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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435화 (1,433/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435화

대륙전쟁(15)

‘얘는… 그나마 정상인 것 같네.’

파스텔과 비교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예전에 봤었던 갈색 단발머리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매번 하고 다녔었던 머리핀도 여전하다.

그냥 예전 모습에서 조금 더 성숙해지고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할까?

물론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은 복장부터, 매번 입고 다니는 드레스 대신 평민들이나 입을 것 같은 단순한 복장을 입고 있는 중. 이미 너덜너덜해질 대로 너덜너덜해진 바지와 티셔츠였는데, 예전의 이미지 때문인지 그리 잘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해 버렸다.

물론 4년 전의 이미지와 굳이 매치를 하는 게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말이다.

달라진 것은 복장뿐만이 아니다. 데뷔탕트 때의 그 장난기 많고, 쉽게 호들갑 떨었던 소녀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녀의 눈은 한없이, 그리고 더없이 진중하고 깊다. 잠깐 그녀가 브러쉬 영애가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

더 이상 그녀는 장난으로 혁명을 울부짖는 소녀가 아니라,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 있는 철인이었다. 어쩌면 페인트 영애보다 얘가 더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정신적인 부분에서는 그녀가 더 큰 성장을 했음이 분명했다. 구태여 본인이 직접 이쪽을 만나기로 결정한 것 역시 그녀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잘 알려주는 증거였다.

‘쉽지는 않았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이쪽뿐만이 아니었는지 지휘관들 중 한 놈이 말을 이어왔다.

“대단하군요… 아무리 그래도 직접 만나러 온다고 할 줄이야… 솔직히 저희를 쉽게 믿을 수 없을 텐데 말입니다.”

“멍청하거나, 순진하거나 둘 중에 하나 아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실력에 자신이 있다든지….”

“…….”

“…….”

“그것도 아니라면… 확실한 정보망이 있다는 거겠죠.”

‘그래 아마 정보망이 있겠지. 뭐.’

슬쩍 김창렬을 바라보자 녀석이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쪽과의 만남에 고개를 끄덕였을 때부터 예상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독자적인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한 모양이다.

물론 정보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직접 행차하시는 건 또 다른 이야기,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딱 두 가지였다.

브러쉬 영애가 위험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 그리고 그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망에 꽤 커다란 신뢰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미 이곳에 몇 명은 들어와 있지 않을까.

김창렬이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렸든, 그녀가 스스로 알아냈든 간에 이쪽이 의사를 전달한 이후로 진행되는 일들이 너무나도 신속하고 스무스하다.

단지 접선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도 기다렸다는 듯이 이쪽을 환영하고 있었다.

협상 테이블에 올릴 조건들을 미처 올리기도 전에 말이다.

어처구니없게도 혼란스러워 하는 것은 아군 병영의 지휘관들, 애초에 이 새끼들은 위에서 내리는 명령만 수행하는 녀석들이다 보니 이런 상황에 면역이 없다.

사실 지휘관이라기보다는 그냥 진군사의 말을 대신 전달해 주는 대변자의 입장이었으니 뭘 기대할 수 있을까.

‘오합지졸이잖아. 이 새끼들 이거 싹 물갈이해야 되는데 쓸 놈들이 없으니까 시바 부품 교체가 안 되네.’

“혹시 함정일 가능성은 없겠습니까?”

“아마 함정 같은 건 아닐 거야. 믿을 만한 정보망이니까. 안심해도 돼. 그냥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더 저력이 있다는 거겠지. 그쪽에 몸을 의탁하려고 했던 우리한테는 오히려 잘된 일 아니겠어?”

“그쪽이 우리를 받아 준다면 말입니다. 아무래도 단체의 성격이나 방향성이 다르다 보니 괜한 경계심을 사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일단 부딪쳐 보면 알 게 되겠지.”

“그…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봐. 아주 가관이자너.’

그나마 믿을 만한 건 옥사나 하나. 당연하지만 성검용사 이 새끼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놈들은 그래도 한 마디씩 거들기라도 하는데 얘는 시바 해바라기처럼 이쪽만 바라보고 있다.

