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38화
대륙전쟁(18)
‘분위기 죽이기는 하네.’
전쟁으로 인해 대미지를 입은 장소라는 것이 꽤 운치 있게 느껴진다. 4년 동안 전혀 관리받지 않은 장소였기 때문에 넝쿨들과 잡초들이 무성하다.
군데군데에는 꽃도 피어 있었고 심지어 다람쥐나 새 같은 작은 동물들도 보인다.
징그러운 벌레 놈들의 힘찬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일단 놈들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으니 분위기가 그럴듯한 것이 맞았다.
말 그대로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장소를 달빛이 비추고 있었으니 얼마나 운치가 있었는지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운이 좋게도 평소보다 커다랗고 더 밝게 느껴지는 보름달인지라 마치 빛들이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과장하지 않고 특수연출이라도 한 것 같은 느낌, 누군가가 타이밍을 노린 것 같지 않은가.
갈라진 벽돌의 틈으로, 그 사이에 피어난 꽃에, 전쟁의 흔적이 남긴 상처에, 밝은 달빛이 머물다가 사라진다.
“아….”
감수성이 민감한 나이에 있는 녀석이 짧게나마 감탄사를 터뜨렸을 정도였다.
물론 이 새끼는 이런 풍경들을 많이 봐왔을 것이다. 당장 나와 만나기 전까지는 혼자 온 대륙을 탐험하던 모험가가 아니었던가.
산이나 강, 이런 종류의 폐허나 던전에서 잠을 청하거나 휴식을 취한 게 한두 번이 아닐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어쩌면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에 이제는 이런 풍경들이 질릴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나는 조금 질리는 풍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는 중, 어째서 갑자기 태세전환을 하는지는 뻔했다.
‘이제는 진짜자너.’
그간 녀석의 눈에 보이던 것이 만들어진 그래픽 비슷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녀석에게도 이 장소가 현실처럼 느껴질 것이다.
저 꽃도, 저 달빛도, 지금 마주 보고 있는 사람도 이제는 모두 현실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놈은 지금 처음으로, 이 대륙의 진짜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하늘에 보이는 저 별과 달이 진짜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고 있다.
아 대륙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장소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쿨찐이라면 그게 뭐 어쩌라고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성검용사 성지훈은 그런 성격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 곳곳을 둘러보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예쁘지 않아요? 오늘은 특히 예쁜 것 같은데….”
“뭐… 별… 별루….”
자라다 만 나무에 털썩 주저앉은 것은 당연지사.
“이쪽으로 오세요. 용사님.”
녀석도 못 이기는 척 내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제 좀 고민이 사라지셨나요?”
“뭐… 겨… 겨우 달 좀 본다고 고민이 사라질 것 같아? 애초에 생각이 많아질 때면 달빛을 바라본다는 건 뭔데. 무슨 중2병 같은 것도 아니고. 보통 사람들은 저런 것 좀 본다고 고민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정말요? 신기하네요. 저는 이런 하늘을 바라보면 복잡한 생각들이 눈 씻겨 나가듯이 사라지거든요. 왜요. 다시 한번 보세요.”
“…….”
“…….”
“조, 조금은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씨익 한번 웃어주자.
“역시 그렇죠?”
이 새끼도 멍하니 이쪽을 바라본다. 다시 한번 입을 연 것은 당연했다. 조금은 뜬금없지만 성검용사 빌드업을 해낼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달이 뜬 밤하늘을 좋아해서 더 그런가 봐요.”
“어? 정말? 좋아해?”
“네. 정말로 좋아하거든요.”
“왜… 왜?”
“만약 달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그럼 대륙이 멸망하는 거 아니야? 갯벌도 사라지고… 기후부터 변할 거고….”
‘아 진짜! 시바! 지훈이 형!!!’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
“…….”
‘다시 분위기 잡자. 시바. 흔들리지 말자. 이 멍청한 새끼 페이스에 휘말리지 말자.’
다시 한번 진지하게 말을 잇는다. 약간의 텀을 둔 이후에 말이다.
“달은 어두운 하늘을 밝혀 주잖아요.”
“아….”
“언젠가 한 번 길을 잃은 적이 있었거든요. 어릴 때였어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말로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엄청 울었었죠. 도와달라고 외치기도 하고 살려달라고 소리치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소리친 거예요.”
