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57화
대륙전쟁(37)
이유 모를 수치심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리엘은 오바 아니냐고….’
결단코 마음에 드는 루트는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해 봐도 진유가 유리엘이라는 것은 개연성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었으니까.
물론 성검용사 쪽에서 알아서 개연성을 충족시켜 주고 있었으니 별다른 문제가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녀석이 먼저 희망하지 않았더라면 진유와 유리엘이 동일한 존재라는 설정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쳐내버렸을 것이다.
아직도….
“유리엘… 흐윽… 끄으으으윽….”
텐트 안에서 울음 섞인 잠꼬대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는 중.
‘다시 생각해도 진짜 당황스럽자너.’
가장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이미 진유와 이별하는 그림까지 상상하고 있었던 녀석의 모습이었다.
본래 이렇게 만들어진 존재는 언젠가 그 실체가 흐릿해지는 것이 국룰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에 벌써 이별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
‘시바 일단 피하자.’
기절한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현재의 정신상태로는 숙면에 들 수 있을 리 만무, 탈진한 몸이 억지로 전원 버튼을 꺼버린 것뿐이었으니 아마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눈을 뜨지 않을까.
일단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자리를 옮긴 것은 당연했다. 어찌 됐건 간에 녀석과 마주해야 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최대한 시간을 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분위기는 또 왜 이렇게 좋냐구.’
유난히 커다란 보름달이 떠 있는 풍경, 어디인지 모를 곳에서는 희미한 소음들이 들려온다.
그사이에 4-2전선에서 병력들이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작은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비명 소리와 마법들이 떨어지는 소리, 고함 소리들이 아름다운 풍경에 녹아들고 있었다.
조금 더 시선을 멀리 돌리자 무언가가 터지는 모습도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작은 불꽃놀이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인지라 더욱더 현실성이 없게 느껴질 정도.
겨우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을 뿐인데 전쟁이라는 게 마치 딴 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콰아아앙.
하는 작은 소리가 계속해서 귓가에 맴돈다. 나 이외에도 저 멀리서 일어나는 현장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비쳐온 것은 당연지사.
괜스레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는 했지만 딱히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다.
아마 자신들 스스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우리는 뭘 위해서 싸워야 하는 것인지, 저마다 짊어지고 있는 것이 다를 테니까.
‘성지훈 이 새끼도 스스로 이겨내면 참 좋을 텐데.’
아쉽게도 녀석에게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아니, 분명히 중반까지는 있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보름달 이벤트를 벌써 수십 번 벌였고, 명대사 퍼레이드도 두어 번 갈기기는 했지만 이 새끼가 관심이 있는 것은 그저 큰 보름달을 바라보며 마음의 안정을 얻는 것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말할 때는 잘 들었었잖아. 시바. 사람들을 비춰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었잖아. 된다고 했었잖아. 우리 같이 다짐했었잖아.’
녀석에게 목표의식이라는 깃발을 하나 만들어준 것은 확실했지만 땅이 좋지 않다 보니 그 깃발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정신이 불안정하다 보니 작은 바람에도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영애들에게도 영향을 받고 용기를 얻으며 신념 1스택을 쌓다가도,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류한을 보면 금세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며 분노한다.
조울증마냥 희망찬 브금이 흘러나오다가도 이름 없는 형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슬픈 비지엠이 재생되어 버린다.
사춘기 소년마냥 감정이 오르락내리락거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평범한 고등학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일을 겪고 있었으니 혼란스러워하고, 흔들리는 것은 이해가 가기야 했지만 시바 일관성이라는 게 없어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역대급으로 상상력 풍부하고 생각도 많은 새끼자너.’
수업시간에 매일매일 이상한 상상이나 하면서 시간 보냈던 짬이 아니면 절대로 이런 바이브가 나올 수가 없자너.
큰 전투가 끝난 참이다. 류한을 어떻게 이길지, 자신이 어떻게 하면 성장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해도 모자랄 판에, 이제는 갑자기 시바 ‘유리엘 = 진유’라는 이상한 이론을 들고 와 울고불고 자빠져 있다.
아마 사람들을 비춰주는 달빛이 되자는, 전쟁을 막자는 신념은 이미 어디에 던져 버린 것일까.
그나마 아직까지 깃발이 꽂혀 있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류한이랑도 그래. 시바. 솔직히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깨질 정도는 아니었어.’
녀석도 불세출의 천재다. 물론 류한은 괴물이라는 타이틀을 받아도 모자란 강자이기는 했지만 단언하건대 결코 성지훈의 재능도 부족하지 않다.
그냥 류한의 얼굴만 보고 이런저런 감정에 휘둘려 훼까닥 개코원숭이가 되어버렸으니 녀석이 발리지 않았던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는 거다.
‘그러니까 시바 유리엘도 오락가락하는 거 아니야. 네가 중심을 못 잡으니까. 유리엘도 시바 너를 다시 인정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거라고.’
아직 스스로 유리엘도 뽑지 못하는 녀석의 한심한 모습을 떠올리자 울화통이 터지는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걸으며 괜스레 성지훈을 망원경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다.
시선이라도 느꼈던 것인지 번쩍 눈을 뜨는 녀석이 망원경 속에 비쳐왔다.
-진유… 유리엘…?
곧바로 옆자리를 확인하는 모습은 가관.
-유리엘… 유리….
막 일어나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주변을 더듬거리며 이쪽을 찾고 있었다. 마치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는 것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미 나를 유리엘로 확정하기로 결심한 새끼의 표정이었다.
-유리엘! 유리엘!!!
이미 유리엘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 모습. 불안감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인지, 갑작스레 텐트 밖으로 튀어나온다.
