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37화
대륙전쟁(17)
“이건… 뭐야?”
“직접 물어보세요. 용사님.”
“…….”
“…….”
‘아… 쫌 물어보는 것 정도는 혼자 하라고.’
여전히 브러쉬 영애에게 혼자 말을 걸 자신은 없었던 모양이다. 녀석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브러쉬 영애의 시선이 이쪽에게 닿는다.
은근슬쩍 발걸음을 옮긴 그녀는 성검용사와 내게 다가가 벽면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빽빽하게 적혀 있는 이름과 문구가 보이는 것보다 더 커다랗게 느껴진다.
“이 장소를 함께 만들고, 함께 싸운 제 친구들이에요. 전통이라면 전통 같은 거였거든요. 무언가를 할 때 다 같이 이름을 새기는 거요.”
“…….”
“지금은 뿔뿔이 흩어지기는 했지만 대륙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물론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난 친구들도 있고요.”
“그 말은….”
성검용사의 질문에 브러쉬 영애는 살짝 미소 짓는 얼굴로 대답을 대신한다. 당연하지만 무척 씁쓸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럼, 이 장소를 전부 브러쉬 님 같은 사람들이 만드셨다는 거… 아니, 말씀인 건가요?”
“네. 전쟁이 막 터진 직후에는 모두 숨어 있었어야 했거든요. 물론 이후에는 싸우기로 결의하고 바깥으로 나갔지만요.”
“…….”
“흑장미 살롱은 저 혼자 만든 것이 아니에요. 따지고 보면 이곳에 이름이 적혀 있는 영애들, 그리고 그 밖에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거랍니다.”
“아. 그럼 다른 분들은….”
“다들 각자의 길을 걷고 계시죠. 몇몇은 연합군의 간부나 병으로 활동하고 계시거나… 용병으로 활동하시거나… 마탑에 들어가셨거나… 심지어 공화국으로 귀화하신 분들도 있는 모양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흑장미 살롱의 위치가 발각되지 않은 이유는 모두가 이곳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겠죠. 아… 심지어 비밀리에 살롱을 지원하고 계시는 분들도 있답니다.”
‘그래. 그럴 것 같더라. 너무 낭낭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
어떤 라인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원받는 물적, 인적 자원들이 보통은 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연히 페인트 영애를 비롯한 연합의 영애들이 이 장소를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공화국으로 귀화한 영애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는 했지만 딱히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전쟁이라는 게 지속되다 보면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법이니 말이다.
왕국연합의 행태에 회의감을 느꼈을 수도 있고, 오히려 공화국이 더욱더 자신을 대접해 준다고 느꼈을 수도 있겠지.
기본적으로 공화국은 신분과 출신을 성별 따위를 가리지 않았으니 그게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거다.
뭐 선택한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공화국으로 귀화한 이들도 흑장미 살롱의 위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게 아닐까.
‘아직 끈이 있기는 한 거자너.’
“저… 그럼 여기 영애들이라는 건.”
“말 그대로 귀족 영애라는 말이에요. 지금의 저를 보면 믿기지는 않으시겠지만 저도 한때는 사교계에서 유망한 귀족 영애였거든요.”
‘거짓말은… 사교계의 사고뭉치였자너.’
오랜만에 브러쉬 영애의 얼굴에 활기가 감도는 것 같다.
“영식들이 제 모습만 보면 댄스를 신청하고 싶어서 줄을 설 정도였다니까요. 제가 춤 실력이 나쁜 편은 아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죠. 물론 제 살롱 동기들의 영향도 있었지만요. 사실 이 흑장미 살롱의 이름도,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제 동기들이 함께 썼던 살롱의 이름을 따온 거예요. 정말로 혁명적이었는데 말이에요. 저희 흑장미 살롱의 동기들이 입장하면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요.”
“…….”
물론 그것은 아주 잠깐이다.
“이제는 벌써 4년 전의 이야기네요.”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물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 성검용사의 표정은 그녀와는 정반대다.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브러쉬 영애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도회에서 춤이나 추던 귀족 영애들이 이 모든 걸 만들고 투쟁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
“정말로… 이걸….”
