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49화
대륙전쟁(29)
감히 우리 창렬이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냥 편하게 녀석을 기다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변수들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 당장 시바 이 멍청한 성검용사 때문에 옆구리에 깊은 상처를 입지 않았던가. 내장이 쏟아지지 않았던 게 다행이라고 느껴졌었던 상처였다.
항상 보급품으로 들고 다니는 이기영표 포션 세트가 있기야 했지만 기본적으로 체력이 낮은 녀석이다 보니….
‘출혈 때문에 많이 지쳤을 거야.’
류한에게 한 방 먹여줬을 거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 이후가 문제,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하고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4-2전선의 병사들은 이쪽을 불편하게 하는 요소들 중 하나다.
완전히 병력을 분할한 만큼 중간 중간에 네임드들도 포진해 있었을 터.
류한뿐만이 아니라 다른 오호대장군도 이 곳에 와 있을 가능성이 결코 적지 않다.
물론 아무리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창렬이가 놈들에게 당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대미지를 얼마나 받았냐가 문제인데.’
류한과의 전투로 인해 지친 상태로 많은 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여기서 창렬이가 뒈지는 것보다 더 병신 같은 일이 어디 있겠냐고.’
“…….”
“…….”
아무래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타이밍이었다.
“계속 이동하겠습니다.”
“네. 팔레트 님.”
‘아 시바.’
팔레트와 함께 병력들을 이끌며 빠른 걸음으로 달리면서도 망원경으로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본다.
탈출 경로를 확보하는 것에 시간을 쓸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은 김창렬이 어디 있는지 따라가는 게 먼저.
류한과 전투가 있었던 지역을 가장 먼저 살펴봤지만 이 새끼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전투가 끝난 지는 이미 한참 되어 보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통신채널을 열었지만….
‘이 새끼 왜 안 받아.’
혹시 잃어버렸나?
‘왜 연락을 안 하지?’
혹시 연락하기 힘든 상황인가. 숨어 있는 건가.
통신채널조차 먹통이었다.
만약 몸을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라면 움직이는 것보다 한곳에 가만히 짱박혀 있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 적당한 위치에 쉘터를 마련한 이후에 지친 몸을 회복시키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마음이 편했지만,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시바 미치겠네. 진짜. 다시 되돌아 가야 되나. 진 군사한테 찾아보라고 이야기는 해봐야겠는데….’
진 군사를 향해 짤막하게 용건을 전달하면서도 여러 가지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던 시점이었다.
별안간 팔레트 영애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전방 20분 거리에 공화군입니다.”
“…….”
“경로상 전투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 진짜. 시바. 산 넘어 산이자너.’
새삼스레 아직 탈출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의 연기 속에서 잠깐 동안이나마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는 했지만 아직도 이 주변은 전부 공화국 병사들로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었다.
창렬이나 이쪽이나 독안에 든 쥐 꼴이 된 것은 마찬가지였다는 거다. 막말로 누가 누구를 돕거나 걱정할 만한 상황도 아니다.
알프스를 이끌고 무리하면 김창렬을 찾을 수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팔레트는 죽겠지.’
덤으로 성검용사도 뒈질 거고.
물론 김창렬과 위 둘을 저울질할 수는 없다.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저 둘을 버리더라도 김창렬을 살리는 게 맞다는 판단이 섰지만… 성검용사가 이곳에서 죽는다는 건 이번 1회 차가 실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 그 이전에 알프스 이 병아리를 데리고 단둘이 병력들을 뚫어낼 거라는 확신도 없다.
‘그냥 김창렬을 믿어야 되나.’
상상 이상으로 현 상황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인지한 것은 당연지사.
팔레트의 연기 속에 있어 제대로 주변을 둘러볼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불과 몇 십 미터, 아니, 몇 미터 안에 적군 병력이 주둔해 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연기 속으로 들어와 길을 잃은 병사들도 있을 터, 이 정도로 빠르게 적들과 마주치는 것을 보면 아마 4-2전선의 수뇌부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쪽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을 것이다.
근처 부대는 이미 연락을 받고 이쪽을 찾고 있겠지.
팔레트의 목소리를 들은 옥사나 누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온다.
“쉴 틈이 없군요.”
“적군 한가운데 있으니 말입니다. 아직 완전히 포위된 것은 아닙니다만… 빨리 빠져나가지 않으면 완전히 갇히게 될 겁니다.”