“유리엘!! 진유!!! 유리엘!!”
“용… 용사님?”
“유리엘 봤어? 진… 진유는 봤어?”
“저… 저는 잘….”
“어디에 있냐고!”
엑스트라 한 명의 어깨를 잡고 흔들고 있는 모습은 가관, 이제는 갑자기 또 달빛을 풍경 삼아 달리기 시작한다.
“흐윽… 흐으으으으윽….”
눈물을 흩뿌리면서 말이다.
‘왜… 왜 이렇게 킹 받는 거지?’
그냥 모르고 보면 혹시나 친구가 자신을 두고 사라졌을까 걱정하는 고등학생인데, 도대체 왜 이렇게 빡이 치는 걸까.
어쩌면 저 특유의 달리는 포즈 때문일지도 모른다. 애니메이션 속에 나오는 청춘 달리기를 완벽하게 재연한 것 같은 모습, 심지어 중간에 콰당 넘어지기까지 한다.
“으흑!”
녀석의 신체 스펙을 생각하면 절대로 넘어질 수가 없다. 물론 지금 온몸에 힘이 빠졌다는 이유가 있기야 하겠지만, 흙탕물에 얼굴을 처박는 것도 라노벨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저기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어떨까 싶었지만 뚝심 있게 고개를 쳐들고 다시 한번 청춘 달리기를 시작한 녀석.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그 특유의 올림머리가 망가진 탓에 그나마 봐줄 만했다.
“으아아아아아아!”
세상의 중심에서 우정을 외치고 싶었다는 듯이 괴성을 저지르며 큰소리를 지른다.
“진유! 지인유!”
‘와. 시바 간만에 도망치고 싶다.’
진짜 오랜만에 탈주하고 싶어진다.
술 취한 김현성을 마주하는 것보다 레벨이 한 단계 더 높다.
‘시바 우리 지금 숨어 있는 거야. 이 새끼야.’
“진유 어딨어! 진유!!! 유리엘!!! 흐윽… 유리에엘!!!”
‘제발….’
차라리 녀석에게 발견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녀석을 피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기어코 이쪽을 찾아낸 녀석이 천천히 걸음을 멈추기 시작했다.
때마침 보름달을 등지고 있었던 상황, 일단은 입을 다물고 있기는 했지만 제3자가 보기에도 왠지 모르게 인간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다.
녀석이 날 인간이 아니라고 인지하고 있었다면 아마 더욱더 신비롭게 보이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입술을 악문 채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성검용사 성지훈, 하지만 이내 천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완벽한 청춘 달리기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다.
달리다가 살짝 비틀거리며 넘어지려고 하는 것은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들다. 제발 본인을 라노벨의 주인공과 동일시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체력이 떨어진 거겠지… 내가 너무 색안경을 끼고 있는 거겠지.’
“흐으으으윽… 유리에에엘….”
마침내 이쪽을 와락 껴안는 녀석.
“흐어어어어어어어엉… 진유… 유리에엘….”
녀석의 기준으로는 감동적인 재회였다.
“사라진 줄 알았잖아아아… 흐으으윽… 사라져 버린 줄 알았잖아아아아아….”
‘시바 이거 부정하기도 힘들자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냐고 시치미를 떼기 힘들다.
“유리엘… 흐으으으윽… 미안해. 내가 미안해에….”
‘뭐가 그렇게 미안한데. 시바.’
“용사님. 진정… 하세요.”
“사라지지 마. 사라지면 안 돼. 제발… 흐어어어엉….”
기억이 안 난다고 잡아뗄 수도 없다. 마치 돼지 새끼의 설계에 외통수를 당한 것 같은 상황이었다.
“늦게 알아채서 미안해… 흐윽… 난… 나는….”
‘이거 뭐라고 설명해야 되냐.’
점점 선택지가 줄어들고 있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리고 있었던 게 불과 몇 분 전이었는데 지금은 그 경우의 수가 모조리 차단되고 있다. 뭐라고 말해도 이 새끼가 들어 처먹을 상황이 아니다.
‘와.’
“흐어어어엉… 흐으으윽…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지?”
“…….”
“다시 유리엘로 돌아가지 않는 거지? 계속 함께 있어 주는 거지?”
“…….”
“대답해 줘. 제발… 흐으으윽… 같이 있는다고 대답해 줘. 사라지지 않는다고 대답해 줘!”
결국에는 희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시바.’
처연하고, 쓸쓸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당연히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 것은 당연한 수순, 마치 정체를 들켰다는 듯했다.
“…….”
“…….”
“…….”
“들….”
“…….”
“들켜 버렸네요.”
‘시바 뛰어내리고 싶다.’
이게 맞기는 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이 목까지 차오른다.
“흐으…으으윽… 끄으으으으으으으윽….”
“…….”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에는… 이렇게 들켜 버렸네요.”
“…….”
“언제부터… 눈치채신 건가요?”
“…….”
“…….”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고는 해도, 막상 본인의 귀로 듣는 건 또 느낌이 다를 것이다. 녀석의 동공이 쉴새 없이 흔들리는 것이 눈에 띈다.
아마 녀석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애써 말을 돌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 같았던 녀석의 눈에서 폭포수 같은 눈물이 떨어진다.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호흡이 흐트러져 있다.
“거짓말이야… 흐으으으윽….”
‘아니, 시바 네가 나보고 유리엘이라며 왜 이제 와서 거짓말인 건데.’
“거짓말… 이야… 흐어어어엉….”
“용사님.”
“유리에에에엘….”
보름달이 터져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 같은 성검용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