“그… 그래?”
“네. 그러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조금씩 조금씩 걸었어요.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일단 걸은 거죠.”
“그렇구나.”
“그러다 어느 순간,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하지 뭐예요? 하늘을 올려다보니까 오늘처럼 커다란 달빛이 보이고 있었고요. 마치 제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안내해 주는 것처럼 느껴주는 거 있죠? 당시에는 이 길이 맞는지,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무섭거나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정말 재미있었던 건 뭔지 알아요?”
“뭔데?”
“사실은 길을 잃은 게 아니었더라고요.”
“뭐야. 그게….”
“길을 잃은 게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됐을 뿐이었어요. 구름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잠깐 동안 달이 가려진 거였겠죠.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 길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거예요.”
“…….”
“저는 지금 이 대륙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그때의 저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해요.”
“어… 어?”
“달빛이 잠깐 구름에 가려져서 모두가 길을 잃었다고 느끼고 있는 거예요. 실제로도 그렇고요. 앞이 보이지 않으니 주변 환경과 사람들에게 쉽게 휘둘리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용사님이 하고 계시는 고민도 비슷할지도 몰라요.”
“무,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
“…….”
“…….”
“저는… 저는 용사님이 그날 제게 비친 보름달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
“용사님은 지금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
“만약 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정말로 용사님께서 저와 만난 것이 운명이라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그거 하나예요. 물론 전쟁을 막는 것도 좋고, 대륙의 평화를 되찾는 것도 좋겠죠. 용사님이 말씀하신 용사님의 운명에 맞서는 것도 물론 해야 하는 일이고요. 이 대륙의 위협을 해결하러 오셨다고 하셨으니 그걸 해결해도 좋겠네요. 동화 속 이야기처럼 마왕을 토벌하는 일도 분명 하시는 거겠죠?”
“…….”
“물론 저 모든 일들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그리고 또 그 이후에 용사님께서 길 잃은 사람들을 비춰줄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녀석의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여러 가지 희망찬 말들을 쏟아내는 와중에 달빛의 비친 성검용사의 얼굴에는 자신감들이 사라져 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쉽게 입이 열리지 않는 것 같은 모습, 주저하고 주저하던 녀석이 입을 연 것은 우연치 않게 구름이 보름달이 가렸을 때였다.
“나… 나는 용사가 아닐지도 몰라.”
“네?”
“말 그대로야. 사, 사실 나는 용사가 아닐지도 몰라. 멋대로 잘난 듯이 이야기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일지도 몰라. 이제는 그놈들을 믿을 수도 없고… 그 말들을 전부 믿을 수도 없거든. 그리고 봐. 결국에는 유리엘도 나를 버렸잖아. 성검한테 버림받은 용사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냐고. 나… 나는….”
“…….”
“나는 이곳이 소설이나 만화 속에 나오는 곳인 줄 알았단 말이야.”
‘아 이 새끼 또 질질 짠다.’
“흐윽… 끄으으어엉… 그냥 전부 다 진짜가 아닌 줄 알았다고… 흐윽… 끄윽… 내가 다치게 한 사람들도, 내가 검으로 막 베어버린 사람들도 진짜가 아닌 줄 알았다고… 흐으윽… 나는 다쳐도… 유리엘이 전부 다 치료해 줬단 말이야. 아프지도 않았고… 흐으윽… 그래서 여기가 진짜가 아닌 줄 알았다구… 흐으윽… 전부 인형 같은 거인 줄 알았다고… 나는 내 망상 속에서나 용사였다고… 맨날 상상하던 일들이 일어나니까 그냥 기분이 좋아서 그래서 용사라고 설치고 다녔던 거라고….”
“용사님….”
“난… 난 원래 있던 곳에서는 진짜 별 볼 일 없었다고… 흐윽… 왕따였단 말이야. 흐으윽…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라고… 학교 가기가 무서워서 자퇴하고… 집에서 라이트 노벨이나 보면서 초능력으로 일진들 혼내주는 상상이나 했던 멍청이였는데… 내가 무슨 용사겠어? 여기가 현실이라고 깨닫자마자 겁먹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멍청이가… 무슨 용사야. 세상천지에 나 같은 놈을 용사라고 소환한 멍청이들이 있겠어? 내… 내 생각에는 속은 것 같아. 걔네들은 신이 아니라 악마고, 그 악마들이 나를 비웃고 놀리고 싶어서 속인 게 분명하다니까. 난… 난 용사 같은 거 아니야. 아닐지도 몰라… 흐으윽….”