“분쟁지역 쪽으로 향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연합군의 전선까지 이동한다면 적들도 쉽사리 우리를 쫓아오지 못할 겁니다.”
“차라리 한쪽으로 길을 뚫는 편이….”
“아예 후방으로 빠지는 건….”
“후방으로 가다가는 들어오는 병력들과 마주치게 될 겁니다. 차라리 앞으로 뚫고 나가는 편이 더 나아요.”
곧 전투가 벌어진다는 소리에 다들 한마디씩 하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쓸 만한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특히 분쟁지역으로 향한다는 아이디어는 다 같이 죽자는 것과 마찬가지.
물론 분쟁지역으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우리를 따르는 병력을 떨쳐내는 게 가능해지기야 할 것이다.
공화군의 입장에서는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다 태울 수는 없을 테니까. 괜히 우리를 쫓으려고 하다가 연합군에게 덜미를 잡힐 수도 있다는 거다.
문제는 이쪽이 분쟁지역으로 향하는 길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 최소한 몇 시간 전에는 진입하기 쉬웠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분쟁지역 쪽의 전선은 자리를 갖추고 있는 도중이었다.
그쪽으로 가는 길에 적 지휘부와 오호대장군 둘 정도는 마주칠 각오를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분쟁지역으로 뚫고 지나가려면 이것보다 배 되는 이상의 병력이 필요하다.
‘시발. 여기서 시간이 끌리면 끌릴수록 더 복잡해지는데.’
계속해서 공화국의 병력들이 이동하며 병영이 만들어지는 중, 적 지휘부를 타격하고 분쟁지역을 넘어설 거라면 남은 타이밍은 지금뿐이다.
‘그냥 해볼까.’
창렬이도 분쟁지역 쪽으로 넘어갔을 확률이 높은 것 같은데.
아직도 전선이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이다. 한 집단이 넘어가기는 어렵지만 개인이 넘어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김창렬이 이곳의 사정을 알고 있다면 더욱더 우리가 있는 쪽으로는 발길을 돌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꼬리가 밟힐 확률도 있거니와 류한을 최대한 멀리 떨어뜨리려고 할 테니까.
“적들이 연기 속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퍼즐은 모이고 있는 것 같은데.’
“성자님. 결단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자님.”
확률이 낮은 싸움에 주사위를 던지는 취미는 아니지만 김창렬 정도가 걸려 있다면 주사위를 던질 만하지 않은가.
녀석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지금, 최소한 이쪽이 지휘본부를 뚫거나 오호대장군과 부딪쳐 준다면 탈출하기 훨씬 용이할 것이다.
상황이 좋지 않아 보였지만 모든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는 쪽은 한 쪽, 2회차에서는 모르겠지만 1회차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는 쪽을 골라서 손해 본 기억이 없다.
그야 이곳에서는….
‘모든 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지금 같은 타이밍에 팔레트 정도 되는 패가 손안으로 들어온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건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어떻게 할 거야. 진유.”
“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나는 잘 모르겠어. 다만.”
“네.”
“계속해서 도망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아.”
“…….”
“우리는 전쟁을 막으러 온 거잖아. 네가 그렇게 말했고, 지금은… 지금은… 내 생각도 너와 같아.”
‘그런 소년만화 같은 대사 치면.’
“…….”
“…….”
‘흔들리게 되자너.’
“전투 준비. 연기 속으로 적들이 진입합니다.”
“전투 준비해라!”
“전투 준비! 방패 올려! 방패 올려! 온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당연히 여기서는 입을 크게 열고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분쟁지역으로 향할게요!”
“네.”
“분쟁지역으로 향하겠습니다!”
“움직여! 제길! 이 새끼들아! 움직여!!”
“빠르게 이동한다! 최대한 빠르게!”
“마법사들 주문 외워!!!”
연기 속으로 무작정 들어온 병력이 아군 병력과 부딪치자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제길.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사실은 이 이상 팔레트에게 뭘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녀의 연기가 물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의 위치를 특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연기를 사방으로 뿌리고 있었으니 부담이 갈 수밖에 없다.
전선의 1/5 되는 지역에 연기가 들어차 있다. 안개 소환사에게는 별것 아닐지도 몰라도 연기를 직접 뿜어내야 하는 팔레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뚫어내야 합니다.”
“뚫어내!”
콰아아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아아악!”
“이 테러리스트 새끼들이!”
