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58화
대륙전쟁(38)
보름달이 터져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 같은 성검용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흐으… 흐어어엉어어엉….”
‘뭐 시바 세상 무너졌어? 이 새끼야?’
“흐어어어아아엉어어어어어어엉….”
대화를 좀 나눠야 할 것 같은데, 대화를 나눌 분위기가 아니다. 분명히 성검용사 성지훈이 원했던 상황이 아니었던가. 녀석이 원하고 원했던 걸 들어줬을 뿐인데 오히려 놈의 멘탈이 나가버렸다.
“그럴 리가 없어… 흐으으윽… 그럴 리가 없다고.”
‘아니, 시바.’
“거짓말이라구…. 거짓말이라고 이야기해 줘….”
‘어느 장단에 맞춰야 되는 건데. 시바.’
지금에 와서 그럴 리가 없다고, 이건 거짓말이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성지훈의 모습을 보니 제대로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어진다.
이미 온 얼굴이 눈물범벅, 시바 콧물도 흘러나오고 있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우엥거리는지 귀가 다 아플 정도였는데, 심지어 콧물 방울이 녀석의 코에 맺혀 있었다.
자꾸만 그 더러운 얼굴을 내 몸에 비비려고 하는 탓에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진 것은 당연지사.
그 와중에 본인의 몸을 가누기 힘든 것인지 반쯤 엎어져 있는 중이다. 무거운 몸을 기대와 중심을 잡기 힘들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아까 전에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지금은 더욱더 도망치고 싶어진다. 녀석이 진정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철푸덕 쓰러지지 않는 것이 다행, 장난감을 사달라 조르는 초등학생처럼 땅바닥을 기었다면 성검용사고 나발이고 당장 이 자리를 떴을 것이 분명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 흩어져 있었지만 일단은 녀석을 진정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적어도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으로 끌고 가고 싶다.
이 미친 상황을 빠르게 탈출하고 싶은 욕구가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녀석의 두 팔을 꽉 잡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손아귀에 힘을 꽉 주고 녀석의 눈을 마주친다.
처연한 미소를 선보인다. 눈동자에 가득 들어 차 있는 것은 슬픔일 것이다.
지금 엉엉 울고 싶은 것은 네가 아니라 이쪽이라는 감정을 전하는 것이다.
성검용사마냥 바닥에 엎어져 질질 짜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내가 슬프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옳다.
“아….”
“…….”
“흐윽…. 흐으으으윽….”
억지로 눈물을 꽉 참아 보이는 녀석.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모양새를 보니 따귀를 한 대 쳐주고 싶기는 했지만 지금은 성검용사를 꽉 붙잡는 것이 정답이었다.
‘울고불고하고 싶은 건 마찬가지자너. 나도 슬프자너.’
다시 한번 이쪽을 꽉 안아오는 녀석.
“흐으어…. 끄윽….”
당연히 이쪽도 흐느끼는 사운드를 놈의 귓가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녀석의 어깨는 바들바들 떨려오는 중, 다시 한번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왜 숨긴 거야….”
“…….”
“…….”
‘나도 몰라. 이 새끼야.’
“…….”
“저도 잘 모르겠어요.”
“뭐… 뭐?”
“저도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냥… 용사님과 친구가 되고 싶었나 봐요. 용사님과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그동안 용사님과 함께 지내면서 즐거웠거든요. 처음 용사님을 만난 이후에, 용사님께서 매번 말을 걸어주실 때, 얼마나 대답하고 싶었는지 몰라요. 기뻐하시거나 슬퍼하셨을 때도 얼마나 말을 걸고 싶었는지 몰라요. 게다가 처음 일어났을 때는 굉장히 혼란스러웠어서….”
아무 말이나 중얼거리면서도 이게 맞는 건지 스스로 판단할 수가 없다. 하지만 녀석의 얼굴을 보니 뭔 말을 하든 모두 받아들일 듯했다.
“아… 일부러 떠나게 된 게 아니었구나.”
