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34화
대륙전쟁(14)
‘그게 안에 있었어?’
“그 말씀은… 꺼냈다가 집어넣다가 할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응. 지금도 여기에 있을 거야. 미약하지만 조금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은 다시 꺼낼 수 없게 되어버린 거고요?”
“응….”
“…….”
“…….”
“나… 나도 이유는 모르겠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오지 않게 되어버렸지 뭐야. 정확히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건지도 잘 기억이 안 나고… 그놈들도 어째서 이런 현상이 발생한 건지 따로 이야기해 주지 않아서… 잘은 몰라. 그, 그냥 이곳으로 가라는 이야기만 전해 들은 게 전부라서… 유리엘을 다시 볼 수 있는 해답이 이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윗놈들은 그냥 성물만 내린 모양이네.’
혹여나 윗놈들의 통제를 받고 있는 물건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그건 또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마 어느 차원에서 빌려왔다거나, 아니면 오래전부터 대륙에 존재했던 서사에 신성을 부여해 만든 물건이 아닐까.
내가 김현성과 조혜진에게 내렸던 성물과는 확실히 차이점이 있다. 물론 그 물건들도 엄밀히 말하면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것들은 신의 의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전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알타누스를 비롯한 윗놈들이 놈에게 성검을 거둔 것이 아니라면 놈이 지금 성검에게 버림받은 것은 아마 성검의 자의적인 판단이라는 거다.
‘지금 보니까 엄청 고급이자너. 그냥 내리는 것만 해도 빠듯한데….’
그만큼 성검용사에게 거는 기대가 컸던 것일까. 게다가 몸속에 직접 넣어서 쓸 수 있는 방식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불했을지 재단하기 힘들다.
심지어 이 유리엘이라는 녀석은 주인도 가린단다. 에고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만약 에고가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줄 만했다.
어째서 윗놈들이 무작정 성지훈을 이쪽으로 보냈는지 다시 한번 이해할 수 있었다.
‘시바 투자한 거 전부 다 날아가게 생겼는데 수습은 해야겠다고 생각했겠지.’
추가로 녀석이 어째서 성검에게 버림받았는지도 이해도 가고 말이다. 사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사람을 그렇게 무감각하게 죽여 버렸는데 유리엘 입장에서는 시바 화가 날 만도 하지.’
의지를 가진 무기들이 흔한 건 아니었지만 본래 이런 종류의 아이템들은 다른 아이템들보다 더 예민한 법이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아예 불살을 요구하는 녀석들도 있고, 피를 보기 전까지는 다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는 놈들도 있다.
물론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다면야 무기 그 자체의 의지를 억누르며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아직 우리의 성검용사는 그 정도 수준에 도달했다고 말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아무튼 간에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녀석이 다시금 성검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이거 에고야?’
“그러고 보니… 용사님과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도 계속해서 유리엘이라고 외치셨죠.”
“응. 유리엘이 성검의 이름이거든… 아! 유리엘은 에고소드는 아니야.”
“…….”
“그래도 그냥… 조금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왠, 왠지 말을 걸어야 될 것 같아서 자주 말을 걸기도 했었거든… 유리엘은 한 번도 대답한 적이 없기는 하지만… 그냥 대화하는 듯한 기분이 느껴져서… 그래서 어느 순간 나타나지 않았을 때도 엄청 당황했었어. 내가 혹시 유리엘한테 무슨 잘못을 했나 싶었나 했다니까. 뭐… 이제는 아무 상관도 없지만….”
‘아니, 상관이 없기는 왜 없어.’
“어쩌면 유리엘도 내가 싸우는 걸 바라지 않고 있었나 봐. 그 녀석들한테 휘둘리기를 바라지 않았던 거지.”
‘지 멋대로 해석하자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지 입맛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유리엘에 대한 원망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기절하기 전만 해도 신님들에게 꼬박꼬박 존칭을 붙였던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그놈들이라거나 그 녀석들로 표현이 격하되어 있지 않은가.
