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51화
대륙전쟁(31)
‘아니, 왜 저래. 얘가 왜… 저렇게 변했어.’
말을 탄 채로 갑주를 입고 있었던 그녀의 모습을 봤을 때만 해도, 그 포스와 무게감에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페인트 영애가 연합군의 주축 중 하나로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을 때만 해도, 예전의 일을 전부 극복하고 나아가기를 선택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내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화려한 갑주 안에 숨겨진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리게 될 정도.
아무리 갑옷에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다지만 도대체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가는 몸이 시야에 비쳐왔다.
마치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은 느낌이었던지라 안쓰럽다기보다는 신기하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로맨스 소설에 등장할 것 같았던 언제나 밝게 빛났던, 그녀의 자랑이었던 치렁치렁했던 금발 머리카락은 완전히 빛이 바래져 버렸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마치 개털 같은 느낌이었는데, 심지어 중간중간 머리가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고, 흰색 머리카락이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증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의 페인트의 모습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그 와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얼굴의 대부분을 뒤덮고 있는 화상. 정작 데뷔탕트 당시에 화염마법을 뒤집어썼던 라이넬피아 영애의 얼굴에는 화상 자국이 없는데, 그녀의 얼굴에만 화상 자국이 뒤덮여 있었다.
한창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니, 진짜. 뭐야.’
당황스럽지만 브러쉬와 팔레트 역시 그런 그녀의 모습이 익숙해 보인다.
페인트 영애를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놀랐다는 기색이 없다. 이미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도대체. 시바 치료는 왜 안 한 거야? 그래도 괜찮은 사제 만났으면 저것보다는 나았을 텐데….’
“…….”
“…….”
‘뭔 시바 빈민촌에서 살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연합군에서 한자리한다며, 그러면 고위급 사제 만나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자너.’
어쩌면 일부러 내버려 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었다.
“페인트!”
“오랜만에 뵙게 돼서 반갑네요. 상황 자체는 그리 반갑지는 않지만….”
“…….”
“…….”
‘아니, 산 사람은 살아야지. 저게 뭐 하고 있는 거냐구.’
모르긴 몰라도, 아이나 페넬로티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얼굴을 완전히 덮고 있는 저 화상 자국이 전투 중에 다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상처를 낸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왠지 모르게 그녀가 직접 얼굴을 지졌다는 것에 무게감이 쏠리는 것은 기분 탓일까.
김현성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자신의 마음이 저주스러웠을 테고,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의심하고 있는 상태였을 테니, 스스로에게 형벌을 내린 셈이었다.
‘저러면 시바 누가 고마워한다고. 참 진짜… 애들이 너무….’
사실 페인트 영애의 잘못이라고도 볼 수 없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그녀가 가장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저 모습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녀는 4년 전의 일을 극복한 적이 없다. 화상 자국도 화상 자국이었지만 그녀의 두 눈에 담겨 있는 불안감과 죄책감 또한 두드러진다.
볼까지 내려온 다크써클과 그녀의 몸 상태가 앞선 추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얼굴에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는 것.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의 소식에 마음이 편해지기는 하는 것인지 입가에 희미한 미소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진짜 쟤 좀 어떻게 해줘라. 아… 너무 불쌍하다.’
“미안해. 페인트.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해서….”
“아니에요. 브러쉬. 물론… 좀 무리한 부탁이기는 했지만요…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말로 표현 못 할 정도로… 대충 예상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갑작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니….”
“아….”
“후후… 농담이에요.”
“…….”
“…….”
‘그래도 농담은 하자너. 친구들 보니까 좋기는 한 모양이자너.’
“흑장미 살롱 동기의 부탁인데… 전부 제쳐두고 달려오는 게 당연하죠. 브러쉬의 편지에 쓰여 있는 내용들이 흥미롭기도 했고요. 다른 분들도 모두 와주실 거라는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마치 동창회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이네요.”
