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29화
대륙전쟁(9)
녀석의 세계가 조금 넓어지는 계기였을 것이다. 그간 NPC들과 어떤 식으로 소통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별다른 접점은 없었던 것은 확실했다.
그래도 대륙을 살아가는 이상 어느 정도 부딪침은 있게 마련인데, 녀석은 그런 것도 없었던 모양.
식당이나 여관을 이용할 때도 그냥 구석에서 얌전히 밥만 처먹었던 것일까. 그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고 그 누구도 이 새끼에게 말을 걸지 않았던 것일까.
분위기를 보니 파티 플레이를 한 적조차 없어 보인다. 애초에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나이였으니 주점 같은 곳은 가지 못했을 거고… 대장간이나 잡화상점 같은 곳에서도 주인장에게 흥정을 빙자한 스몰톡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본인이 일부러 고독한 컨셉을 잡았던 것인지 아니면 타의적으로 고독해진 것인지 의문스러웠지만 왠지 모르게 후자에 무게감이 쏠리는 것은 왜일까.
‘진짜 지가 원해서 고독한 새끼는 몇 없자너.’
이 새끼의 반응만 봐도 그렇다. 별것 아닌 만남이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녀석의 텐션이 올라간 것이 눈에 보였을 정도, 혼자서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런 종류의 만남에도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병력이 멈추어버린 현 상황에서 가장 기쁜 것은 제국도 왕국연합도 아닌 바로 성검용사 성지훈. 혼자서만 보이스카우트 캠핑을 온 것마냥 미쳐 날뛰고 있었다.
“옥사나 누나가 불러! 진유!”
‘그래. 시바. 걔는 언제 또 누나가 됐니.’
병력들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게 이쪽의 계획에도 큰 호재가 된 셈이었다.
예상대로기는 했지만 역시나 이 이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주변을 한번 뒤집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 아무것도 없었던 곳에 임시병영이 지어지고 연기가 올라오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임시 병영을 설치한 지 딱 하루가 지난 시점,
‘분위기 한번 좋자너.’
말 그대로 전쟁 중이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분위기였다. 소대나 중대 단위로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배급받고 있었고, 여느 부대가 그렇듯 부식을 꽁쳐 온 녀석들은 냄비에 잡탕 스튜를 끓이고 있다.
당연히 위생은 개 에바 수준이었지만 우리 성검용사에게는 위생관념이 없었던 것인지 그 누구보다도 잡탕 스튜를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나가 스튜 끓였대! 레이디 알프스도 오세요! 이름 없는 형도!”
‘시바 내가 저거 먹으러 가자고 할 줄 알았자너. 그렇지 않아도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시바 제대로 걸렸자너.’
“저는 그냥 배급받은 걸로도 충분해요. 용사님.”
“같이 가자니까. 혹시 부끄러워서 그래? 나 참… 왜 그렇게 숫기가 없어?”
‘시바 숫기는 네가 없으시겠죠. 거기 혼자 가는 거 무서워서 괜히 같이 가자고 한 거 아니냐고.’
그래도 밥은 혼자 처먹고 올 줄 알았는데 그것마저 하지 못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햄비어 고기도 있다고 하던데? 찰리 형이 여기 오기 전에 몰래 가지고 왔는데 오늘은 새로운 친구를 사귄 특별한 날이라고 통 크게 스튜에 넣어버리더라… 내가 직접 보고 왔어. 혹시 미안해서 그런 거면 그럴 필요 없어. 양이 진짜 많다니까. 오우거가 먹어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정도야.”
“아아. 그래요?”
“감자랑 이것저것 든 것도 엄청 많아. 맛없는 배급 음식보다는 그게 훨씬 더 나을걸. 향신료들도 엄청 들어간 것 같더라니까. 맛있는 냄새 엄청 나.”
“아아아….”
“그러니까. 빨리 와. 빨리!”
‘시바. 팔 잡아 당기지 마.’
“레이디 알프스도 어서 오세요.”