같은 혼잣말을 한 번 중얼거린 녀석은 신기하다는 듯이 다시 한번 브러쉬 영애를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무섭지 않으셨나요?”
“…….”
“그러니까. 이걸 했을 당시에… 다 같이 싸우기로 하셨을 때요.”
“당연히 무서웠죠. 어떻게 안 무서웠겠어요?”
“…….”
“…….”
“제 친구들은 저보다 용감하고 지혜롭고, 능력도 있었지만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얼마나 도망치고 싶었는지 몰라요. 전 마법도 낙제점이고, 교양검술도 하나도 할 줄 몰랐어요. 남들처럼 똑똑하지도 않고… 그냥 저택에서 책이나 읽으면서 시간을 때우는 게 낙이었던… 조금… 멍청하고 평범한 사람이었거든요.”
“…….”
“매일매일 말은 많았었죠. 세상을 바꿀 거라고, 언젠가 그럴 기회가 온다면 꼭 내 능력을 모두에게 보여줄 거라고. 심지어는 왕국연합, 나아가 이 대륙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당시 불온서적이라고 불렸던 책들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설치고 다녔었던 거죠.”
‘지훈이 찔리는 표정이자너.’
“남들처럼 노력도 하지 않고, 남들처럼 용감하지도 않은 제가 뭘 할 수 있었겠어요? 그 크고 작은 사건에서 제가 살아남은 이유는 겁이 많았다는 이유 하나였어요. 저는 온몸이 떨려서 움직이지도 못했는데… 제가 아는 누구는 온몸을 던지더라고요.”
“…….”
“저는 입이 굳어서 아무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는데… 제가 아는 누구는 목이 터질 때까지 소리치지 뭐예요? 저는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었는데… 제가 아는 누구는 모두를 믿어주더라고요.”
여기서는 한마디 해줄 수밖에 없다.
“그래도… 결국에는 브러쉬 님도 도망치지는 않으셨네요?”
“…….”
“…….”
이쪽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도… 함께 싸우시고, 함께 소리치시고, 함께 투쟁하신 거잖아요. 그래서 지금 이 흑장미 살롱이 있는 거고요.”
그녀가 살짝 미소 짓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네. 그렇네요.”
“…….”
“저도 조금은 성장했나 보네요.”
‘아니야. 절대 조금 성장한 게 아니야. 우리 지훈이 표정 봐.’
브러쉬 영애를 대단한 사람을 바라보듯 쳐다보고 있다. 물론 실제로도 대단한 사람이 맞기야 했지만 지금의 녀석에게는 브러쉬 영애가 조금 더 커다란 사람처럼 보일 것이 분명했다.
마치 거인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겁이 많고, 책을 읽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귀족영애가 성장하고 성장해서 영웅이 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의 녀석의 입장에서 그녀의 이야기보다 와닿는 게 어디 있을까.
브러쉬 영애와의 만남이 어쩌면 녀석에게는 두 번째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
“제가 너무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했나 보네요. 그럼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지내실 만한 곳을 안내해 드릴게요.”
“네.”
“어떻게, 방은 함께 사용하실 건가요?”
“네. 용사님이 제가 없으면 잠을 못 드시거든요.”
“그, 그런 거 말하지 마!”
“왜요. 악몽 때문에 못 잔다고 하셨잖아요. 있는 그대로 전해드린 거라고요.”
“이제는 괜찮거든.”
브러쉬 영애 앞에서 쪽을 준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괜스레 뾰로통해진 녀석, 하지만 죽어도 방을 따로 사용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방을 함께 사용하게 해준다고 하니 안심하는 듯한 모양새, 혹시라도 말을 바꿀까 불안해하는 얼굴을 보니 기가 차기는 했지만 녀석은 나름대로 필사적인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아직도 브러쉬에게 궁금한 게 있었는지 방을 소개해 주고 떠나려고 하는 그녀를 붙잡는다.
“저 브러쉬 님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네.”
“어째서 도망치지 않으셨던 건가요.”
“…….”
“…….”
“그게 의무였으니까요.”
“…….”
“귀족으로서의 의무요.”
‘진짜 교과서다. 교과서. 시바. 넌 얘한테 많이 배워야 돼.’