“그, 그래도… 면목이 없네… 내가… 모두를 위험하게 만든 것 같아서….”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친구잖아요.”
“…….”
“…….”
“저… 브러쉬 혹시 파스텔은….”
“아… 아, 파…스텔은… 페넬로티 옆에 있겠대. 아! 혹,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파스텔이 안 오는 이유는 페인트 때문이 아니니까.”
“네….”
‘둘이 좀 화해해라. 진짜. 파스텔도 진짜 나쁘기는 했어. 진짜 걔도 자기밖에 몰라. 어떻게 지 입장밖에 생각을 안 하냐고. 원망을 하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데. 얘 상태 좀 봐 가면서 원망을 하든지 말든지 해야지. 시바.’
“파스텔은 잘 지내고 있던가요?”
“으응. 그렇지 않아도 모두 함께 보고 싶다고….”
‘선의의 거짓말이자너.’
여기 들어오자마자 가장 처음 목격한 장면이 파스텔이 페인트에게 쌍욕을 갈기는 장면이 아니었던가. 다른 영애들은 보고 싶어 할지 몰라도 페인트만은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물론….
‘저런 상태일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할 거야.’
양심이 있다면 페인트가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그녀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파스텔의 머릿속에서는 페인트는 친구를 희생시키고 사랑과 커리어를 전부 얻은 야망녀 정도로 비춰지고 있지 않을까.
아이나 페넬로티의 자리를 빼앗아 김현성과 히히덕거리고 연합군에서도 인정받는 지휘관이 되었다고 들었으니 심사가 뒤틀릴 만도 하겠지.
그간 페인트와 만나는 걸 완전히 거부하고 있어서 생긴 오해일 것이다. 멀리서나마 본 적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평소의 그녀는 꽤 멋진 갑주를 걸치고 있었으니 그 안에 있는 페인트 영애를 마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짧은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녀의 시선이 이쪽에 머무른 것은 내가 한 참이나 파스텔과 페인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때였다.
“아….”
하는 단말마의 탄성이 들려온 것. 당연히 그 목소리가 페인트의 것임을 깨닫는다. 이윽고 들려오는 브러쉬의 목소리.
“닮았지?”
“네. 정… 정말로… 닮았네요.”
괜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부담스럽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다니까.”
“…….”
하지만 본래 이럴 때일수록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국룰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수한 얼굴을 하고 페인트 영애를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시바. 미안하게.’
“정말로… 닮았네요….”
같은 소리만 중얼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오랜만에 양심이 찔려온다. 그녀가 그나마 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모르겠지만 지금 보여지고 있는 모습이 워낙 좋지 않았던 탓이다.
어떻게든 감정을 컨트롤 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생각대로 되지는 않는 모양, 결국에는 다시 투구를 푹 눌러 쓰는 모습이 눈에 비쳐온다. 감상에 빠지기에는 이른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나중에.”
“응….”
‘아직 전투 중이었자너.’
말 그대로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첫 번째 공격을 받아친 이후 아주 잠깐 동안 여유가 생기기야 했지만 지금 아군 병력이 적군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당장 병력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계속해서 적군들이 연기 속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애써 시선을 돌린 페인트가 주문을 외우자, 연기 속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빛이 그려지고 지워지고를 반복한다.
‘와. 이거.’
옛날에 나랑 진청이랑 하던 거 아니었냐구.
모스부호 신호는 아니었지만 빛으로 특정 신호와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당연히 이곳에 모이게 된 이들은 여러 가지 형태를 그리고 있는 빛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다.
계속해서 전진하고 있었던 병력이 순식간에 대열을 갖추며 다시 한번 적을 마주할 준비를 마친다.
커다란 목소리로 터져 나오는 명령이나 외침보다 영애들은 빛을 바라보는 것이 더 익숙하다. 다시 한번 기하학적인 형태의 빛이 주위에 내려앉자, 명령을 받은 마법사들이 외운 주문이 연기 밖으로 뻗어 나간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제기랄!!”