“네… 네.”
“이름 없는 형도요.”
“…….”
“…….”
“…….”
“근데 말이야. 진유. 저 형이 하고 있는 복면 진짜 멋있지 않아? 나도 저런 거 하나 해볼까? 어떻게 생각해?”
‘나도 몰라 이 새끼야.’
“어둠 속에서 살다가 와서 그런지 확실히 분위기 있어 보이기는 하는 것 같아. 솔직히 좀 닮고 싶을지도… 너도 그런 거 관심 있지?”
‘관심 없어요. 도대체 그런 게 뭔데.’
이 새끼와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멀리서 자리 잡고 있던 옥사나 일행이 시야에 비쳐온다.
성검용사 녀석의 말대로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커다란 냄비와 그 밑에 있는 그럴듯한 모닥불이 눈에 띈다. 아마 저 캠프 파이어가 성검용사를 흥분하게 만든 원인이리라.
‘아니, 시바 저거 방패야?’
방패처럼 보이는 냄비 안에서 보글 보글 끓고 있는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잡탕스튜.
햄비어 고기, 배급받은 감자나 고구마 따위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빵만 제외하고는 전부 다 때려 박은 느낌이었는데 알프스는 흰둥이마냥 코를 킁킁거리는 것이 저 음식에 꽤 호의적인 것 같았다.
뭐가 됐든 간에 이 딴딴하고 타버린 빵보다는 저걸 먹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 거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김창렬 역시 마찬가지라면 마찬가지. 심지어 나 역시 괜스레 저 스튜가 동하기는 한다. 싸구려 햄비어 꼬치에 너무 절여졌기 때문일까. 아마 빅보이 놈들이 내 입맛을 조교시켜 버렸기 때문이리라.
“여기야!”
“네!”
“여기 와서 앉아. 진유.”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뭘 거창하게 초대까지나. 어제도 같이 밥 먹었잖아. 그냥 평소처럼 싸구려 음식 하나 데워놓고 안면 있는 사람들끼리 우울함 좀 털어버리자고 모인 거지 뭐. 사실 영영 기회가 안 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기회가 와버렸네. 제국 놈들한테 고맙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
“…….”
“모르긴 몰라도 한 삼일 정도는 여기에서 푹 쉴 것 같단 말이지. 그렇지 않아? 데벨?”
“글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찰리. 지금까지의 행보로 보면 얼마 못 버티고 병력을 출발시킬 것 같은데 말이야. 레인저부대가 요 근처를 쥐 잡듯이 뒤지고 있다고는 하더라. 한 번 습격을 당해서 보급품들을 잃어보니까 정신을 차린 건지 뭔지. 우리야 둘째 치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놈들이 안됐지 뭐. 거기는 밥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씁. 제길….”
데벨이라는 놈이 머리를 거세게 긁적거리며 말을 이어왔다.
“우울한 이야기는 그냥 여기까지만 하자고.”
“그래. 그래. 뭐 재미있자고 모인 건데.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일단 밥부터 먹자. 찰리가 특별히 햄비어 고기도 가득 넣어 줬으니까. 지훈아. 너도 어서 들어.”
“감사합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참… 네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별거 아니에요.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건 당연히 해야 될 일이죠.”
“하하핫. 넉살 좋네. 이걸 성격이 좋다고 해야 돼?”
“그래도 차라리 밝은 게 낫지 않아? 다른 놈들은 전부 눈이 죽어가지고 말이야. 어린 나이에 이런 전쟁터에 끌려와서 말이야. 참 우리 아들놈도 조금만 더 컸으면 여기 있을 뻔했는데. 그러고 보니 내가 우리 아들놈 보여준 적 있나?”
‘아니야. 굳이 안 보여줘도 돼. 그거 데스 플래그야.’
한 녀석이 투구의 안에 붙어 있는 그림을 한 장 꺼내서 보여주기 시작한다.
“뭐야. 훤칠한데?”
