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17화
아이나 페넬로티(8)
‘이 새끼 쩨쩨하게 시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왜 먹던 걸 가지고 가요?”
“…….”
‘이제 대꾸도 안 해주자너.’
방금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분명히 휴양지마냥 따뜻했던 것 같았는데 괜스레 이 장소가 쌀쌀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무래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는 모양, 아이나 페넬로티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칭했던 1군사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바깥을 볼 수 있는 창구도 막아버린 녀석, 물론 망원경이 있어 주변을 둘러볼 수는 있었지만 이제는 그게 의미 있는 행동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대충이나마 분위기가 정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화국의 인사들이 떠나고, 정신을 차린 왕국연합과 제국의 인사들이 소위 말하는 뒷정리를 하기 시작한다.
현장은 무척 참담하다. 생존자들과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사망자들을 확인하고, 돌아갈 채비를 마친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결국 이겨낸 거라고 환호성을 지르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시체도 건지지 못한 아이나 페넬로티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당연히 슬픈 표정으로 이 장소를 떠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페넬로티 영애는… 어떻게 된 겁니까?
-확실히 확인하기는 힘듭니다만… 흔적이 완벽하게 사라졌습니다. 아마 그 악마를 역소환하는 과정에서 육체가 소멸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
-…….
-왕국연합이 영웅을 잃어버렸군요.
따위의 대사들도 튀어나온다. 영애들 역시 멍하니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상황, 외부에서 온 지원 병력들이 당도한 것은 딱 그때 즈음이었다.
생존자들은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본격적인 뒷정리가 시작되면서 차츰차츰 상황이 마무리되고 있다.
파스텔 영애도, 페인트 영애도, 팔레트 영애와 브러쉬 영애도, 모두가 왕성을 떠나고 있다.
‘쟤가 정신을 차려주면 참 좋을 텐데.’
뒷정리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해 줬으면 했지만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던 페인트 영애에게 그런 기력이 남아 있을 리 만무, 오늘만 날이 아니었으니 아마 다음에도 기회가 있지 않을까.
근처에 캠프를 하나 마련하거나, 숙소에 자리를 잡고 모두와 함께 조사와 증언을 할 가능성이 높을 테니까.
왕국연합과 제국의 입장에서는 이 일을 결코 좌시할 수 없을 테고, 누가 됐든 간에 면밀한 조사를 피할 수는 없을 거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끝나기 전에 정신을 차린다면 그녀가 어느 정도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지.
그 와중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김현성이 눈에 띄었다. 휴식이 절실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놈은 지원 병력들과 함께 부상자들의 구출에 열을 올리는 중. 종종 윗대가리처럼 보이는 놈이 찾아오면 심각한 얼굴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다.
당연히 놈이 송정욱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는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국을 구한 17인의 영웅.]
정진호가 걸작이라 표현했던 작품 아닌, 작품이었다.
‘징그럽기는 하자너.’
그걸 본 김현성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너무나 그로테스크한 장면이기 때문이 아니다. 아마 녀석 역시 찔리는 것이 있는 거겠지.
-김현성 백작님. 혹시 이분의 신원을 확인하실 수 있겠습니까?
-…….
-김현성 백작님?
-…….
-…….
아마 김현성이 처음으로 1기영의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일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진 군사를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님! 빨리 와 봐요. 여기 중요한 장면이에요! 김현성이 제국을 구한 17인의 영웅들을 봤어요.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별 반응은 없고요.”
“네놈 혼자 봐라.”
“아니. 아까 그건 다 끝났다니까요. 1군사 지네 집 갔어요. 아무 말 없이 이동하는 중이라 별다른 사건도 안 터질 것 같고… 추격대가 붙기는 한 것 같은데 잘 따돌리고 있네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아니, 그래도 이건 봐야죠.”
‘이 새끼 관심 없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군사님도 대충 알고 있죠? 청소사건이요. 얘 이거 눈치챈 것 같은데요?”
아니나 다를까 멍하니 있던 김현성이 말을 이어온다. 시신을 알아보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한 인물을 특정하고 있었다.
-아마 작은바위의 송정욱일 겁니다.
-송정욱 님이라면… 혹시 이번 사건과 어떤 연관성이… 이들은 단순히 양국의 동맹을 방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
-죄송합니다.
