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26화
대륙전쟁(6)
현대인들이 넘어와 생활하고 있는 만큼 대륙에도 서브컬쳐를 향유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아직까지도 컬트적인 인기를 자랑하고 있는 천재검사와 연금술사가 사랑하는 법.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던 시기 속에서 쓰인 소설이었던 만큼 이런 종류의 문화산업이 발전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할 만큼 엄청난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즐길 수 있는 컨텐츠가 부족한 대륙이었던 만큼 시기나 시국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에서나 어떤 환경에서나 문화생활이나 덕질을 즐기고 싶어 하는 이들은 존재했다.
물론 1회차는 2회차 대륙만큼 풍족한 문화생활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2회차의 경우에는 천재검사와 연금술사가 사랑하는 법이 그 증폭제가 되기도 했고, 그 가능성을 발견한 대륙 고위직들의 전폭적인 투자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안정적인 환경에서부터 말이다. 하지만 1회차에서도 이런 즐길 거리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애초에 AKA 천연사가 등장한 이전에도 창작 컨텐츠로 밥벌이하는 이들은 있었으니까.
당연히 시장의 규모는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
실리아에서 소환된 일본인이 라이트 노벨 같은 걸 출간했다더라, 누군가 만화를 그리고 있다더라, 어디어디에서 현대를 배경으로 연극을 한다더라 같은 소문들이 알음알음 퍼지고, 문화생활을 즐기고 싶어 하는 이들이 투자하거나 찾는 방식이었다.
투자자나 소비자들 중에서는 이름만 알면 다 아는 모험가들도 있고, 어딘가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권력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명맥이 살아 있다고만 알고 있었다.
‘끈질겼자너.’
서서히 시장이 커지기 시작했을 때 천연사가 대륙을 강타한 2회 차 와는 달리 1회 차는 시장이 커질 새도 없이 죽어버린 쪽,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게 당연하다.
던만추는 시장이 완전히 죽어버리기 전에 소비자들 사이에서 은은한 인기를 끌고 있는 소설이었다. 배고파 허덕이고 있었을 녀석에게는 한 가닥 삶의 희망과도 같은 작품이었을 것이 당연했다.
물론 읽어보지는 않았다.
그냥 이런 게 있었다고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었지만 사실 내가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에 대한 여부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어차피 말은 이 새끼가 전부 다 해줄 테니까. 나는 고개만 끄덕이면 된다.
“와! 너도 알고 있었구나! 어떻게 공화국에서 던만추를 읽을 수 있었던 거야? 내가 알기로는 실리아로 소환되신 작가님께서 연재하시던 작품인데.”
“그거야.”
“하기사 뭐 암시장에서 조금씩 팔려나가기야 했겠지. 그만큼 대단한 작품이었으니까. 아직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내가 장담하는데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분명히 히트를 쳤을걸. 내가 괜히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왜. 이 대륙에 있는 소설들은 조금… 심심하잖아. 뭐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
“거기에다가, 만화도 없고, 애니메이션도 없고, 게임도 없고… 그런 배경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게 바로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게 당연하다. 라고…. 지구에서 읽던 그 감성 그대로 대륙에 옮겨온 거니까. 아마 이건 지구에서도 1,000만 부 이상 나가지 않았을까 싶기는 해. 넌 잘 모르겠지만 1,000만 부라는 건 꽤 대단한 거라고. 그래서 몇 권까지 읽었어?”
“저는 1권밖에….”
“뭐?!”
“공화국에서는 딱 거기까지밖에 구할 수가 없었다고요.”
“1권이라면 뭐야… 펠 크라머가 피아 발렌타인과 처음 만나는 부분이구나.”
‘펠 크라머는 뭔데. 피아 발렌타인은 또 뭐고.’
하지만 흐름상 주인공과 히로인이 분명할 것이다. 당연히 여기서는 호응해 주는 것이 옳다.
“저 펠 크라머 진짜 좋아해요!”
“그렇지. 멋있지? 나도 펠 크라머 진짜 좋아하거든. 내 최애야. 사실은 3권부터 그 진가가 드러나는 데 말이야. 1권부터 진짜 멋있지. 게다가 캐릭터들이 입체적이잖아. 던만추는 뭐랄까. 여타 등장한 다른 소설들과는 다르게 조금 철.학.적.이라고 해야 하나.”
‘제발 그만 좀 해. 이 새끼야.’
