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56화
대륙전쟁(36)
미친 새끼였다.
말 그대로 이 새끼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순간적으로 우리 성검용사가 머리를 너무 많이 맞아 정신이 나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니, 어쩌면 진짜로 머리를 잘못 맞았을지도 모른다. 류한과의 싸움이 너무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 혹시 잠깐 동안 정신을 잃은 사이에 꿈이라도 꾼 게 아닐까.
‘아니, 대체… 시바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길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냐고.’
이쯤 되면 대단하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 와중에 뭐가 그리 불안한 것인지 질질 짜는 모습은 가관이다.
“흐윽…흐으으으윽… 유리엘이지?”
“…….”
“…….”
“용… 용사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 다 알아. 다 알고 있었어. 사실은 훨씬 전부터 느끼고 있었어.”
‘뭘 알아 이 새끼야. 도대체 뭘 느껴. 뭔 개소리를 하는 건데.’
“유리엘이잖아. 흐으으윽… 네가… 유리엘이잖아….”
‘너는 여기 안 넘어왔으면 라이트 노벨 작가 했었어도 됐겠다. 진짜.’
다시 한번 인간의 상상력은 끝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나도 이 새끼와의 이별을 준비하며 여러 가지 캐릭터 시트를 짜 놓기는 했지만 인간을 검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도대체 평소에 뭘 보면서 커 왔길래 이런 스토리를 뚝딱 생각해 낸 것일까.
물론 성지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야 한다. 어디까지나 억지로 끼워 맞춰 보자면 말이다.
‘유리엘이 없어졌을 때.’
갑작스레 진유가 녀석의 앞에 찾아왔고.
진유는 유리엘을 뽑아주기까지 한 상황.
심지어 진유를 만나는 것에는 윗놈들도 개입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새끼가 내게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을 확률도 높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 같은 존재였던지라, 진유는 어디에서 뭘 하고 지냈었는지, 어떻게 해서 자신과 만나게 된 것인지 궁금증을 가질 수도 있었겠지.
옥사나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했겠지만 아마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지 않았을까.
진유라는 존재는 말 그대로 어디에선가 뚝 떨어진 존재였으니 말이다.
진유는 과거가 없다. 그게 녀석이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이었을 터다. 이름 없는 형이나 알프스와는 비교적 가까운 사이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들과도 정확히 언제 만난 것인지 특정할 수 없는 상태였고, 무엇을 물어도 무엇 하나 대답해 주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던 사실이었겠지만 어느 순간에서부터 점점 확신 아닌 확신을 얻게 된 거겠지.
모르긴 몰라도 결정타는 아마 개량된 빛폭탄 물약이었을 것이다. 아니, 오늘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지금까지 의심스러웠던 것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왔을 터였다.
성자와 용사는 세트라는 것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유리엘에게서 신성력을 축출했었던 게 원인이 된 것이다.
방금 전에 일어난 그 빛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고 경외심을 느끼게 하는 빛이었지만 녀석에게는 그 어떤 빛보다 익숙하고, 친근하게 느껴진 빛이었을 것이다.
따뜻하고, 어딘가 마음이 편해지는 빛.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던 유리엘과 비슷한 빛.
내가 유리엘에게서 떨어져 나오거나 분리된, 혹은 자신을 위해 실체화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 옷에 흘러내리는 피가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얘 눈에는 이게 단순한 피로 보이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필터가 씌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녀석은 신성력과 성검의 축복을 받았으니 흘러내리는 피가 신성을 띄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는 것이다.
녀석은 진유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추측과 정황에도 불구하고,
이 새끼가 진유를 유리엘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는 건 정상이라 볼 수 없었다.
‘그냥 시바 끼워 맞추니까 이렇게 끼워 맞춘 거지. 암만 시바 별별 일이 다 일어나는 세상이지만 어떻게 인간을 검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냐고.’
이쯤 되면 그냥 진유를 유리엘로 생각하겠다고 확정을 내린 이후에 그 이유를 찾았다고밖에 볼 수가 없다.
‘아니야. 시바 은근히 예리하고 자기 객관화가 잘되고 있는 거일 수도 있어.’
평범한 사람이 절대로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베풀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1. 평범한 인간이 자신에게 친절할 리가 없다.
2. 진유는 자신에게 친절하다.
3. 진유는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라는 기적의 공식을 스스로 만들어내고야 만 것일까.
찐따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니 결국에는 본인에게 따뜻한 인간을 부정하게 되는 단계가 찾아온 것일까.
도대체 이 새끼가 왜 이러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현재 성검용사의 상태가 뭐라 말해도 듣지 못하는 상태까지 치달았다는 것이었다.
무슨 불길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결론이 지어진 것이다.
함께 보름달을 보고, 대화를 나누는 진유는 사라지고, 언젠가 유리엘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흐윽… 흐어어엉….”
‘아 좀 울지 마. 진짜.’
“흐으으으으윽. 흐어어어어어어어어엉….”
‘아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용사가 이러면 어떻게 하냐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냐고. 왜 벌써부터 이별 루트를 떠올리냐고.’
“사라지지 마. 흐어어엉… 흐으으으으어어어엉….”
“…….”
“사라지면 안 돼. 유리엘. 흐윽으으으으윽… 끄윽… 날 두고 떠나가지 않을 거지?”
“용… 용사님.”
“제발… 제발 부탁이야. 절대로 나를 혼자 두면 안 된단 말이야. 흐윽…. 끄어어어어엉….”
“용사님 일단 진정하세요.”
“버리지 마. 흐으어어엉… 버리지 마. 내가 더 잘할게. 흐으으으윽.”
‘아니, 시바 갑자기 여기서 이렇게 나라 잃은 것처럼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하냐고.’
