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54화
대륙전쟁(34)
푸화아아아아악!
성지훈이 드라마틱하게 각성하는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꿈속 세상에서 돌아온 김현성처럼 갑작스레 노을빛의 검을 뿌려대며 도노반을 미국으로 보내버리는 상황이 일어날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본래 공을 들인 만큼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건 어디에서나 통하는 불변의 진리가 아니었던가.
사랑스러운 우리 회귀자의 각성을 위해 빌드업을 한 기간만 몇 년, 결코 짧지 않았던 기간 동안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과 사건이 차곡차곡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낸 결과물이 바로 노을빛의 검사 김현성이었다.
갑작스레 달빛의 검사 성지훈이 되기를 바란다는 건 어쩌면 녀석에게 너무나 잔인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아직 성지훈과 함께한 기간이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로헨의 윌근본처럼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게 하며 붉은 꽃을 그리게 된 것도 아니었고, 우효 새끼처럼 특수한 상황에 처한 것도 아니었다.
녀석이 각성하기까지에는 아직 너무나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는 거다.
‘그래도… 조금씩 성장하기는 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성장 그래프가 상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성지훈은 지금 이 대륙이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였고, 노력하고 싶어 했으며, 지금보다 더욱더 성장하고 싶어 했다.
실제로 성과를 거두기도 했고, 정신적인 부분, 육체적인 부분 모두 이전보다는 나아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까. 시바. 뭐가 달라진 줄 모르겠자너.’
너무나도 허망한 모습에는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에 절반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 우아하고 고상한 검술을 까먹어 버린 것일까. 원숭이마냥 날뛰고 설치는 것 외에는 한 것이 없었다.
‘너무 흥분했어.’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였고, 그 흥분은 쉽사리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어쩌면 녀석의 어린 나이도 놈이 이성적인 싸움을 하는 것에 방해가 되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게임을 즐기듯이 전투에 임했었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
전투의 고양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긴장, 분노, 흥분, 모든 요소가 녀석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류한에 대한 원색적인 분노가 아니었을까.
아쉽게도 분노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게 놈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은 모양, 이름 없는 형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30초 만에 가슴을 열어주는 녀석을 보니 한숨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유리엘!”
물론 가슴의 상처는 유리엘로 인해 순식간에 회복된다.
성지훈이 뒤로 넘어가기도 전에 모든 상처들이 원상복귀된다. 마치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쪽팔린 기합 소리만 크자너.’
저렇게 입을 크게 벌리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기합을 외치면 크리티컬 대미지라도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건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세계관으로 트립해 음공이라도 시바 수련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계속해서 큰소리로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피슉! 피슉!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팔과 다리, 심지어는 목까지 혈선이 그려지며 피가 흩뿌려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성지훈은 뒤로 쓰러지기도 전에 모든 상처가 회복된다.
‘저럴 거면 차라리 탱커를 하지 그랬냐구.’
“이야아아아아악!”
류한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검을 휘두르는 중, 그래도….
‘한 번에 목이 안 떨어지는 건 칭찬해 줄 만하자너.’
물론 이 일방적인 전투가 아직까지 끝나지 않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검의 유무였지만 애초에 커트라인을 넘지 못했다면 이 정도로 전투가 지속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완전히 목이 날아가거나 심장이 찔리면 회복이고 뭐고 없었을 테니까. 성지훈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절대로 한 번에 목이 날아가지 않도록, 대비하고 방어하고 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칭찬의 박수 세 번을 쳐주는 것이 맞기야 하다.
‘어느 정도 따라가고 있는 것 같기는 해.’
어찌 됐건 간에 검을 부딪치는 소리는 들려왔으니 말이다.
1차전에서 아예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약간이나마 성장한 셈. 검을 들고 휘두른다는 개념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류한의 템포를 조금이나마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제길! 유리엘!!”
“…….”
“이야아아아아아아아!!”
피슉!
“아아아아악! 제기랄!!!! 유리에에에엘!!”
“…….”
푸화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흐… 흐윽… 이야아아아!”
슬슬 아프자너. 절대로 안 아픈 게 아니자너.
어느 순간부터는 억울해 보이기까지 한다. 무력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것인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흐으으윽… 흐윽… 이아아아야악!”
쾅! 콰아아아아앙!
“유리엘!!!”
‘유리엘 좀 그만 찾아.’
퍼어어억!
“유리에엘!! 성검이여!!”
피슉!
챙!!
“너… 너만은 절대로 용서 못 해!!!”
“…….”
“유리엘!!! 흐윽….”
어느새 얼굴은 눈물범벅, 성지훈이 류한에게 익숙해지는 만큼, 류한 역시 성지훈에게 익숙해지고 있는 중.