“선과 악은 무엇인지, 진정한 정의는 어디에 있는지를 표현해 주고 싶어 하는 게 보여. 작가의 의도가 곳곳에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니까. 아무래도 본인이 짧게나마 모험가 생활을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묘사도 생생하고….”
‘개뿔도 그러겠자너.’
“아. 그렇죠.”
“특히나 펠이 울부짖는 장면은 백미 중의 백미지. 스포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말해준다면… 다른 히로인들도 많이 나와, 네가 상상도 하지 못할 커플링들도 많이 나오고… 그냥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로 상상도 하지 못할걸. 애니메이션으로 나왔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말이야. 여기서는 그런 게 불가능하니까.”
“…….”
“하아…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은데 스포가 될까 봐 말을 조심하게 되네. 아! 나는 사인본도 가지고 있어. 여기. 우리 집에는 일러스트 작가님들이 직접 그런 일러스트도 있고….”
화들짝 기영이!
“정말요!?”
“왜. 부러워? 부럽지?”
“당연히 부럽죠!”
“이 정도는 보통이라고… 우리 형제, 자매들은 말이야. 현지 음유시인들을 발굴해서 그럴듯한 낭송회도 열었었다니까. 굉장했었지. 그때는 광기의 축제였었는데… 아! 부끄럽지만 나도 그림을 조금 그릴 줄 알아서. 물론 금손님들에 비하면 조금 부족하지만 말이야. 잠깐만 기다려 봐.”
이윽고 신나게 걸어가면서 종이에 뭔가를 끄적이는 녀석이 시야에 비쳐왔다. 놈이 손을 놓아버린 덕분에 놈이 손으로 들고 있었던 가방이 한순간 무거워지기는 했지만 곧바로 끼어든 창렬이 때문에 다시금 가벼운 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오늘은 조금 컨디션이 안 좋네… 걸어가면서 그리니까 더 이상해.”
“…….”
“이것 봐!”
“발렌타인이네요!”
“한눈에 알아보는구나!”
‘그냥 찍은 거자너. 상식적으로 저 그림을 어떻게 알아보겠냐고.’
단지 사람이라는 것만 판별할 수 있을 뿐이었다. 본인은 꽤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지구 놈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아무래도 그림 그리는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나 참… 대륙에 애착이 없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람들과 직접 만나 교류하기도 하고 작품인지 뭐시기도 읽고 있는 것을 보면 사회활동을 아예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화감은 있다.
‘우리 이제 찐친 아니야? 이 정도면 찐친이자너.’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이 괜스레 신경 쓰인다. 내가 소환된 사람이 아니라 대륙인이기 때문에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행군을 하고 있는 인원들 중에서는 소환자들도 많다. 녀석은 그들에게도 비슷한 눈 빛을 보내고 있었다.
친절하게 대해주고 예의를 지키고 떠들썩하게 농담도 던지고 자신에 대해 이것저것 떠벌리고 있었지만 놈의 얼굴에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
꽤 친해지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놈의 표정에 깃들어 있는 그 눈빛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좋아하는 캐릭터를 볼 때와 비슷한 얼굴이다.
김창렬이나 알프스를 보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 그걸 구분한다는 게 우습기도 했지만 이 새끼는 진유라는 인간이 아니라 캐릭터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애정의 크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애정의 종류에 대한 이야기 였다.
‘이걸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이상한 위화감을 나 자신이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휴우. 이제 좀 쉬나 보다. 무슨 여기는 행군하면서 쉬지도 않나. 사람들 쓰러지고 있는데. 참… 그것도 안 보이나 보네.”
“…….”
“진유야? 물 따라줄까? 물 좀 마실래?”
“…….”
“아. 그리고 전쟁만 끝나면 내가 던만추 빌려줄게. 그거 보고 같이 이야기하자. 나 이런 시간이 너무 그리웠거든.”
‘이 새끼… 진짜로 살아 있는 사람으로 안 보고 있는 거 아니야?’
“배고프지 않아? 내가 육포 줄까?”
‘그냥 게임 캐릭터나 서브컬쳐 속 인물로 보고 있는 거 아니야?’
“아 그러고 보니까 말이야. 그거 알아? 던만추 있잖아.”
‘이 새끼… 여기로 넘어올 때… 제대로 설명을 듣고 온 건 맞는 건가? 여기가 현실이라고… 듣고 온 게 맞는 건가?’
답은 금방 찾을 수가 있었다.