엄청 불안해하는 녀석이 시야에 비친 것은 당연지사. 제 입으로 나 용사 아니다 선언을 하고서는 질질 짜고 계시다.
그 와중에 깜짝 놀란 놈이 보인다. 본인이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갑작스레 자신이 용사가 아님에도 내가 자신을 따라다닐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 들어차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진이라도 흔들리는 동공은 가관. 심지어 그 불안함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었다.
“나… 나 용사 아니어도 괜찮은 거지? 그, 그래도 우리 친구지?”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어?”
“용사님이 용사든 아니든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어요. 용사가 아니면 어때요? 성검에게 버림받으면 또 어때서요? 딱히 선택받은 용사가 아니어도, 용사님은 용사님이세요. 누구나 다 영웅이 될 수 있고, 용사님이 될 수 있다고요. 브러쉬 님이 하신 이야기 들으셨잖아요. 용사님이 느끼시기에는 브러쉬 님과 함께 싸우신 영애님들이 누구에게 선택받은 것처럼 보이시나요?”
“아… 아니… 그건….”
“그분들도 딱히 신이나 초월적인 존재나 성검에게 선택받은 게 아니라고요.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어요. 누구에게 선택받았는지는 아무것도 상관없다고요. 용사님이 겁이나 집어 먹고 있는 멍청이라고 하셨나요?”
“어….”
“제가 보기에는 절대로 용사님은 멍청이가 아니에요.”
‘사실 그냥 검술 빼고는 멍청이 맞기는 해.’
“남들보다 더 생각이 많고, 더 남을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따뜻하고… 또 어떤 때는 용감하고, 또 어떤 때는 멋진 사람이라고요. 딱히 용사로 선택받은 게 아니더라도 용사님은… 용사님은 보름달 같은 사람이 되실 수 있단 말이에요. 다른 사람들을, 세상을 비춰줄 수 있는 사람이 되실 수 있어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이 새끼 표정 못 숨기는 것 봐.
누군가에게 기대받는 게 처음인 것 같은 표정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선택이 필요하신 거라면 딱히 걱정하실 필요도 없어요.”
“…….”
“성자인 제가 용사님을 선택할 거니까요.”
녀석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 것은 당연했다.
“…….”
“…….”
누가 봐도 감동받았다는 얼굴이다. 아니, 그것 이상으로 뭔가 먹혔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다짐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짧은 대화의 순간에 녀석은 수많은 것을 깨달은 것처럼 느껴졌다.
달빛은 아직도 녀석을 비추고 있는 중, 심지어 명대사에 고조된 것인지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놈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마치 몸에서 달빛이 퍼지는 것처럼 보인다.
“용사님.”
“어?”
“용사님 몸이 이상한데요?”
“내가 뭐?”
“용사님… 빛나고 있잖아요.”
“우와왁! 이거 왜 이래! 어? 아니… 유리엘? 유리엘? 너야? 거, 거기서 뭐 해! 유리엘! 유리엘?”
내 눈에도 보이지 않았던 성검이 이제는 확실하게 비친다. 놈의 몸에 있는 빛들이 성검을 만들고 있다.
문제는 놈이 아무리 유리엘의 이름을 외쳐 봐도 유리엘은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
저도 모르게 녀석의 가슴 쪽에 팔을 뻗자. 갑작스레 손이 녀석에게 쑥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뭐… 뭐야? 이거? 이거… 뭐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성검이 천천히 놈의 가슴에서 뽑혀 나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녀석의 가슴에서 검을 뽑아내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놈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그냥 검이 뽑혀 나오는 과정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한 거야? 진유? 어떻게… 유리엘을 뽑아낸 거야?”
‘나도 몰라. 시바.’
그냥 뽑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뽑았어.
나 역시 머릿속이 복잡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입을 열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용사님은… 정말로… 용사님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