이윽고 자리를 피하며 말끝을 흐리는 녀석,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다. 모든 것이 명확해지기 전에는 일단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 정답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실 제국에서는 청소사건이 있었고 그걸 동의한 17명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미친놈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라고 말하기도 어려웠을 테니 말이다. 일단은 제국에 알리는 것이 먼저다.
진 군사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회피하고 싶은 모양이군.”
“회피요? 그냥 멘탈 나간 것처럼 보이는데?”
“그 말이 그 말이다. 뭐 놈의 판단이 틀렸다고는 볼 수 없지만… 예상대로군. 너무 읽기 쉬운 느낌이라 하품이 다 나올 정도야.”
“그럼 저 자리에서 뭐라고 말해요?”
“내가 말하지 않았나. 놈이 틀린 행동을 한 건 아니라고 말이다. 단지 저 녀석이 참 형편없다고 느껴졌을 뿐이다. 저러고도 대륙의 영웅이라니, 애초에 네 녀석이 왜 김현성을 선택한 건지도 의문이 들 정도야. 의지박약에, 쓸데없는 이상론에, 머리는 꽃밭이고, 그나마 쓸 만한 건 몸 쓰는 것 정도밖에 없는 놈이지.”
‘이 새끼 안 보는 척하다가 왜 갑자기 현성이 욕하고 난리야?’
“녀석이 무슨 생각이 있어서 저 자리에서 침묵하는 걸 고수한 게 아니다. 제국에 먼저 알려야 한다거나, 이후 양국동맹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냥 저걸 마주하는 게 싫을 뿐이겠지. 방금 전까지 모두 다 함께 답을 찾아내자고 했던 녀석치고는 행동이 너무 옹졸해 보이지 않나? 녀석은 일관성이라는 게 없어. 신념이라는 게 없다 이 말이다. 명예가 뭔지도 모르는 녀석이지.”
“…….”
“겉으로는 대의를 위하는 척, 모두를 위하는 길을 따라가는 척하기는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놈의 이상일 뿐이다. 이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놈들을 꽤 많이 봐왔지만 김현성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지. 놈은 언제나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도망치는 것을 선택한다. 회피하는 성향이 너무 강해. 차라리 그 쥐꼬리만 한 정의감이 없었더라면 더 나았을 거다. 이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타인을 속이고 끌어들인 이후에… 정작 중요한 장소에서 나자빠지니 말이다. 생각하고 있는 것에 비해 그릇이 너무 작아.”
“뭔 소리래. 아까 변신한 군사님 앞에서 칼 빼 드는 거 못 봤어요? 다른 사람들 다 포기하고 있을 때? 시바 영웅적이었잖아요.”
“싸우는 걸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야. 이를테면 트롤리 딜레마를 생각해 보지. 놈은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지 못할 거다.”
“…….”
“한 명을 살려야 되는지, 다수를 살릴지도 선택하지 못할 거라는 거다. 레버를 당기지 않는 걸 골라 방관하는 선택지에 발을 디딜 거라는 표현이 아니야. 아마 놈은 레버에 손을 대지도 못하고, 고민할 새도 없이 도망쳐 버릴 거다. 이를테면 방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지. 너였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나? 공화국의 병사들이 그냥 도망치도록 내버려 뒀을까?”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죠.”
“단언하건대 김현성이 놈들을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전부 죽일 수 있었을 터, 물론 같은 장소에 있었던 이들에 대한 안전은 보장하지 못했겠지만 최소한 전쟁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게다가 나는 김현성이 딱히 이 장소에 있는 이들의 안전 때문에 검을 내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냥 선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
“테러가 일어났었던 직후도 마찬가지야. 놈은 너희들처럼 이곳을 밝히지도 못했고, 이곳에 있는 이들을 집결시키지도 못했지. 김현성이 정말 능력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나? 놈은 그냥 책임지기 싫을 뿐이다. 녀석은 영웅 같은 게 아니야. 너무나도 지루해서 하품이 나올 정도로 평범한 인간이지. 책임지기 싫어하고, 도망치는 것을 좋아하고, 남들에게 잘 휩쓸리는 그저 그런 인간. 재미없는 놈이란 말이다. 김현성이라는 놈은….”
“…….”
“물론 그 평범함과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 네 마음에 들었다고 말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만….”
‘이 새끼 딜 오지게 박네. 진짜.’
물론 틀린 말이라고는 볼 수 없다.