“네.”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이 되어 전쟁터에 뚝 하고 떨어졌다는 설정이었다.
“분명… 그… 그놈들이 그랬던 걸 거야.”
‘아니야. 자꾸 걔네 탓으로 돌리려고 하지 마.’
“…….”
“…….”
“그, 그렇게 된 이후에는 나를 찾을 생각은 안 해봤던 거야?”
“그야. 용사님이 오실 거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어, 어떻게?”
“그냥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용사님이 절 찾아오실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만나게 된 거잖아요.”
“그렇구나.”
“용사님도 그래서 저를 찾아오신 거 아니었나요?”
물론 녀석은 그냥 윗놈들이 가라고 해서 이쪽으로 왔을 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꼴은 가관, 왠지 모르게 운명의 이끌림을 느꼈다느니, 자신도 모르게 몸이 이쪽으로 오게 되었다느니 하는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퀘스트를 받아 전선으로 향했다는 걸 이야기했다는 기억은 사라져 버린 것일까.
“끝까지 잘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용사님은 못 속이겠네요.”
“그, 그럼 당연하지. 내가 눈치가 좀 빠르잖아.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자꾸… 익숙한 것 같은 느낌이 나서… 봐. 지금처럼.”
녀석의 가슴에서 다시 빛이 반짝이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화가 난 유리엘이 시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녀석에게는 다른 의미로 비춰진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이 새끼가 결국 유리엘에게 손절당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성검인 만큼 그 정도로 속이 좁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녀석에게 성검을 다룰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 하나다.
‘내가 네 주인 사람 만들어줄게. 좀 가만히 있어.’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진짜 입에 침이라도 좀 바르고 이야기해라. 이 새끼야.’
“처음부터… 계속… 같이 있었는데… 흐으으윽….”
‘아 또 눈물 버튼 눌렸나 보다. 시바.’
“힘들 때도, 슬플 때도 항상 함께였는데. 어떻게 네가 유리엘이라는 걸… 끄윽… 모를 수가 있겠냐구. 눈치채는 게 당연하잖아. 당연히 눈치채야 하는 거잖아. 처음부터… 처음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단 말야… 흐윽… 왜 진작 이야기해 주지 않았던 거야.”
“…….”
“제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나 보네요. 그랬었죠. 언제나 함께였으니까.”
“…….”
“네, 네가 없었으면 나는 튜토리얼도 빠져나오지 못 했을걸?”
‘그래. 그것 맞는 이야기 같아.’
실제로 2회차에서는 아예 소환되지 않았거나 튜토리얼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2회차 성검용사의 쓸쓸한 최후에 대해 떠올리고 있는 중에도 녀석은 여전히 추억을 이야기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 그거 기억나? 왜, 튜토리얼에서… 완전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였을 때, 네가 살짝 빛을 비춰준 거.”
‘유리엘 은근히 충신이었나 보자너.’
“…….”
“불쏘시개로 쓴 건 미… 미안했어. 근데 그때는….”
‘근데 취급은 별로 안 좋았나 봐.’
“던전에서 내가 해준 이야기도 기억나지? 처음 다른 사람들이랑 파티 했던 건 어떻고! 그때 유리엘 네가 아니었으면 완전 죽을 뻔했었다니까. 나는 정말로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인 줄 몰랐었거든… 기억나지?”
‘아니, 기억 안 나. 시바.’
“쓰러져 잠들었을 때도, 네가 날 지켜줬었잖아.”
‘유리엘 생각보다 열심히 살았자너.’
“그… 그리고 또 이번에도….”
“네?”
“언제나 유리엘 너는 힘들 때마다 내 옆… 흐윽… 옆에 있어 줬었잖아. 언제나 곤란한 일이 생기거나 내가 흔들릴 때, 나를 잡아줬던 건 너였어. 만약 이번에도 네가 없었다면 나는 정말 견디지 못했을지도 몰라. 흐윽… 흐으으윽….”