“전쟁이 끝나면 말이야. 우리 자식놈들한테 선물을 사 들고 돌아가는 게 내 꿈이야. 찰리 너는 뭐 없어?”
“나는… 뭐… 빨리 약혼자한테 돌아가는 게 소소한 바램이지.”
‘아니야. 약혼자 이야기는 절대 꺼내는 거 아니야.’
제발 그런 말 좀 집어넣으라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녀석들은 약혼자와 자식들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 와중에 옥사나는 조심스레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한다.
“원래 이때 꺼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
“우리 한 잔씩 들지?”
“뭐야! 옥사나! 이건 어디서 놨어?”
“전부 다 수가 있지.”
‘그냥 싸구려 럼주자너.’
“뭐… 뭐야 술이잖아.”
“하하핫. 뭐야. 너희도 마실 거야?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들이… 이거 생각보다 독하다고. 혹시 마셔 본 적은 있나?”
성검용사 녀석이 별것 아니라는 듯이 입을 열어왔다.
“뭐… 자주 마셨어요. 저는.”
‘이 새끼 또 허세 부리는 거 봐라.’
어리다고 무시를 받는 것이 싫은 것이 아니다. 괜스레 이쪽을 의식하고 있는 모습은 가관, 잘나가는 일진 흉내 같은 것을 내고 싶었던 모양인지, 자신이 반항아라는 것을 어필하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온다.
“진유. 너는 이런 거 마시지 마. 나는 별일을 다 겪다 보니까 이제는 술이 달게 느껴지더라고… 몸에는 안 좋고… 뭐… 딱히 좋을 것도 없지.”
‘진짜 꼴불견이자너.’
“뭐? 그럼 한 잔 마셔볼래? 원래 이런 건 어른들 있을 때 배우는 거라고.”
“어이! 괜히 주지 마! 옥사나!”
“아니, 얘는 많이 마셔봤다고 하잖아! 딱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아?”
“아니, 그래도….”
“전쟁터에 나가서 사람 죽이는 건 괜찮고? 왜 그래? 얘네는 이미 어른이라고 찰리.”
‘아니야. 너 그냥 마시지 마. 시바.’
괜히 의식해서 오버하고 그러지 마.
하지만 이미 위풍당당해지기로 마음을 먹었나 보다. 정말로 저런 게 멋있어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기어코 싸구려 밥그릇에 싸구려 럼주를 받아놓은 이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누가 봐도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성지훈을 향해 “정말로 마실 거예요?”라고 묻자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녀석이 입을 열어왔다.
“뭐… 사실 나… 조금 놀았었거든. 그, 그렇다고 너무 겁먹지는 말고… 그렇게 막 나쁘게 놀았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아… 네. 그러셨군요.”
“착한 쪽이었어.”
‘언제는 학교에서 안 좋았었다며. 시바.’
“자 그럼 건배!”
그 와중에 분위기는 좋다.
“어이! 아무나 악기 좀 켜봐.”
‘그래. 시바 파티에 음악이 빠지면 쓰나.’
아무래도 악기 같은 것들을 챙겨 올 수는 없었는지 한 명이 운을 띄우자 이윽고 모두가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밥그릇을 두들기며 노래를 부르는 꼴이 거지, 각설이 같기는 했지만 본래 이런 놈들이 부르는 노래들이 흥겹게 들리기는 한다.
럼주를 한 잔 걸친 우리 성검용사는 벌써 취기가 올라왔는지 다른 병사들과 함께 밥그릇을 두들기는 중, 심지어 노래도 따라 부르고 있었다. 음도 모르고 가사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계속해서 같은 가사들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숙달이 된 것이다.
“우리는~ 공화국의~”
‘너 공화국 사람도 아니잖아.’
게걸스럽게 스튜를 한 입에 넘긴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 알콜이 도움이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제 그 부끄러움이 많았던 소년은 온데간데없었다.
