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32화
대륙전쟁(12)
‘뭔 미친놈들이….’
단순 군중심리로 일어난 해프닝이라고 하기에는 상황이 이상해져 버렸다. 마치 이쪽이 각성해 버린 모양새가 된 것이다.
그래도 한 부대를 책임지는 놈들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새끼들에게는 그런 판단을 할 여유와 지성이 없었던 것 같았다.
무지성에 가까운 무릎 꿇기이다 보니 오히려 무릎을 꿇지 않은 놈들이 더 이상해져 버리는 것 같은 분위기,
한참 양보해서 기적이라면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했지만, 분명히 방금의 신성력을 보지 못한 놈들까지 대뜸 납작 엎드린다는 건 결코 정상이라고 볼 수 없었다.
아마 얼떨결에 무릎을 꿇었던 놈들은 지금쯤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있지 않을까. 슬쩍 망원경으로 바깥 상황을 바라보자 여전히 텐트 앞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아까 일어난 일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처럼 부대의 지휘관들도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히려 인파들을 통제하려고 하는 놈들의 모습도 눈에 띈다. 그 숫자는 어림잡아 몇천이 넘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지들끼리도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중, 주제야 뻔했다.
-성자님이야.
-뭐?
-성자님이 강림하셨다고.
‘무슨 개소리야 진짜.’
-내가 봤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신의 선택을 받은 사자가 분명해.
-그것 때문에 다들 이러고 있는 거야? 성자는 무슨….
-입조심 해. 네가 그걸 보지 않아서 그래.
-그래서 지금 어쩌자고 여기서 이렇게 이러고 있는 건데?
‘내 말이 시바. 뭐 어쩌자고 여기 이러고 있는 건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성자님에게 전부 뜻이 있겠지.
-아니, 이게 정상이야? 방금 전에 패전하고 돌아온 거 아니냐고. 지휘관들도 도대체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건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괜찮아? 적군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니었어?
-나도 몰라. 지금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건지. 일단은 텐트 안으로 들어가셨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뭐라도 나오겠지. 안 그래도 몇몇 놈들이 직접 텐트 안을 확인해 보겠다고 난리야. 다들 궁금하니까. 지휘관들도 총대는 메기 싫어하는 것 같고… 만약에 정말로 그가 신의 뜻을 받아 내려온 사자라고 한다면 뭔가 전할 말이 있겠지.
-옥사나는… 옥사나가 걔 옆에 있었다면서… 뭐 아는 거 없대?
-글쎄. 옥사나도 여기에 와서 만났다는 모양인데… 일단은 말을 아끼는 것 같더라고… 성자님이 용사라고 불렀던 소년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 같고….
-성자에 용사에… 이게 무슨 동화책도 아니고….
-멍청한 새끼. 저거 보여?
-뭐.
-약물 중독으로 시체처럼 걸어 다니던 새끼들 보이냐고. 네 눈에는 지금 저게 예전에 그놈들 같아?
-…….
-…….
‘아니, 쟤네들은 왜 시바 정상이 된 건데.’
분명히 인형처럼 걸어 다녔던 놈들이었는데 갑작스레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 단순히 빛을 쬔 것만으로 상태가 좋아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갑작스레 얼굴에 활기가 감돈다.
아무래도 저 새끼들이 가장 열렬한 신도가 되어 한 축을 담당하는 것 같았다. 지금 보니 부대도 완전히 고립되어 있지 않은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휘관들 대부분이 신성력을 뿜어댔던 현장에 있었던지라, 놈들이 알아서 상위 부대와의 연락을 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병영을 탈영하거나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난리를 보고해야겠다고 충성스러운 놈들도 없었던 상황, 애초에 가장 말단에 있는 쫄따구 놈들이 뭘 알겠는가.
쟤네들을 그냥 파도가 이리 치면 이리 휩쓸리고, 저리 치면 저리 휩쓸리는 애들이다.
부대 꼴이 이상하니 일단은 이곳을 빠져나가 상급자에게 보고를 하겠다느니, 반란의 조짐이 보인다거나 위험하다거나 하는 생각을 할 여력이 없는 놈들이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도 실천할 용기가 없다. 극히 낮은 확률로 몇 놈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마 지금은 없는 사람이지 않을까.
‘창렬이가 쳐내고 있을 게 분명하자너.’
