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59화
대륙전쟁(39)
“…….”
“…….”
완전히 무너지며 발작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의외로 잘 버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른스럽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역시 눈앞에 있는 진유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우효 새끼 했던 것일까.
어쩌면 앞서 울고불고하는 과정이 녀석 나름대로 이 비극적인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과정의 끝이었던 것일까.
내가 진실을 이야기를 하기 전부터 녀석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확답을 들은 것은 방금이었지만, 녀석이 진실을 깨달은 이후에 계속 슬픈 모습을 보여줬었으니 녀석 나름대로도 이 이야기의 결말을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밀려들어 오는 슬픔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는지 아까보다 훨씬 더 볼품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도 간헐적으로 떨려오고 있었고, 목이 막히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전 분명히 필사적으로 녀석을 떼어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새끼는 다시 한번 포옹을 시도해 온다.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꽈악 이쪽을 안아오는 녀석. 어깨가 흔들리는 것이 다시 한번 시야에 비쳐온다.
“흐으윽… 흐어어엉… 흐으으으으윽.”
‘뭔 말이라도 좀 해.’
“흐어어어어어어어엉….”
“흐으으으윽.”
물론 같이 울어줘야 한다. 이 새끼가 숨넘어가기 전에 내가 먼저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울어줘야 그나마 놈이 이성을 챙길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걸 앞선 경험으로 이미 깨닫고 있었다.
“언, 언제나 같이 있을 테니까… 슬퍼하지 않으셔도 돼요. 용사님.”
“흐으으으으으윽… 으응… 으으응….”
“계속 같이 있을 테니까요.”
“흐으윽… 으응….”
“…….”
“흐으으으으으윽….”
‘이런 시간이 제일 지루하더라.’
성검용사 녀석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주워 담고,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을 진정시킬 수 있는 시간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계속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뿌리며 울고 있는 시간이 참 부질없게 느껴진다.
‘한 말 또 하고, 시바 한 말 또 하고. 위로해 주고, 시바 또 위로해 주고.’
울고 또 울고, 시바 울고 또 울고, 감정 정리하는 것도 시바 몇 분으로 좀 끝내지, 뭔 몇십 분이나 쳐 껴안고 울고 있냐구.
“흐으으어어응…. 흐으으으으으으윽….”
괜스레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다.
‘은근히 어른스럽게 받아들이는 거 보니까. 이거… 이게 맞나 본데.’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수록 그렇다. 1회차에서 성검용사의 최후는 분명히….
‘1기영 때문에 성검이 그 빛을 잃고 이 새끼가 미쳐 버린 거였는데….’
성검이 빛을 잃었다고 미쳐버렸다는 게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금의 녀석을 보니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야 진유와 유리엘을 동일시하고 있었으니, 미쳐 버리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겠지.
본래는 어떤 사건 자체가 녀석의 멘탈을 흔드는 요인이었을 거라 생각했으나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아니면 어디서 객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보여주고 있는 반응을 보고 있노라면 전자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유리엘이 갑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셈이었으니까.
이 마음 약한 녀석이 그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항상 자신을 지켜주고, 바라봐줬던 존재가 어느 순간 자신에게 실망해 더 이상 힘을 빌려주지 않는 상황이 오는 걸, 멍청한 성검용사가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울고불고 질질 짜며 스스로를 망가뜨렸을 것이 분명하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를 잃은 것일 테니 말이다.
‘좀… 불쌍하기는 하네.’
혼자 검을 끌어안고 울고불고 유리엘에게 사과하거나 생쇼를 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괜한 동정심이 들기는 한다.
물론 이쪽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녀석이 안쓰러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놈이 안쓰럽다고 해서 정사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지금은 이 슬픔에 늪에서 빨리 빠져나와 조금 더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계속 여기서 시바 울고불고하고만 있으면 시간 아깝다고.’
녀석에게 꽂힌 깃발을 조금 더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던가.
오늘 이후로 쓸데없는 감정에 휘둘리는 성지훈은 과감히 삭제해야 한다.
