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50화
대륙전쟁(30)
‘왠지 모르게 이럴 것 같더라니.’
솔직히 이런 상황을 기대하기는 했다. 브러쉬 영애가 팔레트 영애에게만 도움을 청할 리 없었을 테니 말이다.
여기저기에서 뿔뿔이 흩어져 있었던 영애들이 브러쉬 영애와 커넥션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저 멍청한 성검용사 성지훈이도 알고 있는 사실, 심지어 몇몇은 흑장미 살롱의 활동을 지원해 주거나 뒤를 봐줄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이곳에 팔레트 영애만 나타난 것이 이상한 상황이었다.
굳이 브러쉬 영애가 모두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더라도, 아마 지들끼리 이런저런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을까.
‘얘네가 어디 보통 절친들이냐구.’
그간 계속해서 연락을 하고 있었는지, 하고 있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커뮤니케이션 통로가 살아 있었던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그 수단과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브러쉬 영애는 그저 잠잠했던 호수에 돌을 던진 것뿐이라고 본다. 호수에 인 파문이 여기저기로 퍼져 나간 것이 분명, 아니나 다를까 신 흑장미 살롱의 인원들 중에서는 그간 보지 못한 이들이 시야에 비쳐왔다.
여기저기에서 뿔뿔이 흩어져 있었던 영애들이, 단신으로, 혹은 자신들이 이끌고 있는 세력과 함께 합류한 것이다.
‘저거… 루스빌라 영애 아니야? 저거?’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던 연합군과는 다르게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던 신 흑장미 살롱의 인원들이 어떻게 이곳까지 닿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해결된다.
유서 깊은 마도 가문의 일원으로서 왕국연합을 받치던 기둥의 장녀는 아무래도 그간 마탑에 귀의했던 모양, 그녀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신 흑장미 살롱 병력들의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한다.
‘대규모 투명화 마법.’
암살자들이 사용하는 은신보다는 그 효과가 좀 더 미약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놀라운 일을 벌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계속 투명화를 유지하고 왔다는 거 아니냐고.’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마력량은 물론이거니와 가지고 있는 지식도 말이다.
마도의 끝을 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던 것이 마냥 허풍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론 우리 하얀이를 생각하면 그녀가 마도의 끝을 보겠다고 주절거리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황당한 발언인지 되새김질하게 되지만, 요 4년간 그녀가 이루었던 성장세를 생각해 보면 그게 마냥 허풍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아마 정하얀이 루스빌라 영애를 직접 마주한다면 그녀를 괜찮은 마법사라고 담담하게 평가할지도 모른다.
‘하얀이한테 그 정도로만 인정받아도 A급이자너.’
한 사람의 훌륭한 마법사로 성장한 것이다.
“…….”
“…….”
‘요즘 애들은 4년 만에 이렇게 변하기도 하는구나.’
그리고 익숙한 인형이 또 하나. 연합군 쪽에 속해 있는….
‘함가르디아 영애.’
함가르디아 영애였다. 데뷔탕트 당시 파스텔 이외에 가장 쓸 만했던 전위.
이제는 철이 들었다며 검술 놀이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 말했던 꿈 많던 영애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매번 사용했던 장식용 검을 버리고 본인의 몸보다 더 커 보이는 대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병사들 두셋이 튕겨 나가는 꼴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온다. 물론 강해졌을 거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갑작스레 힘캐로 전직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페인트 밑에서 반병신이 됐다고 파스텔이 말했던 것 같은데….’
몸을 치료한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파스텔이 잘못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꽤 멀쩡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바로 옆에서 함께 싸우고 있는 쟤에 비하면 그나마 말이다.
‘라이넬피아 영애.’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고 엉엉 울면서 무작정 달려드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애였는데, 싸우는 모습을 보니 제법 태가 난다.
흉터가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모습이 기억 속에 훤한데 지금 보니 온몸이 흉터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아… 흉터가 생길 것 같은데… 괜찮겠죠!? 아앗!”
“이미 흉터가 한가득이잖아요.”
“숙녀에게 못하는 말이 심하신 거 아닌가요! 아아 분명히 아플 것 같은데!”
‘같은 대사 또 치고 있자너. 근데 쟤는 진짜 화염 마법에 다짜고짜 얼굴 들이밀 때부터 예상하기는 했었어.’
진짜 보통 깡따구가 아니기는 했어. 딱 탱커 하면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변의 추천이 있었던 모양이다. 커다란 라운드 실드를 든 채로 철퇴를 붕붕 돌리며 휘두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본래 저런 타입은 운이 나쁘면 어디에선가 객사하게 마련인지라 솔직히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용케도 살아 있었자너.’
물론 모든 영애들이 시야에 비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락을 받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버렸기 때문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지만 예전에 봤던 얼굴들 중에서도 반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전쟁통이니까. 사실 저게 당연한 거겠지.’
4년간 계속해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저 정도가 살아 있는 것으로도 기적이라고 해야 함이 옳다.
이쪽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죽음이 있었을 것이고, 내가 알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상처를 떠안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마 그 상처들이 그녀들이 흩어져야만 했던 이유였을 터다. 큰 슬픔에 잠겨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 그녀들 스스로가 내린 결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다시 뭉친 게 꽤나 의미가 크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구태여 이쪽을 도와주기 위해서 온 게 아니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치유하러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그녀들이 짓는 표정들이 그러했다.
“오랜만이에요! 함가르디아!”
“루스빌라 영애?”
“이제는 영애가 아닌데요? 잘 지내셨어요?”
“네. 루스빌라는… 분명 마탑에 들어가셨다고 들었는데.”