“본대에 연락해!!”
이쪽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하늘 위로 마법을 쏘아 보내려고 하는 마법사들이 시야에 비쳐왔다.
아마도 달빛을 따르는 자들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 팔레트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인지 하늘 위로 올라가려는 불꽃들을 연기로 막고 있었다.
오히려 내부에서 터진 불꽃에 의해서 적군 진영이 불바다가 되어버린다.
퍼엉! 퍼어어어엉!
“아아아아아야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악! 불 꺼! 제기랄! 불 꺼!!!”
“제길! 이 변절자가! 가여워 거두어 준 것도 잊고… 감히 공화국을 배신해?!”
‘네가 거둬 준 것도 아니자너.’
좋은 성과였지만 팔레트 영애가 물리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아군에게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연기의 범위가 너무 좁아지면 안 돼.’
뿜어낼 수 있는 연기는 제한적이다. 엄한 곳에 연기를 사용하다가는 우리 몸을 가릴 수 있는 연기가 전부 사라져 버릴 것이다. 범위가 줄어드는 것 역시 문제.
‘우리 여기 있다고 광고할 일 있냐고.’
지역 전체를 연기로 뒤덮어야 의미가 있다. 너무 좁은 지역을 연기로 가려봤자 아군 병력의 위치를 알려주는 꼴이지 않은가.
딱 지금의 범위와 농도가 적군 병력 속에서 아군 병력이 숨어들기에 가장 적절하다.
팔레트 역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 만무했다. 위험에 처한 아군 병사들을 지켜내거나, 적군 마법사들을 제압하는 용도로 연기들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이 반갑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고, 계속해서 다른 활로를 찾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연기는 우리가 적 지휘부를 타격하고 분쟁지역으로 향할 때까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용사님!”
“알고 있어!”
‘지금 똥오줌 가릴 때가 아니자너.’
성지훈 역시 곧바로 검을 들고 전장에 합류한 것은 당연지사.
“12시 방향과 8시 방향에서 적 병력이 연기 안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하. 시바.’
“아마 이곳으로 오기까지 몇 분 걸리지 않을 겁니다. 연기로도 소리는 막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무덤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병력을 나눠야 되나. 꼬리를 자르고 우리끼리라도 탈출해야 되는 건가? 시바 괜히 오바했나. 데이터로만 승부를 봤어야 했나.’
“아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악! 뭐야! 제기랄!”
“미… 미친!”
“떨쳐내! 개새끼들! 빨리 움직이란 말이야!”
“엄마….”
“아아아아아아악!”
앞뒤가 꽉 만힌 전장에서 계속해서 드잡이질을 하게 된 것은 당연지사. 병사들이 들고 있는 창과 방패가 점점 무거워지고, 발걸음이 멈춰 고립되기 시작한다.
‘시바. 뚫고 나가야 되는데.’
“뭐… 뭐야.”
‘한 조각만 더 있으면….’
“성자님!”
“아아아아악! 의무병! 의무병 어디 있나!”
별안간 어디에선가부터 커다란 굉음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자연스럽게 망원경을 돌린 곳에 위치한 것은….
“…….”
“…….”
연합군의 병력.
시야에 비치는 것은 틀림없이 연합군의 병력이었다.
순간적으로 분쟁지역까지 잘못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아무리 망원경을 올려봐도 이곳이 공화국 진영 내의 한가운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나타난 연합군의 병력으로 인해, 혼란을 느끼는 것은 이쪽뿐만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가장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공화국의 병사들이다.
“씨발! 뭐야! 이 왕국연합의 개들이!”
“으아아아아아 도망쳐! 제길! 도망쳐!”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지원 병력 요청해!”
“신호탄 쏘아 올리라고!”
“연기가 마법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럼 아무거나 좋으니까 무슨 수를 써보란 말이야!”
“밀어붙여!”
“후퇴! 후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병력의 숫자가 결코 적지 않다.
팔레트 영애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녀 역시 놀랍다는 얼굴이었다. 갑작스레 연합군의 병력이 달빛을 따르는 자들을 돕게 되는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정.
하지만 예상가지 않은 부분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는지 조심스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12시 방향에서도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흑장미 살롱이다!”
“…….”
“신 흑장미 살롱이야!”
4년 전에 잃어버린 퍼즐들이 모였다.
연기로 인해 가려진 시야를 밝혀주듯, 영애들이 빛을 밝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