천막의 근처에서 한 병사에게 말을 전달받은 김창렬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성자님.”

“네. 그럼 손님을 맞이해야겠네요.”

살짝 몸을 일으키자 다들 몸을 일으키는 중, 성검용사도 허겁지겁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천막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시야에 비치는 것은 망원경으로 확인했던 브러쉬 영애, 수행원으로 온 녀석들이 총 7명이었는데 모두 다 기도가 심상치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쪽 병영에 있는 어중이떠중이들보다야 백배는 나은 것 같은 느낌.

물론 엑스트라들 사이에서나 여포로 빙의할 수 있을 정도지 네임드들에게 비교하면 좀 모자라게 보이기는 하다.

괜스레 긴장감이 돈 것은 당연지사.

구태여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지는 않은 것은 양측 모두 마찬가지였겠지만 물리지 않으려면 일단 짖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가지고 있는 기세들을 아낌없이 뿜어내고 있다.

성검용사는 혹시나 전투가 일어날까 흠칫 놀라기까지 한다.

“진… 진유.”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용사님.”

‘이 형편없는 새끼 진짜 쪽팔리게.’

천막 안으로 들어온 브러쉬 영애도 딱히 그들을 제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단순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아니구나. 지금 정신이 다른 데에 가 있구나.’

이쪽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이건 플러스 점수겠네.’

누가 봐도 깜짝 놀란 것 같은 얼굴, 순간적이었지만 감정을 숨기기 힘든 것처럼 보였을 정도였다.

그야 내 얼굴에서 페넬로티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테니… 저게 당연한 반응이겠지.

심지어 꽤 허둥대기까지 한다. 나야 저런 브러쉬 영애의 모습이 익숙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수행원들은 저게 익숙하지 않은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브러쉬 영애가 정신을 차린 것은 길게 이어진 침묵이 불편해질 때 즈음….

“죄송합니다.”

먼저 고개를 숙인 그녀가 다시 비즈니스 모드로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브러쉬라고 불러주시길.”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진… 진유라고 합니다.”

“…….”

“…….”

‘괜히 불편해지자너.’

그 뒤로 옥사나가 더 불편해지는 대사를 내뱉는다.

“성자님이십니다.”

‘다짜고짜 성자라고 하면 어떡해.’

“그리고 용사이신 성지훈 님이십니다.”

‘아니, 쟤는 왜 소개했어. 누가 봐도 용사처럼은 안 보이는데 그냥 겁먹은 겁쟁이자너.’

“아… 네… 그렇군요.”

‘시바… 반응 안 좋잖아.’

물론 브러쉬가 예의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더라도 다짜고짜 쟤 성자요, 용사요 라고 내뱉고 있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해도 별 무리가 없는 상황, 여기에서는 급하게 끼어들 수밖에 없다.

“누… 뉴나! 왜 그러세요.”

“…….”

“브, 브러쉬 님 누나가 한 말씀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제가 성자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딱히 그런 대접을 받고 싶어서 이 만남을 주선한 것도 아니니까요.”

“네.”

“미리 말씀드리기도 했지만 저희가 브러쉬님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건….”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게 도와 달라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네. 그 말씀 그대로예요. 저희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병영에 있는 병사들은 더 이상의 의미 없는 싸움을 지양하고자 해요. 아시다시피 규모가 작지 않은 터라 머무를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고요.”

“…….”

“부대 전체가 탈영하는 것을 도와주셨으면 한다는 게 요지예요.”

“…….”

“저희 부대는 독립적으로 활동하기를 원하지만 아쉽게도 현 상황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병사들을 일일이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고, 마냥 이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어요. 당연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도 없고요. 공화국을 물론이고, 제국에서도 딱히 환영받지는 못하겠죠.”

“…….”

“…….”

브러쉬 영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대충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역시 병력을 독립시킨다는 부분은 딱히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만약 숨을 곳이나 지낼 곳이 필요하신 거라면 잘 찾아오신 거예요. 그건 저희가 본래 하는 일이니까요.”

‘그래 너네 좋은 일 하더라.’

흑장미 살롱.