녀석이 초재생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에는 류한의 검이 한층 더 빨라진다. 회복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대미지를 누적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 번에 목을 베어내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디까지 회복할 수 있을지 시험대에 올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성검용사에게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선택일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아예 녀석을 꺾어버리려는 의도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이미 둘이 검을 부딪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이 폐허가 되고 있다. 이곳저곳을 검기들이 상처 입히고 있는 중, 절대로 휘말리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둘이 쓰는 경기장이 계속해서 넓어지고 있었다.
대부분이 류한이 날리고 있는 검기였으니 사실상 성지훈은 태풍 속에 서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시바 우리 성검용사는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계속해서 뒷걸음질 치며 검을 받아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오히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딛고 있었다.
“우야아아아아악!”
찐따 같은 기합을 내지르며 말이다.
‘지훈아. 시바. 바로 그거야.’
“흐윽… 끄으으윽… 덤벼!!!”
‘이미 덤비고 있기는 해!’
“들어와! 어디 한번 들어와 보라고! 어디 들어와 봐!”
‘더 들어가면 너 죽을 것 같기는 해.’
그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성검용사 녀석의 눈이었다.
‘많이 달라졌구나.’
마치 불꽃이 일고 있는 듯한 느낌, 처음 봤을 때의 그 이상했던 사이코 눈깔과는 확연히 다르다.
녀석의 눈에는 조금씩 신념이 들어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올곧은 눈이라면 올곧은 눈,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의지의 표현, 마치 소년만화의 주인공들이 하고 있을 것만 같은 눈이었다.
녀석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뿌려진 피들이 온몸을 뒤덮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카락들이 모조리 피에 젖어 내려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 눈은 빛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그리고,
“…….”
류한의 검이 순간적으로 움찔거린 것처럼 보였다.
현시점에서부터 대역전극이 일어나면 꽤 그럴듯한 이야기가 될 것같이 느껴졌지만 이미 성지훈은 한계.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튀어나간다. 몇 합이 지나지 않아 성지훈의 목이 날아갈 것이라는 걸 직감한 탓이다.
아니, 류한이 녀석의 눈에 시선을 빼앗기지만 않았더라도 이미 성검용사의 목은 날아갔을지도 모르겠다.
녀석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이유는 저 미친 살인기계가 성지훈의 눈에서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었을 터였다.
체력적인 한계를 맞이했는지 유리엘을 지팡이 삼아 류한을 노려보고 있는 성지훈, 동요하고 있는 듯한 류한, 그리고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성검용사를 보호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는 나 빛기영.
순간적으로 이 새끼가 내 목을 날려 버리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사이코패스 살인기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성지훈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올곧은 눈빛.
신념을 가득 담은 것으로도 모자라 흘러넘칠 것만 같은 소년만화 주인공 재질.
이끄는 자들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
놈이 호기심을 느끼는 구간이 정확히 어디인지 몰랐던 탓에 일단은 선·정의 성향의 눈빛을 쏘아 보낸다.
목이 잘려져 나가는 것 따위는 두렵지 않다는 듯이, 이 한 몸을 희생하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이다.
그야말로 신념 덩어리라 할 만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야.’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절대로 우리 기영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거야.
“…….”
“…….”
아마 녀석 역시 느끼고 있을 것이다.
달빛을 따르는 자들.
그들이 따르는 달빛이 빛기영의 눈동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검이 목 바로 앞에서 멈춘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검이 만들어낸 바람이 내 뒤를 스쳐 지나간다.
순식간에 머리카락과 옷들이 흩날린다. 심지어는 몸이 뒤로 넘어갈 뻔했지만 여기에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오히려 계속해서 ‘그 눈빛’을 쏘아댄다.
‘기영이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을 거자너.’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
‘죽으면 죽었지 여기서 물러서지는 않을 거자너!’
짧은 순간이었지만 류한은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튜토리얼 때의 진 군사와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물론 올곧은 눈빛과는 별 인연이 없는 진 군사였기 때문에 후자처럼 생각하고 있을 확률은 적기는 했지만 녀석이라면 나도 모르는 공통점을 찾아줄 것이 분명했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녀석, 내 눈이 부담스러워 피하려고 한다기보다는 다른 이들의 눈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이 전장에서 함께 싸우고 있는 다른 병사들.
모두가 이쪽처럼 순수하고 정의롭고, 선한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비슷한 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질 것이다.
신념.
자신이 믿고자 하는 것을 의심 없이 믿고, 행동하는 자들의 눈빛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지속적 세뇌의 결과물이기는 했지만 이 새끼한테 그런 건 신경 쓰이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같은 목적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싸우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들의 눈빛은 모두 이쪽을 닮아 있었다.
아까의 성지훈, 그리고 주변의 병사들까지 누구에게 영감을 받고 영향을 받았는지는 뻔하지 않은가.
이 성자는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많은 부분이 다르겠지만 아마도 그 부분만은 진청과 같을 터였다.
괜스레 조용해진 장내에 놈의 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넌… 뭐지?”
“…….”
반말이었다.
“넌 도대체 뭐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이자너.’
*다음 페이지에 성지훈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성지훈 일러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