여기저기 빨빨 돌아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과 몇 마디 나누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새 안면을 익힌 사람들이 많은 모양인지 모두 다 함께 어깨 동무를 하고 있다.
알콜이 이 새끼를 용감하게 만들어준 것일까.
“푸른 초원 위에서 투쟁하는 백전의 용사!”
“헤이!”
“노래 한번 잘 부른다!! 조금 더 크게 불러봐!”
“우리는~ 공화국의~”
제대로 된 관종짓을 하다 보니 어느새 무리의 중심이 되기까지.
분명히 소대 단위로 놀고 있었는데 점점 무리가 커지기 시작하더니 무슨 축제처럼 되어버렸다. 지휘관들의 눈과 귀에도 지금의 일탈이 눈에 들어왔음이 분명, 하지만 별다른 터치가 들어오지는 않는다.
아마 그들 역시 고통을 잊고 싶은 것이 아닐까. 먼발치에서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면서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닥거리는 것을 보니 합류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성지훈 녀석은 어느새 다른 소대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옥사나와 손을 잡고 빙글빙글 병영을 돌아다니는 중.
“아저씨들 욜루 오세요!”
“거기서 뭐 해! 힘센 친구!”
“빨리요!”
‘난리네 난리여.’
“진유야! 우리 불 좀 더 키우자! 진짜로 캠프 파이어 하는 것처럼 더 키우자!”
‘아무리 그래도 그건 에바 아니야? 시바 주변 사람들은 지친 것 같자너.’
아무리 흥겨워도 한 시간 두 시간 연속으로 노래를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근데 이 새끼는 지치지도 않는지 무지성으로 모두를 선동하며 병영을 뛰어다니고 있다. 오히려 옥사나와 찰리, 데벨 같은 놈들이 녀석을 더 부담스러워하는 지경까지 와버렸다.
“누나들! 일루 와요!”
“…….”
“거기! 형들! 아! 플룸 아저씨다!”
“힘센 친구가 오늘은 기운이 좋구만! 하하하! 계속 기운이 없어 보였는데 말이야. 내 이름도 기억하고 있었구만!”
‘기운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냥 내성적이었던 거예요.’
“축제다! 진유야! 축제야!”
‘응 축제 같은 거 아니야. 그냥 전쟁터에서 잠깐 동안 스트레스 풀고 싶은 사람들이 미친 짓 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제발 이상한 춤 좀 추지 마. 꼴사나워.
여기저기에 텐트들이 올려져 있고, 커다란 모닥불은 활활 불타고, 사람들이 다 함께 스튜를 끓이고 나누어 먹고, 몰래 가져온 술을 조금씩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까.
또 하늘이 예쁘네? 별들도 막 반짝반짝거리고, 달빛도 눈이 부시고, 다른 사람들과도 어울리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어울리고, 서로 통성명을 하고,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보고, 조금 더 알아가고.
어제까지만 해도 이 사람들을 단순히 전쟁을 하러 온 병사들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공동체가 되었다.
이름을 알기 전까지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병사A였지만 지금부터는 그게 아니다.
“하하하하핫! 옥사나! 누나! 저것 봐요!”
“근데 우리 여기서 이래도 되는 거야? 지휘관들이 뭐라고 안 해?”
“아이! 몰라! 그냥 일단 노래나 불러! 이런 날이 흔해?”
“그러고 보니까 우리 꼬마 영웅한테 제대로 된 감사 표현도 못 했는데.”
한 아저씨 하나가 녀석을 목마 태우고 있었고 이제는 완전히 취해버린 녀석은 그 위에서 몸을 덩실 덩실 흔든다.
제발 녀석의 필름이 끊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버릴 정도였다. 그렇게 해야….
‘조금이라도 더 느끼지 않겠냐고.’
그래야 이 소식에 조금 더 충격 받지 않겠냐고.
“…….”
“…….”
데벨과 찰리가 정찰부대에 착출된 이후, 전투 끝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 것은, 놈이 실컷 자고 일어난 다음 날의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