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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409화 (1,40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409화

피의 무도회(19)

“제기랄!”

“…….”

“…….”

그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쪽이냐 묻는다면 그를 위해서라면 거리낌 없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들은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공화국의 오호대장군, 그 2좌의 자리에 앉아 있는 이였지만 자신들이 그를 따르는 이유는 겨우 그것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의 지위나 그가 가지고 있는 위치와 권력이 진청이라는 자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이 대륙에 소환된 이후에 단 하루도 빠짐없이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는 위인이 바로 눈앞에 있다.

그는 공화국민들에게는 희망이었고, 아이콘이었으며, 우상이었다. 크고 작은 전투와 전쟁에서 승리한 전쟁영웅이었고, 내부적으로 무너져 내리던 공화국을 바꾸었다고 평가받는 이다.

언제나 고고하고, 공정하며, 진정한 명예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남자였다. 그게 바로 자신이 알고 있는 진청이라는 사내다.

전설적이라고 회고되는 발리아스 토벌전에서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었던 이를 자신은 기억하고 있다.

누구라도 당장 쓰러질 것만 같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적들을 맞이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모두가 포기하고 좌절했었던, 해치스 방어전에서 성벽 위에 앉아 적들을 내려다보며 조소를 보냈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수만의 군세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군.’이라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옷을 정리하던 그 모습은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아마 평생 동안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말 그대로, 진청이라는 자는 절대로 꺾이거나 무너지는 법이 없는 자였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그는 언제나 의연하고 오만했다. 오히려 그 오만함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 모두를 발아래 두고 비웃어 줄 것만 같은 그런 사내였다.

“…….”

“제길….”

분명 그러할진대, 그게 저 남자의 모습이었을 터인데….

‘도대체….’

저 평정을 잃은 이는 대체 어디 사는 누구란 말인가.

자신이 알고 있는 군사님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극도로 흥분한 모습이 눈에 띈다.

물론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고 있었지만 진청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는 자라면 모두가 자신의 두 눈을 비빌 것이 분명했다.

극도로 초조해 보이는 모습, 머리가 아픈 것인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관자놀이는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었다.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눈빛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자리한 것은 한 여인에 대한 걱정이었다.

‘조금 더 귀를 기울였어야 했나.’

장량, 그녀의 말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야 했을까. 군사님께서 아이나 페넬로티의 앞에서는 달라진다는 말을, 그녀가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이라는 조언을 자신이 받아들였어야 했을까.

같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모두가 걱정 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감히 자신의 의견을 전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상황이 이미 꼬이고 꼬였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더욱더 인지하고 있는 바였다. 군사님은 결국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으니 말이다.

방아쇠를 당긴 것은 자신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제3의 세력이었다. 군사님께서는 그들의 존재를 얼핏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계획에 이물질이 끼어들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물론 목표는 달성했다. 주요요인 암살에 모두 성공했고, 필요한 기밀문서도 모두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죽은 자들이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미리 확보했었던 탈출로로 가는 길이 막힌 상황, 지금 당장 움직여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계속해서 이 성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오롯이 아이나 페넬로티, 왕국연합의 저주받은 3녀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장량이 말을 걸어왔다.

“괜찮은 걸까요.”

“…….”

“앞쪽에 언데드들이 쫙 깔려 있어요. 신성력과 성수도 통하지 않는 놈들이에요. 머리가 잘려도 계속 움직이고, 수준도 높아요. 그리고… 약간의 지능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요. 보통 놈들이 아니에요. 강한 개체는 영웅 등급, 혹은 전설 등급의 끝자락에 서 있는 개체도 분명 있을 테고요.”

“길을 뚫고 있는 건가?”

“아이나 페넬로티, 그 계집애를 찾는 데 인선을 사용하고 있는데 길은 어떻게 뚫을 수 있겠어요? 병력이 부족해요. 저 역시 부정적인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왕성을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 거예요. 저희도 마찬가지고….”

“왕국연합의 생존자들 역시 마찬가지라는 거군.”

“5층에서는 내려오고 있고, 3층에서도 올라오고 있는 형국이에요. 1, 2층은 두말할 것도 없을 테고요. 지금은 잠깐 소강상태로 접어든 것 같지만 아마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죽은 자들이 이곳까지 들이닥칠 거예요.”

“…….”

“…….”

“한가롭게 그녀를 찾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지금 당장 움직여서 어떻게든 활로를 만들어야 해요.”

“군사님께서 결정하실 일이다.”

“제 말 못 들었어요? 적어도 이번 한 번은 저희가 군사님들 설득해야 한다고요. 그게 안 통한다면 강제로라도 끌고 나가야 해요! 군사님은 지금 이성적인 생각을 하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에요. 생각보다 그녀의 존재를 더욱더 크게 느끼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어차피 지금 우리가 최악의 결과를 맞이한 것이 맞다면… 우리가 먼저 나선다고 해도 딱히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거다.”

그녀의 말이 맞다면 전장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이미 죽은 자들에게 손발이 꽁꽁 묶인 상황. 지금 당장은 소강상태를 맞이해, 이쪽도, 빛을 밝히고 있는 왕국연합의 진영도 한숨 돌리고 있는 타이밍이었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지옥 같은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당장 먼저 움직인다고 한들, 돌파구를 만들어내려고 발버둥 친다고 한들 막아 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닐 터였다.

늘 그렇듯이 해답은 군사님에게 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네가 아는 걸 군사님께서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장량.”

“…….”