“류한도 이길 수 있어. 흐으으윽. 전쟁도 막을 수 있다고… 흐어어어어엉….”
심지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가관, 그렇지 않아도 온몸에 힘이 빠진 상태로 있는 새끼가 자꾸 기대다 보니 내가 몸을 가누기가 힘들다.
주변의 사람들의 눈빛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실컷 용사라고 한 주제에 이리 꼴불견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그렇지 않아도 사기가 꺾인 부대에 긍정적인 신호를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예 땅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기 일보 직전인 상태였던지라 이 새끼를 그냥 놓고 도망칠 수도 없었던 상황, 때마침 나타난 알프스가 놈의 반대쪽을 책임져 주지 않았다면 이 새끼와 함께 땅바닥을 굴렀을 것이다.
‘아이 다른 애들 표정 안 좋자너. 시바.’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아마 우리 부대가 바닥을 치고 있는 것으로 비치고 있지 않을까.
이미 총력전이 시작되고 있는 상태였고, 달빛을 따르는 자들의 목표가 완전히 멀어지고 있었으니 성지훈의 멘탈이 붕괴하고 있는 것처럼 비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이미 그렇게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지훈 외에도 눈물을 훔치는 이들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달빛을 따르는 자들의 경우에는 더욱더 감정 동요가 두드러지고 있었다.
그나마 흑장미 살롱이나, 페인트 영애의 연합군들은 상황이 나았지만 남몰래 신념을 키운 우리 전사들은 성지훈에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흐윽… 흐으으으으으윽….”
“흐어어어엉….”
“흐윽….”
하는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패잔병의 모습이라고 할 만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냉정히 상황을 바라보는 이들은 있게 마련, 현재 4-1, 4-2전선 모두에서 총력전이 벌어지고 있는 만큼 공화군의 부대가 작정하고 추격대를 꾸릴 확률은 낮았지만 아군 병력도 덩치가 있는 만큼 몸을 숨길 곳이 필요했다.
다행히 페인트 영애를 비롯한 다른 영애들은 어느 정도 생각이라는 게 있는 모양.
팔레트의 연기는 위치가 특정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연기를 걷어내고, 환영마법을 캐스팅하는 루스빌라 영애가 시야에 비쳐왔다.
그 어느 때보다도 휴식이 절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간이 캠프를 만드는 이들도 보인다. 딱히 내가 이것저것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페인트의 지시였을 것이다. 척후병들을 차출해 정찰을 보내고, 4-1전선과 4-2전선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우리가 뭘 할 수 있는지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직 포기 안 했자너.’
그사이에 팔레트는 부족한 정보를 연기를 더 먼 곳까지 보내 부족한 정보를 확보하려고 하고 있었고 브러쉬는 회복이 필요한 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적어도 성검용사 외에는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없다.
‘그래. 차라리 자라. 이 새끼야.’
그나마 울고불고하다 지친 성지훈이 잠든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옆에서 페인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낑낑대며 녀석을 텐트 안으로 옮기고 있을 때였다.
“많이 상심하신 모양이군요.”
“…….”
“…….”
“네. 그 누구보다도 이 전쟁을 막고 싶어 했거든요. 저도… 그리고 용사님도요.”
“…….”
“이런 상황이 오는 것만은 막고 싶었는데… 스스로에게 많이 실망하신 것 같아요.”
‘시바 얘가 나를 검이랑 동일 존재로 착각해서 질질 짜고 있다고 설명할 수는 없자너.’
살짝 눈물을 떨어뜨려 주는 것이 맞다. 아이나 페넬로티라도 생각난 것인지, 슬쩍 내게 안쓰러운 표정을 보내는 페인트 영애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괜찮다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너무 섣부르게 희망찬 말을 전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아직은 주변 상황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제한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희망을 주는 것은 현실적인 페인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그녀가 눈에 보였다.
“…….”
“언제나 돌파구는 있게 마련이거든요.”
“어떻게….”
“제 친구가 그걸 알려줬어요. 어떤 상황에서든 포기하지 않으면, 분명히 길이 열릴 거라는 걸… 지금 뭐라고 말씀드리는 건 시기상조겠지만… 분명히… 어딘가에 틈이 있을 거예요.”
“…….”
“전쟁… 반드시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감동적이기는 하다. 인트야.’
“물론 몸을 챙기는 게 가장 중요하겠지만요. 마음은 편하지 않겠지만 일단은 편히 쉬도록 해주세요. 달빛을 따르는 자들에게, 그 용사님에게도… 당신이 필요하니까요.”
“…….”
“…….”
“네….”
“…….”
“…….”
‘근데 제대로 못 쉴 것 같은 게 문제기는 해.’
모르긴 몰라도 그녀는 쉴 수 없을 터였다. 달빛을 따르는 자들이 다시 한번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녀가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했으니까.
물론 이쪽 역시 마찬가지. 종류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나 역시 머리를 굴려야 하는 건 같았다.
어쩌면 이번이 성검용사를 강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타이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이 마지막 휴식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녀석과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거다.
다시 한번 출진하면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제대로 된 시간을 보내지 못할 확률이 높다. 전쟁이 이대로 끝나게 되면 이번 육망성도 마무리될 테니 녀석을 강화할 타이밍이 없는 셈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오히려 더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구태여 개연성이고 나발이고 챙길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선다. 녀석이 알아서 상상해 주고 알아서 가슴 아파해 주고 있는데 구태여 내가 새로운 사연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마침 유난히 밝은 보름달이 뜨고 있는 상황.
당연히 성검용사 성지훈의 바람을 들어주는 것이 연장자로서 해야 할 행동이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것이 문제.
‘진짜… 유리엘 해줘야 되는 거냐고….’
이유 모를 수치심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리엘은 오바 아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