‘그래도 확실히… 장점은 있는 것 같기는 해.’
유리엘과 녀석과의 유대감을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렇다.
물론 이미 진유 자체가 녀석의 안에 크게 들어선 것 같기는 했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가 아니었던가. 아무리 진유가 놈에게 중요한 존재로 변모했다고 해도 아직 만난 지 몇 개월도 지나지 않은 인연이다.
본래 빨리 타오르는 것은 빨리 꺼지게 마련, 일단 보름달 각인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보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 보험이 함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유리엘이라고 한다면 고개를 끄덕이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녀석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본래 이쪽에 집착하는 성향이 강하기는 했지만 유리엘과 이쪽을 동일시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아예 꿀이 떨어지고 있다. 내 말에 조금 더 무게감이 생기게 된 것이다.
‘아니지. 아니지. 이거는 그냥 이어받은 게 아니라 시너지 효과가 생겼다고 보는 게 맞지.’
아무리 녀석이 유리엘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는 해도, 결국에는 일방적인 의사소통이다. 아마 내가 유리엘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까지만 해도 놈에게 유리엘은 그냥 검이었을 확률이 높다.
진유라는 존재가 비로소 태어난 다음에야 유리엘이 의미를 찾은 것이다. 아마 녀석에게는 별것 아닌 대화들도 다시금 재평가되고 있는 중이지 않을까.
단순한 기억이 추억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새끼 눈에서 꿀 떨어지자너.’
물론 그보다는 불안감이 더 커 보였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현재의 성지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유가 계속해서 진유로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이지 않을까.
‘봐. 결국에 중요한 건 진유자너.’
계속해서 훈훈한 말들로 정신을 돌리고 있겠지만 결국 모든 것이 가장 중요한 말을 하기 위한 빌드업에 불과했다.
자꾸만 추억 이야기를 하며 튀어 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는 왠지 선수를 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도 당연했다. 지금 이대로라면 내일 까지 시시콜콜한 옛 추억 이야기만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웃으면서 호응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다시 한번 성지훈이 말을 이어왔다.
“지, 지금부터는 이제… 그냥 유리엘이 아니니까. 이제는 쭉 같이 있을 수 있고, 이야기도 할 수 있으니까. 그… 그렇지? 계속…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지? 갑자기 사… 사… 사라지거나 그러지 않는 거지?”
“…….”
“피… 피곤할 때는 가끔 검에 들어가 있어도 돼. 아, 아무래도 계속 인간 형태로 있는 건 힘들 테니까. 사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런 형태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있는 건 부담될 거 아니야. 아무리 성검이라고는 해도… 힘든 건… 흐으으윽….”
‘김현성은 울보도 아니었자너.’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와중에 이쪽의 씁쓸한 표정을 확인한 것이 분명하리라.
아까부터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점점 내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걸 확인하고 있었으니 진유와 자신의 마지막이 해피엔딩이 아닐 거라는 걸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힘든 거니까. 뭣… 뭣하면 조금 더 오랫동안 쉬어도 되잖아. 물론 기다리기 힘들겠지만… 며칠 정도 푹 쉬다 보면….”
“…….”
“흐윽…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지?”
“…….”
“그렇지? 갑자기 사라지거나 하지 않는 거지?”
“…….”
“쭉 함께 있을 수 있는 거지?”
“…….”
“…….”
“무슨 말씀이세요. 용사님. 당연하잖아요. 저는 언제나… 언제나 용사님 곁에 있을 거예요. 예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용사님과 함께 싸울 거예요.”
“흐윽….”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언제나 용사님과 함께… 함께 있을 거예요.”
아무리 멍청한 녀석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리 만무했다.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입은 웃고 있어야 한다.
기쁨과 슬픔이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계속 용사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기쁘기 그지없었지만 더 이상 진유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중요했다.
함께 보름달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게 원망스럽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계속….”
진유가 아니라 유리엘으로서.
“함께 있을 거라고요. 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