그래도 뭐 복수하겠다고 설치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워낙 심성이 착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애는 착해. 멘탈이 약해서 그렇지.’
텐트 밖을 빠져나와 바깥을 걷고 있는 와중에도 의식적으로 시체들이 있었던 곳을 피하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혹시 그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인지 자꾸만 이쪽의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자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녀석이었지만 성검용사가 상상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목적지는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텐트였다.
“여기는 왜 온 거야?”
“혹시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온 거예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밖에는 없으니까요.”
“그, 그럼 전쟁을 막는 건 그만두는 거야?”
‘아니. 막을 건데? 괜히 시바 기대하지 마.’
“그건….”
“…….”
“저도… 사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물론 방금 전까지 용사님께 큰소리치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상황이 좋지는 않으니까요. 아직까지는 저희가 주체적으로 뭘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에요. 이 독립된 부대가 전부 한뜻으로 움직일지도 의문이고요.”
물론 옥사나와 김창렬이 발바닥에 땀띠가 나도록 뛰고 있기야 할 것이다. 옥사나가 공화국 고위층의 자제였다는 설정을 숨기고 있었으니 어떤 방향으로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분위기를 보면 집 나간 망나니 같은 느낌이기는 했지만 본래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
“옥사나 누나는 이대로 부대를 독립시키는 방향을 잡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겠네.”
“네. 당장 거처를 마련하는 것도 일이에요. 만약 이대로 부대 전체가 전선을 빠져나간다면 공화국에서 가만히 있지는 않겠죠.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전까지는 제멋대로 행동할 수 없어요.”
“…….”
“그리고… 만약 운이 좋아 저희가 준비가 된다고 해도… 그때까지 이 병영에 계신 분들이 저를 지지해 주실지도 모르겠고요.”
다행히 지지율은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창렬이의 정보 길드원들이 열심히 선거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병영 내의 반동분자들을 남몰래 제거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대 전체에 자신들은 성자를 따라야 한다는 여론이 여전히 활기를 띠고 있는 것이다.
내가 부상자들을 찾아간 것만으로도 이미 부대의 분위기가 어떤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성자님.”
“성자님이야. 용사님도 오셨어.”
‘지훈이 것까지 이미 작업해 놨자너.’
버선발로 이쪽을 마중 나오는 의무병의 모습은 가관, 전투에서 대패해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적지 않은 부상자들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녀석들의 모습이 성할 리 만무했다. 이곳저곳에 묻어 있는 얼룩이 저 안이 얼마나 심각한지 말해주는 듯 보인다.
“저는 성자가 아니에요. 여러분. 기적 같은 건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르고요. 그저 일손이 부족할 것 같아 여기에 왔을 뿐이에요.”
“그,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요. 저희들도 눈과 귀가 있습니다요.”
‘왜 갑자기 시바 쇤네 말투야.’
“뭔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당연히 이쪽을 만류하는 놈들의 모습이 비치기는 했지만 본래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함께 더러워져야 하는 법, 기본적인 응급처치 같은 건 당연히 할 수 있는 만큼 곧바로 붕대를 들고 의무병들과 합류하기 시작한다.
여기저기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오고, 발버둥 치는 환자들 때문에 계속해서 피가 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본 성검용사는 사색이 된 얼굴로 굳어버리기는 했지만 이 전장 위에서 핀 성자는 다르다.
“꽉 잡아주세요.”
“네.”
“아아아아아악!”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리저리 동분서주 움직이는 것은 당연지사. 지지율은 공고한 것 같았지만 상황 자체가 워낙 특수했던 탓에 방심하기 힘들다.
연저지인이라도 하고 싶었건만 아쉽게도 고름이나 종기로 고생하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역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현장이었다면 조금 더 상징성이 있었을 것 같은데… 지금은 보통 의무병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아 아쉬운 감정이 싹튼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미담을 만드는 법, 땀을 뻘뻘 흘리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시바 홍길동마냥 자리를 옮기며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옳다.