“분명히 무슨 생각이 있으….”

“지금 저 모습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곳에는 바깥으로 나서려고 하는 그가 있다.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은 이례적인 행동이다.

그는 팔과 다리가 아니라 머리였고,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느끼지 않는다면 직접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군사님!”

“군사…님!”

“…….”

“…….”

자신을 붙잡은 병사들의 손을 뿌리치는 모습,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채로 얼굴을 구기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지금 군사님을 말릴 수 있는 건 당신밖에 없다고요!”

‘제기랄.’

“…….”

“…….”

“제발 군사님을 설득해 주세요.”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몸을 움직였을 때였다.

저 멀리서 어둠을 비추고 있던 불빛이 흐릿해지기 시작한 것. 이윽고 한 번 꺼졌던 불빛이 다시 켜지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멍하니 불빛을 바라봤던 것도 잠시, 계속해서 깜빡이는 불빛이 눈에 보였다. 옆에서는 장량이 멍하니 그 불빛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모스부호?’

“당신이… 죽은 자들을 불러온 건가요? 아이나로부터.”

누구에게 보낸 메시지인지는 뻔할 뻔 자. 그걸 본 군사님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잠깐 함정일 수도….’

라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불빛을 위로 띄운 군사님이 보인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한시적인… 동맹을… 제의하겠어요. 아이나로부터.”

“받아… 들이겠습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 3층과 5층에서 언데드들이 밀려 들어오고 있다는 것, 이 곳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두 집단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 같은 종류의 대화가 오가고 있다.

당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다고 묻는다거나, 죽은 자를 일으키지 않는 증거를 가져오라는 표현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야 시간이 부족했으니 말이다.

놈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결국 놈들이 코앞까지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때,

“움직이겠습니다.”

군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사님. 함정일 가능성은….”

“움직이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움직인다고 이야기한다면 움직여야 한다. 세 번은 없다.

다시 한번 불빛이 꺼지고 켜진 이후 장량이 중얼거린다.

“E2, E4.”

“그건 무슨….”

“체스예요. 지금 아이나 페넬로티와 군사님께서는 체스를 두고 있어요.”

군사님이 다시 한번 불빛을 띄운다.

“전진하겠습니다.”

‘체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라 제대로 대답하기 힘들 정도,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레 기보를 외우다니 도저히 멍청한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윽고 닥쳐온 언데드들을 보고서는 두 사람이 뭘 하려고 하고 있는지, 아니, 뭘 하고 있는 것인지 대충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미…친….’

두 사람은 지금 이 4층을 체스 보드로 만든 것이 분명했다.

한 구역당 하나의 흑, 혹은 백을 부여하고, 자신들의 위치를 끊임없이 서로 교신하며 저 짐승들과 체스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4층의 면적이나 지형을 어떻게 이해하고 보드로 만들어버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의 머리에서 도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이 바보 같은 지능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그 둘이 E2, E4라는 메시지를 주고받자마자 동시에 서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이 장소를 체스 보드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괴물….’

두 개의 기물이 보드 위에 떨어진다. 그것은 룩이 되기도 하고, 나이트가 되기도 하고, 비숍이 되기도 하고, 퀸이 되기도 한다. 두 개의 기물은 서로를 보조하고, 서로를 이용하며 계속해서 전진하기도 하고 후진하기도 한다.

“정면에 적!”

“뚫어내!”

“키에에에에에에엑!”

“죽어라! 이 언데드 새끼들!”

“움직이겠습니다. G6.”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왕국연합 측에서 날아왔을 거라고 추정하는 마법들이 쏟아지자 앞에 있는 장애물들이 죽은 자들을 덮친다.

이곳에서 방금 뚫고 나간 지점에서 몇 분 후에 그들이 도착했다는 신호가 떨어진다.

심지어 서로를 볼 수 없는 이 집단은 위치를 바꾸어가며 죽은 자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꽉 막혀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고 생각했건만, 너무나도 쉬운 것처럼 느껴지는 전투에 몸을 쓰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얼마나 괴물인 거냐….’

백번 양보해 진 군사님은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 아이나 페넬로티는….

‘정말로… 그녀는….’

어째서 군사님께서 그녀에게 집착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그녀가 공화국으로 온다면… 몇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 대륙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게 되리라. 그간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과업들을 순식간에 이룰 수 있게 되리라.

‘군사님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저도 모르게 진 군사님을 바라봤을 때,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는 그가 시야에 비쳐왔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즐겁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해치스 방어전 이후로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마 장량이 봤던 것이 저런 미소였을 것이다. 언제나 무표정하고, 감정이 죽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얼굴에서 피어난 진짜 미소였다.

‘체스?’

아니야. 두 사람은 춤을 추고 있었다.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거나 메시지를 보내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빛이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마치 멋진 무대 위에 조명이 움직이는 것 같지 않은가.

깜빡거리는 조명을 무대로 삼아 이곳이 무도회장이라도 된 것처럼, 함께 손을 잡고 이 전장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

서로 몸을 붙이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고, 위치를 바꾸어가며 춤을 추고 있다. 그가 리드하기도 하고, 그녀가 리드하기도 하며, 호흡을 붙이고 손을 마주 잡고 있다.

다른 것은 그들의 족적 뒤에 남는 것이 음악이 아니라 피라는 것뿐이었다.

“…….”

“…….”

자신은 지금 피의 무도회에 한가운데에 서 있다.

“키에에에에에에엑!”

커다란 대검을 휘두르자 놈들의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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