‘나약한 건 사실이자너. 보통 나약한 게 아니자너.’
모두 동의하기에는 살짝 어렵기는 했지만 말이다.
녀석은 청소사건 때 직접 레버를 당긴 전적이 있다. 아직까지 정확히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됐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놈이 청소에 동의하는 레버를 당겼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단순히 휩쓸렸다거나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진 군사는 김현성을 이런 인간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렸지만 사실 인간이라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법이 아니겠는가.
놈 역시 그걸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회귀자라는 것을 고백한 것만 봐도 의외의 부분에서는 강단이 있는 면모를 보여준다.
둠기영 당시 모든 것을 제쳐두고, 연방을 포기하면서까지 기영이를 구하러 무지성 텔레포트를 선택한 것만 봐도 할 땐 하는 녀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피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건 맞아.’
1회 차 때 매일같이 뒤통수를 맞아 그런 성향이 생겼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녀석이 원래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안다.
“…….”
“…….”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잘 감상하고 있었던 드라마에 훼방을 놓은 놈이 아니꼽기는 마찬가지, 간만에 주인공에게 몰입하고 있었는데, 이를 악물고 주인공을 저격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떤 악의적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새끼가 뭘 몰라. 원래 영웅의 자격 중에 하나가 많이 흔들리는 거라자너… 그게 정석이라고….’
“…….”
‘현성이 괜히 우울해졌자너.’
진군사의 비난이 들려왔던 것일까. 현장에서 멀리 벗어난 채로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생각이 꽤 많아진 것 같은 얼굴, 표정이 워낙에 복잡했던 터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기도 힘들다.
“대충 마무리된 거겠죠?”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냐. 이기영.”
“아니, 현성이도 현성인데, 흑장미 살롱 영애들 일도 신경 쓰이고… 1군사님도 신경 쓰이고… 아무래도 한 번 더 확실하게 마무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요. 지혜 누나나 로노베라도 있으면 꿈속에 들어가서 명대사 한번 갈겨주고 나올 텐데… 후우… 얼추 전부 다 마무리한 것 같은데 이번 게이트는 조금 찜찜하기는 하네요. 정 안되면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는 컨셉으로 다시….”
“웃기지 마라. 곧바로 돌아갈 테니까.”
“아니, 누가 안 돌아간대요? 그냥 찜찜하다 이거죠. 그리고 여기 너무 답답해요. 아까 진 군사님이 잘 먹고 있던 마파두부도 뺏어가서 배고프고. 이거 적당한 위치에서 못 내려요?”
“그게 가능하면 곧바로 네놈을 어딘가로 뱉어냈을 거다.”
“그럼… 여기 계속 있어야 한다고요?”
“…….”
“지금 여기 왕성 뒷정리 끝나려면 일주일은 훨씬 넘게 걸릴 것 같은데. 그때까지 이곳에 있어야 된다고요?”
“그 정도까지는 걸리지 않을 거다. 적당한 시점에 기회가 오겠지.”
“아니, 시바 여기서 며칠을 어떻게 버텨요! 시바! 생각은 하고 움직여야지!”
“나라고 네놈과 같이 있고 싶을 것 같나?! 제기랄!”
“어? 어? 지금 사람 없는 것 같은데!”
녀석의 눈이 커다랗게 변한 것은 바로 그때, 이를 악물고 주문을 외우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온 것은 당연지사.
곧바로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뭐예요. 빨리 주문 안 외워요?”
“기다려라. 그렇게 간단한 주문이 아니니까.”
“아니, 시바. 너 지금 뭐 하세요? 뭘 그렇게 꾸물거리세요?”
“제길….”
“아 빨리 주문 외우라고!”
“좀 입 닥쳐라! 이기영! 제기랄!”
“아 빨리!”
“지금 하고 있는 도중이란 말이다! 제발 입 좀 다물라고 이야기했다!”
“아니! 시바! 누구 온다! 누구 온다!”
“제길!”
인상을 찡그리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녀석답지 않은 초조한 얼굴과 표정,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이쪽의 눈치를 보는 것까지, 당연히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
“…….”
들려오는 것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오류가… 오류가… 생긴 것 같군.”
“…….”
“…….”
오류를 해결하지 않으면 탈출할 수 없는 방에 갇혀 버리고 만 것이다.
“너… 미친 새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