그녀가 조직한 단체의 이름.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전쟁 피해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마을을 잃은 이들에게 쉼터를 제공해주고, 탈영 병사들을 돌보는 것은 물론, 다양한 전쟁 피해자들을 위해 일하는 일종의 구호 단체였다.

물론 단순히 봉사만 하는 구호 단체라고는 부르기 힘들다. 흑장미 살롱은 소년, 소녀병을 구출하기 위해, 전쟁 포로들을 해방하기 위해, 무력충돌도 불사하는 조직이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제국의 편도, 공화국의 편도, 왕국연합의 편도 아니다. 오롯이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의 편에 서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자면 우리 부대도 그녀의 바운더리 안에 들어가 있는 셈이기야 하다. 그녀의 말처럼 규모가 클 뿐이었으니까.

이 부대 전체는 전쟁의 피해자들이었고, 공화국을 탈영하고 싶어 하고 있다. 문제가 있다면 여전히 독립적인 부대로 남아있기를 원한다는 것.

당연히 브러쉬 영애의 입장에서는 이걸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단 한 가지 저희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여러분들이 여전히 독립적인 부대를 운용하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규모가 작지 않은 게 문제가 되겠죠? 병력의 질을 따지기 전에 단순 규모만 본다면 저희 흑장미 살롱을 상회하는 규모니까요. 저희 살롱 안에서 보호받고 계시는 분들이 위협을 느끼실 거고… 제 동료들도 마찬가지 일 거예요.”

“…….”

“만약 보호받기를 원하신다면, 부대를 해체하고 따로 관리를 받으시는 수밖에는 없어요. 그게 저희 조건이고… 아쉽지만 양보는 없습….”

당연히.

여기에서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을 끊는 것이 국룰이다.

일단 다짜고짜 본론을 꺼내 버린다.

“저희는 전쟁을 막을 거예요. 브러쉬님.”

마치 페넬로티가 생각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조금 치사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비빌 언덕이 아이나 페넬로티밖에는 없다.

그녀의 말대로 완전히 독립된 부대를 이끌고 그녀의 은신처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우리의 뭘 믿고 그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물자를 내어주겠는가.

막말로 이쪽이 흑장미 살롱의 은신처로 들어간 이후에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법도 없다.

여러 가지 조건들을 걸어도 브러쉬 영애의 입장에서 절대 독립적인 부대를 살롱 안에 들일 수 없다는 거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이다.

‘당연히 감성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거자너.’

“…….”

“…….”

“네?”

“저희는 이 전쟁을 멈출 거예요. 브러쉬님.”

“그게 무슨….”

“물론 말도 안 되는 말로 느끼실 거라는 거 알아요. 저희도 아직 어떤 식으로 전쟁을 막아야 할지, 어떻게 이걸 끝낼 수 있을지 확실히 알 수 없으니까요.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일이 계획대로 진행될 거라는 보장은 전혀 없어요.”

“…….”

“하지만 저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쟁을 막을 거예요. 그게 이유예요.”

당연하지만 그 눈빛에는 한 치의 부정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순수하고 선한 캐릭터만이 가질 수 있는 시바 광기에 가까운 올곧은 눈빛을 선보여야 옳다.

절대로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는다. 투명하고 맑은 동공을 전부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브러쉬 영애를 똑바로 응시한 것은 당연지사, 오히려 그녀가 부담스러워 이쪽의 눈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마치 자석처럼 빨아 당기는 것만 같은 아이나 페넬로티의 눈빛을 무시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리고 명대사.

뜬금없지만 일단 내뱉는다.

“저희는 이 대륙에 빛을 밝힐 거예요.”

‘빛을 밝히세요!’

“지금은 어둡게 보일지는 몰라도, 분명히 빛을 밝힐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이 대륙에 빛을 밝히겠어요.”

“…….”

“여기 계신… 용사님과 그리고 제 동료, 친구들과 함께요.”

왠지 모르게 브러쉬 영애의 눈망울이 촉촉해지는 듯했다.

‘우는 건 아니지?’

“…….”

“…….”

‘너 울어?’

“…….”

“…….”

‘진짜…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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