“답답해서 말이에요. 함가르디아 영애야말로 크게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오히려 라이넬피아 영애가 더 많이 다친 것 같은데요?”
“라이넬피아는 항상 무모하니까요. 같이 다니는 입장에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랍니다.”
“아무튼, 일이 전부 타 끝나면 특별히 제 티파티에 초대해 드리겠어요.”
“하하하하. 오랜만이네요. 티파티라는 것도.”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저도 초대해 주세요. 루스빌라!”
“그럼요. 당연히 초대해 드려야지요.”
‘저렇게 노는 것 좋아하는 애들이 그동안 티파티도 못하고 어떻게 참았어.’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녀들뿐만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병력들을 밀어내며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눈에 띈다.
“꺄아아아아악! 오랜만이야! 왜 이렇게 예뻐졌어!?”
“타르야말로! 어떻게 전쟁터 속에서 그렇게 관리를 하실 수 있었던 건가요.”
“두 분 모두 마음에도 없는 뻔한 칭찬은 전투가 끝난 이후에 나누시라고요!”
호들갑을 떠는 애들부터,
“팔레트에게 연락을 받았거든요.”
“의외네요. 완전히 공화국에 귀화한 줄 알았는데.”
“공화국으로 귀화하시기는 했죠. 종종 전쟁터에서 적으로 마주쳤었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었거든요. 팔레트가 아니었으면 저는 벌써 죽었을 거예요.”
담담하게 다른 영애들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들까지.
“네에!? 결혼하셨다고요!!”
“아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 알면 남편이 졸도할 거예요.”
“그래서 상대는… 상대는 누군가요! 공작? 백작? 남작?”
“평범한 농부랍니다. 아이도 한 명 있어요.”
“네에에에?! 언제는… 남작 이하로는 쳐다도 보지 않는다고 하셨으면서… 벌써 아이까지. 이유가 뭔가요?”
“글쎄요. 잘 생겨서?”
뜻밖의 소식을 전하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이 정신없는 전쟁터 속에서 어떻게 저렇게 재잘재잘 떠들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근황을 전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다가다 한마디씩 나누는 것들이 그녀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 것만은 확실했다.
떠난 사람 만큼 새로운 사람이 그 빈자리를 채우게 마련, 많은 이들을 잃은 영애들이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새로운 이들의 얼굴도 눈에 띄었다.
사실 내가 얼굴을 보지 못했던 영애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신 흑장미 살롱에서 봤었던 400여 명의 영애들, 그녀들에게 영감을 받은 또 다른 사람들, 그녀들이 이끌고 있는 세력들까지.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의 병력들이 뒤섞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 위화감이 없다.
예전에 힘을 합쳐서 겨우 벽을 쌓고, 밀고, 그 안으로 마법을 쏘아 보냈던 원시적인 전투를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서로 유기적으로 말을 맞추고 움직이고 있다.
훌륭한 연계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전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물론 우리 성검용사 성지훈 역시 놀란 표정을 보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얘 입장에서는 이게 얼마나 깜짝 놀랄 일이겠어.’
갑작스레 연기들이 병력들을 휘감으며 팔레트 영애가 튀어나온 것도 이미 충분히 황당한 상황인데, 위기에 빠지기 무섭게 여기저기에서 다른 이들이 튀어나오면서 이쪽을 도와주고 있었으니 마치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좋은 타이밍에 동료들이 속속들이 도착하는 것은 규칙 아닌 규칙이 아니었던가.
다른 병사들의 표정도 성검용사 녀석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이게 뭐야? 저 사람들은 갑자기 어디서… 왜 우리를 도와주는 거야?”
‘뭐긴 뭐야. 시바.’
“진유… 진유! 응?”
‘아니, 나한테 그런 거 물어볼 시간에 빨리 가서 검이나 휘둘러. 쫌. 제일 건강한 새끼가 감탄만 하고 하는 게 없자너.’
녀석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른쪽에서 들려왔다.
“제 친구들이에요.”
“…….”
“…….”
“브, 브러쉬 님?”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한 모양이네요.”
“…….”
아직까지도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성검용사를 지나친 브러쉬의 시선이 닿은 곳은 팔레트가 있는 쪽이다.
‘감회가 새롭겠자너.’
연기를 계속해서 컨트롤 하며 전투를 돕고 있었던 팔레트의 시선 역시 계속해서 브러쉬에게 머문다.
뭐라고 할 말을 잊은 듯한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얼굴을 본 지 너무 오래돼서 살짝 어색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이윽고 팔레트가 팔을 살짝 벌리자 그녀에게 뛰쳐 들어가는 브러쉬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
“…….”
서로를 꽉 껴안는 모습은 감동적이라면 감동적이다.
“고마워. 팔레트.”
“천만입니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많은 대화를 나눈 것 같은 느낌.
“파스텔은….”
‘그래. 걔 안 보이던데.’
“파스텔은 페넬로티 옆에 남아 있겠대. 다들 모이는데 페넬로티를 혼자 두기 싫다고….”
“…….”
“…….”
‘그래. 걔는 안 왔구나.’
그 말에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있는 팔레트의 표정이 눈에 비쳐온다.
그리고 그 말에 가장 아쉬워하는 사람이 또 하나. 지금 이 전장을 통제하고, 지휘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자신도 모르게 위를 올려다보자 날렵한 투구를 쓰고 있었던 인형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가 조심스레 투구를 벗자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시야에 비쳐왔다.
“페인트!”
‘얘는… 얘는…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이기는 한다.’
“오랜만이에요. 브러쉬. 팔레트.”
앙상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다음 페이지에 색기영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색기영 일러스트 이유 작가님 버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