지금 이 순간 무엇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우리 창렬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일단은 내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다른 변수를 최대한 지양하는 것이 옳은 행동이라 판단하고 있을 테지.
딱히 언질을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몇 시간 전부터 그간 눈에 띄지 않았던 놈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마 김창렬이 키웠다는 암살자들과 정보길드에서 온 놈들, 목적은 들어오거나 나가는 놈들을 전부 배제하는 것. 부대 전체를 장악하기 위한 첫 번째 작업이었다.
‘시바 생각지도 않았던 거자너.’
큰 그림을 보고 움직이려면 아무래도 공화국이든, 제국이든, 왕국연합이든 한쪽의 편에 속해 있는 것이 편하다.
이 부대가 규모가 꽤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스케일에 비교하면 한 줌이다.
정하얀처럼 광역 마법을 뿌려대는 마법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거의 대부분이 창과 활밖에 쏘지 못하는 그냥 일반인들, 냉정하게 말해 이 떨거지들은 짐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가….’
물론 완전히 독립된 부대로 활동한다는 것에 대한 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놈들의 스케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은 크나큰 장점이기는 하지만….
‘아니, 시바 일단 이 새끼가 일어나야 되는데. 언제까지 쳐 자려고.’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네.”
“성, 성자님을 뵙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비친 것은 여기까지 성지훈을 옮겨 온 옥사나 누나. 곧바로 텐트에 나갔던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 누나는 왜 또 존댓말이야?’
아까와는 다르게 굉장히 조심스러운 것 같은 표정과 몸짓이다. 마치 자신이 감히 이곳에 있어도 되겠나 싶은 얼굴이었던지라 내가 다 당황스럽다.
아무래도 바깥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여기저기에서 성자라고 추앙하고 있으니 그녀로서도 어떤 노선을 잡을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거겠지.
“왜 그러세요? 누나. 말 편하게 하세요.”
“아… 아닙니다.”
“정말로 편하게 하세요. 저… 당황스러워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심란한데… 누나까지 이러시면…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제발 편하게 해주세요.”
“…….”
“…….”
“그, 그럼 그렇게 해도 될까?”
“네. 제발요.”
“왠… 왠지 모르게 말이 편하게 나오지는 않는데… 말이야… 한번 노력해 볼게.”
“…….”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그리고 갑자기 바깥에 있는 분들은 왜 그러시는 건가요?”
“…….”
“…….”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렇죠.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국룰이죠. 알면 오히려 이상하겠죠.’
“…….”
“일단 있는 그대로만 이야기해 줄게. 내가 다시 여기로 온 것도 아마 설명이 될 거야.”
‘이미 다 알고 있기는 해.’
“아무래도 네… 네가 보여준 신성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널 성자… 그런 비슷한 걸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야.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렇고.”
“네? 저는 그런 게….”
“너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고, 또 어째서 이런 상황이 발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눈앞에서 직접 일어난 일이니까. 네가 보여준 모습은 그간 봐왔던 사제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거든, 물론 여기 있는 촌놈들은 신성력이 높은 고위 사제를 본 적도 없겠지. 나만 해도 겨우 두세 번 본 게 전부고. 하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는 법이야.”
“…….”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
“…….”
“넌 특별해.”
‘그건 나도 알자너.’
“그리고, 이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네가 특별하다는 걸 알고 있고. 그래서 내가 다시 널 찾아온 거야. 여기저기서 계속해서 성화를 부리더라고. 지금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이제 우리가 어떤 길로 가야 할지.”
“그런 거… 물어보셔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전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이곳에 계신 분들이 그런 걸 물어보신다고 해도 제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아니, 분명히 넌 알고 있어. 세상에 아무 이유 없이 벌어지는 일은 없어. 특히 이런 종류의 기적이라면 더욱더. 너무 거창하게 듣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나는 네가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이곳에 온 거라고 생각해.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달라. 너는 선택받은 종류의 사람이야. 불과 몇 시간 전에 너는 스스로를 증명한 거야. 네가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아. 이곳에 있는 이들은 벌써 너를 따르기로 결정했고, 네 목소리와 네가 제시해 준 길을 걸어가기를 원해. 그게 가시밭길이라고 해도 여기에 있는 촌놈들은 너를 따를 거라고.”
“그건….”
여기에서는 말을 줄여주는 게 옳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액션을 취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우물쭈물거리며 계속해서 대답을 회피하려고 해도 옥사나는 참을성 있게 이쪽을 계속해서 기다려 주는 중, 성검용사 녀석의 손가락이 꿈틀거리는 것은 딱 그때 즈음이었다.