“의무….”
‘그래. 그렇게 혼잣말도 중얼거리면서 저 말 좀 가슴속에 품고 그렇게 해.’
느끼는 게 많은 하루였다는 것은 확실했다. 방에 도착한 이후에도 생각이 많아진 듯 좀처럼 말을 걸어오지 않았으니까.
괜스레 방 밖으로 나가 흑장미 살롱 안에 있는 이들을 보러 가기도 하고, 다시 한번 브러쉬 곁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심지어 밤이 깊은 상황에서도 좀처럼 잠에 들지도 못하고 있다. 악몽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미 한참 전에 잠꼬대를 하며 중얼중얼거려야 했을 타이밍이었는데 지금은 놈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야식 땡기는 것도 아니자너. 왜 그래. 너.’
살짝 몸을 옆으로 뉘어 녀석을 바라보며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용사님.”
“…….”
“용사님 자요?”
“…….”
“용사님?”
“아니. 아직 안 자.”
녀석도 몸을 옆으로 뉘어 이쪽을 바라본다.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오늘은 늦게 자시네요.”
“아냐. 딱히 아무것도… 그냥….”
“네.”
“생각이 많아져서. 막 뭐라고 설명을 잘 못 하겠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 잠이 안 와.”
“혹시 너무 깜깜해서 그래요? 촛불 켤까요?”
“아니이… 그런 게 아니라니까. 너무 깜깜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냥 머릿속이 복잡해.”
“대충이라도 말해보세요.”
“진짜 말을 못 하겠어. 너무 복합적이라. 왜 유리엘이 내 목소리에 응답하지 않는 걸까. 이런 것부터… 왜 하필 내가 여기에 왔을까 하는 생각들까지. 신이라는 녀석들은 왜 나를 선택한 건지… 어디까지가 거짓말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그… 그리고 내 의무는 도대체 뭔지. 왜. 브러쉬 님이 그러셨잖아. 도망치지 않았던 건 자기 의무 때문이었다고….”
“…….”
“혹시 나한테도 그런 게 있었을까? 내가 내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서 유리엘에게 내 목소리가 닿지 않고 있는 걸까?”
“…….”
“…….”
“나도….”
재빠르게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잠깐 밖으로 나갈까요?”
“어?”
“잠깐만 밖으로 나갈까요?”
서둘러 촛불을 켠 이후에 나갈 것을 재촉한다.
“지, 지금?”
“당직분들한테 이야기하면 감시하에 잠깐 나갈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는걸?”
“그러지 말고 나가요. 지금이요.”
이 새끼의 팔을 잡아 당기자 못 이기는 척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놈이 눈에 들어왔다.
“빨리요!”
“잠… 잠깐….”
“빨리요! 용사님!”
괜스레 놈의 팔을 잡고 바깥을 뛰어나가자 녀석 역시 함께 발을 맞춰 뛰어나가는 중, 살롱의 병사들을 함께 대동해야 한다는 것이 거추장스럽기는 했지만 일단은 청소년 드라마 감성을 지켜주는 것이 옳다.
본래 시바 청소년 청춘 드라마는 아무 의미 없이 뛰어다니는 게 국룰이다. 아무튼 간에 시바 걷는 것은 불법이다.
몇 시간 전에 봤었던 흑장미 살롱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 것은 당연지사.
차이점은 아주 조용했다는 것 하나였다. 대장간, 사람들이 자고 있는 움막, 생활 터전, 그리고 커다란 벽면, 왠지 모르게 습하고 덥게 느껴지는 날씨였지만 달리고 있기 때문인지 시원하게 느껴진다.
여름도 아닌데 여름이었다 감성을 펼치고 싶어진다. 이마와 머리카락에 맺힌 땀방울이 떨어진다. 녀석의 손목을 잡고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고, 작은 통로를 지나자….
“…….”
“…….”
유난히 커다란 보름달이 뜬 밤하늘이 성검용사와 나를 반겼다.
살짝 하이 된 톤으로,
“하늘 좀 보세요. 용사님.”
“…….”
“예쁘죠?”
폐허가 된 장소를 환한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저는 생각이 많아질 때면 달을 바라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