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40화
대륙전쟁(20)
시간은 시바 쏜살같이 흘러가지 않았다. 기본적인 수면시간의 침해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루가 무척 길게 느껴졌던 탓이다.
그마저도 보름달이 뜨면 새벽 내내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어야 하는 상황, 미친 보름달 새끼를 부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용사님… 키가 조금 컸네요.”
“아. 그런가?”
“몸도 조금 커진 것 같고요.”
“근육이 붙기는 했지? 아무래도 제대로 훈련하고 웨이트 트레이닝 까지 하는 건 처음인데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더라고. 이름 없는 형이 잘 가르쳐 주고 있어서… 웨이트는 옥사나 누나한테 배우고 있고….”
“그런데 왜 처음에는 비밀로 하시려고 했던 거예요? 어차피 다 들킬 거.”
“그, 그냥… 꼴사납잖아.”
“도대체 뭐가요? 전혀 꼴사납지 않아요. 노력하는 건 오히려 멋있다고요.”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용사 만들기 프로젝트가 계속해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약간이었지만 눈빛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 심지어 키도 조금 큰 것처럼 느껴진다.
계속되는 훈련 때문인지 몸에 근육량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런 저런 상처들도 좀 많아졌다. 전체적으로 소년에서 남자가 되고 있는 중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아직까지는 과도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털이 보송보송했던 병아리 시절은 지나갔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일주일 정도 하고 포기할 줄 알았던 것과는 반대로 두 달이 넘게 이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으니 당연히 변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변한 것은 몸뿐만이 아니다. 커진 몸만큼 사상도 커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 그나마 휴식시간이라고 할 만한 시간에도 브러쉬 영애가 가지고 온 책들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녀석의 최근 루틴이었다.
“그… 그래?”
“네.”
누군가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놈은 이 생활에 익숙해지고 적응하고 있었다.
물론 새벽에 나가 달을 보는 이벤트를 멈추지는 않았지만 앓는 소리를 하거나 홀로 밤에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어졌다. 아직도 가끔 눈물을 흘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조금 늦게 나가시네요.”
“응. 이름 없는 형이 볼일이 있다고 해서….”
“아아아.”
“또 뭐 그 여자 관련해서 볼일이 있는 것 같더라고. 생긴 거는 과묵하고 대화도 제대로 못 할 것 같은데… 그 여자랑은 잘 어울리고 있는 것 같더라. 그 여자도 이름 없는 형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역시 복면이야. 그게 멋이라고…. 나도 복면 좀 쓰고 다니면 인기 좀 많아지려나.”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아무튼 그래서 오늘은 진유 너랑 같이 나가려고 하는데… 오늘 할 일 있어?”
“왜 최근에 브러쉬 님께서 다른 분들을 살롱으로 데리고 오셨잖아요.”
“아. 그랬었지.”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많이 계신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갈까?”
“용사님 바쁘신 거 아니었어요?”
“아니야. 오전은 여유 있다고 말했잖아. 잠깐 들르는 것 정도는 괜찮아.”
“그럼 같이 나가요.”
물론 녀석이 변한 만큼 우리의 대한 시선도 변하고 있었다. 사실 살롱의 중역들이 이쪽을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리 만무, 갑작스럽게 한 부대 전체가 이곳으로 이주를 했으니 고운 시선이 오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었다.
성자고 용사고 나발이고 혹시나 이 새끼들이 미쳐가지고 살롱을 집어삼키려고 하지는 않을지, 혹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들어온 것은 아닐지 의심이 되는 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려의 시선이 바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일단 살롱의 경비병들이 내가 성검용사의 몸에서 유리엘을 뽑아내는 것을 본 것이 첫 번째, 그리고 간혹 성자의 신성력을 보여준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사실상 첫 번째 이유가 가장 지분이 높지 않을까. 아무리 온갖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는 대륙이라고 해도 사람 몸에서 빛의 검이 뽑혀 나오는 광경은 흔하게 볼 수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뽑혀 나오는 검이 싸구려 철검도 아니라 무려 윗놈들이 내린 유리엘이었으니 그걸 직접 바라본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뻔했다.
구태여 이런저런 설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나는 성자가, 녀석은 용사가 되어 있다.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버린 것이다.
‘길을 걷기만 해도….’
얘들이 절로 공손해지자너.
심지어 살롱의 중역이라 할 수 있는 영애들마저도 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마치 나와 성검용사 녀석이 이 혼란스러운 대륙을 구원할 마지막 희망이라도 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성자님이야!”
“…….”
“용사님도 오셨어!”
‘엑스트라들 대사 치기 시작하자너.’
“안녕하세요. 몸은 괜찮으신가요?”
“네.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어제 들어오신 분들은….”
“안정을 취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내가 봐도 좋아 보이기는 한다.’
새로 들어온 녀석들도 이미 나와 성지훈의 존재를 알고 있다. 이미 살롱의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모양이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조심해야겠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그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호위병들도 끌고 다니고 있으니 무언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있겠지.
기존 살롱의 멤버들과는 다르게 훨씬 딱딱한 것 같은 분위기다.
한 꼬마가 쪼르르륵 인파를 해치고 달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주변의 경비병들은 깜짝 놀란 듯이 그 꼬마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성지훈의 “괜찮아요.” 한마디에 다시 길을 열었다.
난입한 꼬맹이의 시선이 닿은 곳은 성지훈의 앞.