‘능력 하나는 진짜자너.’
“움직여! 얘들아!!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아 오랜만에 보니까 헷갈렸어요!”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지금 공화국군 한가운데라고요!”
팔레트 영애가 연기로 적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서 들어오고 있는지 감지하고 난 이후에 페인트에게 전달하고, 그녀가 즉각적으로 작전을 내린다.
지금 한참 비석의 옆을 지키고 있을 파스텔 영애가 보기에는 지금 페인트가 하고 있는 짓이 그냥 카피캣으로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빛으로 형태를 그린다는 건 사실 그냥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 중에 하나다.
지금 이 병력을 유지하고, 전진시키고, 적군에 대응하고 있는 것은 오롯이 페인트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노력의 결실이었다.
비록 팔레트의 연기 속이기는 했지만 페인트는 이 병력의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가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병력이 있는 곳을 연기로 꽉 채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팔레트는 안을 채우는 것보다 연기들을 바깥으로 퍼뜨리는 것에 집중한다. 짙은 연기에 가까이에 있는 이들과 소통할 수 없었던 병사들은 멀리 있는 이들에게도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전쟁터에 있는 거야. 시바 동창회에 있는 거야.’
물론 이쪽의 얼굴을 확인한 몇몇 영애들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한 수순.
“페… 페넬로티가 아들이 있었어?”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차라리 남매라고 하지.’
“미리 이야기를 들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정말로 깜짝 놀랄 뻔했네요. 정말로 성자라고요? 그럼 저쪽이 용사님? 정말로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걸까요.”
“거기 이름이 뭔가요?”
“아… 저는….”
“혹시 연상은 좋아하니?”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럽기는 해.’
얼굴이 새빨개진 성검용사 녀석이“네! 저는 용… 용사! 전, 전쟁을 끝낼 거예요.”라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다들 이쪽을 한 번씩 거쳐 지나간 이후에는 각자의 무기를 고쳐 들고, 이동하고, 멀어지고를 반복하는 중, 당연하지만 성검용사 녀석 역시 점점 분위기에 고조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방금 전과는 다르게 진심으로 그녀들에게 녹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움직여요!”
“빛을 밝히자. 얘들아.”
“빛을 밝히자!”
“오랜만이네.”
여기저기에서 소년만화스러운 전개가 일어나고 있었으니 우리 성검용사의 가슴 속에서 두근두근거리는 소리와 함께 빛이 터져 나온다.
“진… 진유.”
“네. 용사님.”
자연스럽게 녀석의 가슴 쪽으로 손을 뻗자 유리엘이 손에 잡힌다.
주변에서는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와 함께 탄성이 터져 나온다.
당연히 신기한 광경일 것이다. 브러쉬의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기는 했었지만, 정말로 이 두 꼬마가 성자와 용사라는 확신 같은 게 있어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실제로 보면 더욱더 신기하고,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해 보이는 장면,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는 환한 달빛이 사방을 에워싼다. 그 가운데에서 터져 나오는 달빛은 천천히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눈을 비비게 되는 장면이다. 그녀들은 바보가 아니고, 이게 단순한 신성력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테니까.
조금 더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이쪽 역시 빛을 마음 놓고 뿌리는 것은 당연지사.
녀석과 내 주변에 빛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는 녀석, 나는 녀석의 가슴에서 뽑혀 나온 유리엘을 건넸고, 놈은 조심스레 유리엘을 받아 들었다.
남에게 쉽게 감화되는 녀석은 어설픈 용사마냥 검을 하늘 위로 추켜 올린 채로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야아아아아… 빛… 빛을 밝히자!”
‘아 시바 쟤가 하니까 쪽팔리자너.’
하지만 그나마 쓸 만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직후,
습관적으로 망원경을 움직였을 때,
“…….”
“…….”
저 먼 곳에서부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류한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다음 페이지에 김창렬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김창렬 일러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