“적습이다! 제기랄! 전원 전투준비 해!”
“전투준비!”
어디에선가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왕국연합과 제국의 병력일 것이다. 매복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적들이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 아마 보급품을 노리는 게릴라 부대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의용군이나 용병들이지 않을까.
커다란 소리가 들리자마자 이쪽을 보호하려 포지션을 잡는 창렬이와 알프스, 성지훈 역시 깜짝 놀랐다는 얼굴로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성검은 없지만 뭐… 잘 봐. 사실 아직도 안 믿고 있는 거 다 알거든. 내가 왜 용사인지 보여줄게.”
높은 언덕에서 화살과 마법을 쏘고 있는 적 병력의 모습이 여기서는 제대로 확인되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공화국 병력이 재빠르게 방패를 들거나 보호마법을 펼치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기습에 완벽하게 대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아아아아아악!”
“보호마법 준비해! 빨리!”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물론 이쪽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조용히 검을 뽑아 든 성검용사가 너무나도 편하게 마법과 화살들을 쳐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은 여유로움, 녀석이 서 있는 곳 근처만 공기가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방금까지만 해도 짜증 나던 모습이 꽤 믿음직스럽게 비치는 것 같다. 통통 계속해서 검을 어깨 위로 튕기면서도, 이쪽을 돌아보며 재수 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놈은 여유롭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천재기는… 천재네.’
하나를 알면 둘을 알 수 있는 법이다. 녀석에게서는 라파엘에게 보였던 초조함이나 우악스러움이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출력이나 힘으로 밀어붙이는 가짜용사와는 격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알프스조차 놀란 눈으로 녀석을 바라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우아하자너.’
어처구니없지만 정말로 이걸로 밖에 녀석의 검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기본기에 충실했던 템플러 젠, 긴 리치를 활용하며 자신만의 패도적인 검술을 확립했던 쓰로누스, 찌르기에 중점을 두며 붉은 꽃을 그렸던 윌근본, 그 어떤 것보다 야성과 본능에 충실했었던 우효, 민첩하고 빠르며 검술 그 자체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우리 현성, 지금까지 여러 타입의 검사를 두 눈으로 봐오기는 했었지만 이런 타입의 검사는 처음이었다. 대륙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우아하다.
고상하다.
기품 있다.
무척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느리지 않다. 녀석이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화살이나 마법들이 전부 녀석을 피해가는 것처럼 보인다.
“뭐….”
그 말이 없는 김창렬조차 짧게 놀라움을 표현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계속해서 내 눈을 비비게 된다.
‘아니, 시바 개 천재잖아. 미친… 미친!’
맨 몸이었을 때는 그냥 힘만 믿고 설치는 애송이인 줄 알았는데 검을 들어 올리니 사람이 달라진다. 오히려 전혀 반대의 부류였다.
저기에 성검까지 더해진단다. 시바 어째서 차희라나 정하얀, 김현성과 비교 대상에 올랐는지 이해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라파엘로 성검용사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 자신이 지금 이걸 목도한다면 실소를 흘릴 게 분명할 것이다.
그 와중에 1차 공격으로 공화국에게 효율적인 타격을 줬다고 생각했는지 왕국연합의 게릴라 부대가 언덕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우리 지훈이가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자 밑으로 내려오던 녀석들의 목이 피 분수를 뿜으며 밑으로 떨어진다.
‘어?’
잘못 본 것이 아니다.
‘뭐야?’
뭐 저렇게 쉽게….
‘사람을 죽여?’
물론 대륙에서 오래 체류했으니 그리 이상하지도 않았지만….
‘왜 이렇게 해맑아?’
피를 뒤집어쓴 우리 지훈이의 얼굴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다. 꺼림칙한 모습을 보여줄 법도 한데 놈의 얼굴에 이질적인 것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밝게 웃고 있는 모습, 이 새끼도 예비 여단원으로 분류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고민했었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놈은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머저리도 아니다. 그냥 나와 다른 것을 보고 있는 것뿐이라고 여겨진다. 그제야 놈이 가지고 있는 이질감의 정체를 예상할 수 있었다.
놈의 동공에 이상한 빛이 서려 있다. 다시 한번 성검용사가 나와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람이 죽는 모습이… 어떻게 보이고 있는 거지?’
피가 흩뿌려지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이다.
‘너…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
“…….”
대륙의 관리자들이 이 새끼의 눈과 머리에 뭔가를 심었다.
가정이 아닌 확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