물론 환자에 대한 공감 역시 놓칠 수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꽉 잡아주며 힘내시라고, 이겨낼 수 있다고 따위의 뻔한 대사를 치면서 눈에 가득 눈물을 담는다.
‘시바 기적 한 번 더 보여줘야겠자너.’
몸에서 빛이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은 딱 치료하던 녀석의 숨이 넘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그의 죽음에 안타까움의 눈물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희미하게 퍼져 나간 빛이 그를 감싸고 보듬어 주고 있었다.
“신이시여.”
“…….”
“신이시여….”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은 덤.
“감사합니다. 성자님. 흐으윽… 감사합니다.”
“진유 너….”
물론 이곳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썩히는 건 지양해야 한다. 새로운 세력을 키우기로 결심한 이상에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옥사나와 부대의 기존 지휘관들, 김창렬이 병동으로 찾아온 것은 기계적으로 붕대를 감는 것이 지루해질 때 즈음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성자님.”
“옥사나 누나?”
“잠깐 이야기 드릴 것이 있어서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말씀 편하게….”
짧게 고개를 젓은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는 중.
물론 주제 역시 뻔할 것이다.
“저희들을 성자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기를 천명한바, 일단 부대를 완전히 독립시키는 방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이미 뜻을 함께하기로 결의한 상태이기는 하나… 뜻에 따르지 않는 이들도 있어… 이들 같은 경우에는 따로 억류하거나 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 네.”
“시간이 조금 많았으면 좋겠지만 몇 시간 후면 이 장소를 떠나야 합니다. 너무 오래 걸린다면 상위 부대에서 이상함을 느낄 수도 있고, 제국 쪽 병력들도….”
“가까이 오고 있군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리 판단하고 있습니다.”
“…….”
“…….”
“힘든 상황이네요. 당장 이동한다고 해도, 성안이 아닌 이상에야 안전하지 않을 테니까요. 식량도 점점 부족해질 테고… 그, 그런데 이걸 저한테 굳이 말씀하시는 이유가….”
“그야 저희가 성자님을 따르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벌써 충신이 몇 명이냐고.’
“…….”
“…….”
아직 이런 대접에 익숙하지 않은 순진한 성자는 괜스레 시선을 살짝 피하며 다시 입을 열고 있다.
“일, 일단 거처를 먼저 구하는 게 최우선 사항일 것 같아요. 병사들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니까요. 성 같은 곳은 아니지만 적어도 몸을 숨길 만한 장소는 되어야겠죠. 아… 약탈로 군량을 확보할 수는 없으니 안정적인 조달라인도 꼭 필요하고요. 그리고….”
“…….”
“우리 외에도… 뜻을 함께할 수 있는 자들이 있다면….”
“…….”
“…….”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비슷한 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성자님. 정보의 신뢰도가 낮기는 하지만….”
‘있었어?’
“만일 그들이 합류해 준다면 우리에게 크나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스레 옆에 있는 김창렬을 바라보게 된다. 아무리 옥사나라고 해도 이렇게 단시간 내에 저런 정보를 물어오는 건 무리일 테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창렬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곧바로 지도를 꺼내 든 옥사나가 가리킨 장소는 어처구니없게도 이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
저도 모르게 슬쩍 망원경을 켠 것은 당연지사. 아무것도 없는 폐허처럼 보여 처음에는 당황했었지만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내리자 지하에 있는 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 가장 먼저 눈에 비친 것은 벽면에 비친 글귀였다.
“성자님?”
“…….”
“…….”
[우리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싸운 411인의 영애들]
예전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했던 우리만의 이벤트 그대로. 인원은 대폭 늘어난 것 같았지만 분명히 데뷔탕트 때의 그것이었다.
빼곡히 적혀 있는 영애들의 이름. 심지어 몇몇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들이 아닌가.
당연히 그 벽면을 올려다보고 있는 인형의 이름도 기억하고 있다.
“…….”
“…….”
브러쉬 영애.
‘넌 여기에 있었구나.’
혁명, 혁명 노래를 부르더니 새로운 가치를 위해 싸우고 있었던 것일까.
무척 그녀다운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