‘이 새끼 일어났구나.’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대화를 듣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용사님께서… 용사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뭐라고?”
“용사님과 제가 이곳에서 만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요.”
“뭐?”
“용사님께서는 신님들에게 이쪽으로 향하라는 부탁을 받으셨대요. 신님들께서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는 않으셨지만 이곳에 가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나 봐요. 정말로 신님들이 원하는 게 용사님과 저를 만나게 하는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용사님은 굳게 믿고 계신 것처럼 보였거든요.”
“…….”
“용사님께서 말씀하시더라고요.”
“…….”
“제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뭐냐고.”
“그래서. 뭐라고 답했는데.”
“전쟁을 막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아….”
“이 전쟁이 하루라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요.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용사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나 봐요. 그럼 그렇게 하자고, 전쟁을 막아보자고 말씀해 주셨거든요.”
“잠깐, 근데… 그전에… 네 말은 지훈이가 용사라는 거야?”
“네.”
“어떻게 그걸 확신할 수 있지? 물론 지훈이는… 강하지만… 그렇다 해도 용사라고 하기에는….”
“저는 알 수 있어요. 용사님은 용사님이니까요. 용사님께서 자신이 용사님이라 말씀하셨으니까요.”
“…….”
“…….”
“믿을 수 있어요.”
여기에서는 슬쩍 녀석의 머리를 쓸어 넘기는 것이 국룰이다. 잠든 척하던 녀석이 움찔거리는 듯싶었지만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아까 제가 뭘 하고 싶냐고 물어보셨죠?”
“어….”
“다시 한번 말씀드릴게요.”
“…….”
“저는 전쟁을 막고 싶어요. 누나.”
“…….”
“이 의미 없는 희생과 고통을 끊어내고 싶어요. 이 대륙에 더 이상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누군가가 죽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찰리 형이나 데벨 형 같은 사람들이 더 이상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모두에게 행복한 일만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강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간다. 조금은 목소리를 크게 해서 말이다.
눈동자에는 신념 한 스푼, 순수 한 스푼을 투척한다.
당연하지만 희미한 빛도 뿜어내는 것이 옳다. 물론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포인트 역시 중요하다.
다시 한번.
“저는 전쟁을 막을 거예요.”
‘그래. 시바 그냥 한번 해보자. 어차피 내가 죽는 것도 아니구….’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옥사나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그녀의 눈에는 전보다 더 강한 확신이 들어서 있다.
“속여서 미안해. 성자님.”
“네? 갑자기….”
‘다 알고 있었자너.’
그녀가 품에서 조용히 작은 상자를 꺼낸다. 아마도 음성 증폭 아티팩트. 말인즉슨 바깥에 있는 촌놈들이 내 목소리를 들었다는 소리가 된다.
옥사나가 괜스레 시선을 피하며 텐트의 문을 열자 바깥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야에 비치는 것은 무릎을 꿇고 있는 녀석들, 별 감동도 없고 감흥도 없기는 했지만 싸구려 부대에 체류하는 싸구려 병사들이 금방이라도 목숨을 던질 것처럼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
심지어 옥사나 역시 자세를 고쳐 잡고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
“게비욘 가문의 장녀, 옥사나 게비욘, 제 육신과 영혼이 바스러질 때까지 성자님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뒤에 있는 놈들도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얘네들 뭐 단체 세뇌라도 당했어? 창렬이가 약이라도 먹였어? 아니, 이 누나는….’
결국에는 부대 하나를 접수할 것 같은 분위기, 한 가지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것은….
‘이거 내빼기 힘들어졌자너.’
나도, 성검용사 녀석도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웅장해지자너. 가슴이 뜨거워지자너.’
당연히 이 꼴을 보고 느끼고 있다면… 몸을 사릴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
“…….”
성지훈 녀석이 정신을 차린 이후에 가장 처음 내뱉은 말에는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우… 우리 도망가자.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는 곳을 알아. 남서쪽으로 쭉 올라가면 숲이랑 호수로 둘러싸인 버려진 마을이 있어. 사,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았고… 전쟁의 영향도 미치지 않았던 곳이야. 거기로 가자. 응? 거기로 가면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니, 이미 울먹이고 있었다.
“흐윽… 흐으으윽… 도망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