“…….”
“…….”
“다른 아저씨들이 그러는데….”
“응?”
“형이 용사님이랬어요.”
“그래?”
“네. 형이 대륙을 구해줄 거래요.”
“…….”
“형은… 형은 정말 용사님이에요? 정말 용사님이 맞나요?”
“…….”
“…….”
잠깐 동안의 침묵, 하지만 이내 성지훈은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바로 용사란다.”
예전에 입버릇처럼 자신이 용사라고 말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말에 무게가 실린 듯한 느낌,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고 자신이 말을 내뱉으면서도 조금 긴장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이 새끼… 진짜 다 큰 거 아닌가.’
솔직히 조금은 이르다고 생각했었지만….
‘준비됐구나.’
녀석이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됐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마침 옆에서는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온다.
“성자님….”
“네?”
“잠깐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
“…….”
“공화국의 병력들이 목적지에 가까워졌다는 소식입니다.”
‘이미 알고 있기는 했어.’
진청이 1기영과 1지혜가 있는 전쟁터에 닿은 것이다. 페인트 영애와 김현성도 그쪽 전선에 있는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곧 크게 하나 터지겠네.’
며칠이 채 걸리지 않아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것은 장님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
“…….”
“벌써 도착했군요.”
“예. 이미 곳곳에서는 소규모 전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꼬마와 이야기를 나누던 성지훈이 슬쩍 대화에 끼어든다. 이런 대화가 나올 때면 항상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고 있는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질문이라도 던지고 있는 것을 보니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다.
“왜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싸우고 있는 건가요?”
“아마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공화국의 병력들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아직도 전선에 자리를 잡고 있는 중이니까요. 연합군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계속해서 들어올 공화국의 병력들이 전술적 우위를 점하는 것을 최대한 방해하고 싶을 겁니다.”
“아. 주차하기 전에 차보다 사람들이 먼저 나와서 자리 선점하려고 싸우는 그런 느낌이군요.”
‘그렇게 하면 쟤가 알아듣겠어?’
“네… 아마 그럴 겁니다.”
“…….”
“…….”
“아직 전면전만 일어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
“원거리 마법도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고, 해당 전선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까지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제 들어온 이들도….”
“피해자들인 거네요.”
“네.”
살짝 망원경으로 시선을 돌리자, 설명들은 그대로의 광경이 펼쳐진다.
어마어마한 병력들이 전선에 줄을 서며 들어서고 있었고, 제국과 왕국연합의 병력들은 그들을 최대한 저지하려고 하고 있다.
망원경을 높이 올려 땅을 내려다본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 할 만하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병사들과, 끊임없이 쏟아지는 마법과 화살들, 현대의 원거리 포격전이 생각날 정도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뿐만이 아니라 곳곳에서는 소규모 전투가 벌어지는 중, 어떻게든 전선을 밀고 밀어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이었다.
‘시바 치열하게도 싸우네.’
병력과 병력들이 부딪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 싸움 웅장해지자너.’
큰 전투를 앞두고 상대방보다 아주 약간이라도 더 이득을 보려는 성향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 크게 보면 별 차이도 나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 조금을 더 이득 보기 위해 병력들을 굴리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몇십, 몇백이 죽더라도 약간의 정보적 우위와 전술적 우위를 점할 수가 있다면 인명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느낌이다.
심지어 이건 하루아침 사이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이 전장을 만들기 위해 최소 몇 개월을 쏟지 않았을까.
특히 진 군사가 병력을 목적지로 옮기는 이 두 달간은 해당 전선에 있는 이들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었던 수 싸움, 1기영과 1지혜는 그들의 방식대로, 진청은 그들을 받아주는 듯한 느낌으로, 아주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는 두 집단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저 병력들이 마치 생명체처럼 느껴질 정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분열하고, 밀고, 밀리고, 합치고를 반복한다.
아마 저 안에 있는 일반 병사들은 자신들이 어째서 이동해야 하는지, 어째서 이 장소에서 싸워야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병영을 만들고 휴식할 틈도 주어지지 않는다. 단언하건대 이 전장에 있는 병사들은 부품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이 수 싸움은 복잡하고도 치열하다. 인간을 한계까지 굴리지 않으면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날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
“…….”
분명 1군사 이 새끼가 이 전쟁을 재미없는 전쟁이라고 평가했던가.
‘그 말 취소해야 될 것 같자너. 이건 재미없을 수가 없자너.’
이 새끼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1기영과 1지혜를 분명 인지하고 있었던 녀석이었지만, 이렇게 정면으로 부딪치게 된 것은 또 처음, 녀석은 지금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무조건 재미있어 할 게 분명 하자너.’
망원경을 계속해서 당기자,
-…….
아니나 다를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1군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네놈들이었구나.
-…….
-기생충 같은 놈들.
다시 한번 고개를 돌리자 마찬가지로 반대 진영의 1기영, 1지혜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공화국의 군사님이 꽤 흥분하셨나 봐.
-…….
-오빠. 근데 진 군사는 우리 쪽으로 못 끌어들이겠죠?
-아니, 진 군사는 여기서 죽여야 돼. 누나.
-흐응…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안 될까? 좀 아깝지 않나?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일단 움직이자. 누나.
-뭐… 그럼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그렇게 하자고요. 내 단짝.
-그래. 내 단짝.
툭.
툭.
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