 팔을 내려찍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한꺼번에 팔이 잘려나가거나 슉 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도끼날은 놈의 두꺼운 팔뚝에 반의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고통을 주기에는 충분하다.

‘잘 빠지지도 않자너.’

팔뚝에 박혀 있는 도끼가 제대로 빠지지 않는지 발로 녀석의 몸을 민 이후에 다시 한번 도끼를 내려찍는다.

퍼억!

-아아아아아아악!

-…….

퍼억!

-이기영! 이 미친 새끼야아아아악!

-…….

-정말 뒈지고 싶어! 너 이 새끼!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퍼억!

-내가… 내가 잘못했어! 어! 전부 사과할게! 응? 전부다! 내가 죽일 놈이야! 내가!

-우욱… 으윽… 하아… 하아….

퍼억!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이기영 님. 네? 이렇게 빌겠습니다. 전부… 흐으윽… 전부 제 잘못입니다. 제가 죽일 놈입니다!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개가 되라면 개가 되고 짖으라면 짖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

퍼억!

-아으아…아아악….

-…….

퍼억!

-그냥… 그냥 죽여… 그냥 죽이라고오… 그냥….

-…….

퍼억!

-작작… 작작 좀 해라.

-…….

퍼억!

-이… 이렇게 뒈질 줄은 몰랐… 는….

-…….

퍼억!

-저주… 할 거다. 너… 저주… 할 거다. 이… 악마 같은 새끼… 넌 죽어서도… 편하지… 언젠가는 너도… 나처럼….

퍼어억!

-그… 돼지 새끼…처럼….

퍼어억! 철퍽! 으직! 퍼어어어억!

-…….

-…….

-히…푸…흐….

퍼어어어어억!

-히…흐… 흐…푸…흐…푸하헤헤헤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푸흐흐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퍼어어어어어억! 철퍽! 철퍽! 으드드득!

-흐…우욱… 으… 흐흐…푸흐헤하하하하하하!

퍼어어어어어어어억!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