어쩐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깃발을 꽂아 넣어야 했다. 당연히 시바 그 깃발의 이름은 진(眞) 유리엘, 사실 이미 이 시점에서부터 깃발이 꽂힌 것 같기는 했지만 일단은 이 관계를 조금 더 공고히 해야 했다. 녀석에게 더 확실한 목표 의식을 심어 줘야 한다는 거다.
마침 눈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보름달.
“저것 보세요. 용사님.”
껌딱지 같은 녀석이 내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기 위해 몸을 돌린다. 커다란 보름달을 바라본 녀석의 눈에서 이제는 말라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눈물이 흘러나오기는 했지만 저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안정되는 모양인지, 호흡이 안정되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으응….”
“처음 보름달을 같이 봤을 때, 제가 했던 말 기억하고 계시나요?”
“…….”
“언젠가 한 번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고 이야기 드렸었죠.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말로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곳에 혼자 남겨졌었다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렇게 몇 시간 동안 구해달라고 소리쳤었다는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응….”
그러다 어느 순간,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었지 아마. 하늘을 올려다보니까 오늘처럼 커다란 달빛이 보이고 있었고, 마치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안내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었다는 이야기.
사실은 길을 잃었었던 게 아니었고, 구름에 달빛이 가려져 길을 잃은 줄로만 알았다는 반전도 있었던 짤막한 스토리.
이 대륙에 있는 다른 이들이 길을 잃었다는 교훈을 전하기 위한 빌드업이기는 했지만 본래 이런 이야깃거리는 사용하기 나름이다.
애초에 검이었던 유리엘이 길을 잃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으니, 어딘가 창고에 박혀 있었다는 설정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언제 어디서나 이 이야기라는 게 정말 중요하자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지만 본래 이런 녀석들의 마음을 앗아가는 스토리라는 것은 약간의 억지스러움이 껴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사실….”
“…….”
“…….”
“어?”
“용사님께서 그 달빛이셨어요.”
“어?”
“제가 어두운 곳에 갇혀 있었을 때, 저를 꺼내준 게 용사님이었다고요.”
‘아름다운 이야기자너.’
“용사님께서는 자신이 용사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지만….”
“아.”
“진짜 용사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밖에 나가기 무서워하고, 이상한 초능력으로 나쁜 사람들을 혼내주는 상상을 하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지만….”
“…….”
“용사님은 자신한테 분명 자격이 없을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
“용사님은 처음부터… 제게 용사님이셨어요. 그 어두운 곳에서 저를 꺼내주시고, 세상을 보여주고, 함께 하셨던 날부터, 용사님은 제게 쭉 용사님이셨어요.”
“…….”
“저는 용사님이 한 번도 용사님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이제 이해되지?’
“물… 물론 가끔은, 아주 가끔은 좀 한심해 보일 때도 있기는 했지만… 용사님은 언제나 제게 용사님이셨다고요. 저는… 저는 아직도 용사님을 믿어요. 아니, 앞으로도 계속 믿을 거예요. 용사님께서 저를 비춰주셨던 것처럼, 다른 분들도 비춰주실 거라고 믿으니까요. 용사님이 저를 구원해 주신 것처럼, 다른 분들도 구원해 주실 거라고 믿으니까요.”
‘얘 분명히 구원이라는 단어 좋아할 것 같자너.’
“용사님이라면 분명히 저를 구원해 주셨던 것처럼 이 대륙을 구원해 주실 거라고 믿어요.”
“…….”
“…….”
아주 잠깐이기는 했지만 녀석이 살짝 멈칫거린다. 모르긴 몰라도 내 이야기를 받아들여 준 모양, 사실 이미 한 번 성자와 용사로 비슷한 추억을 쌓았던지라 다른 종류의 추억이 굳이 필요하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녀석의 혼란스러운 머리와 생각들을 묶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야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녀석. 그동안 보지 못했던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놈의 얼굴에는 어떤 결심이 들어서 있었다.
“나….”
“…….”
“나… 나 네가 원하는 용사가 될게. 무슨 일이 있어도, 보름달처럼 사람들을 비춰줄 수 있는 사람이 될게.”
‘그래. 그거야. 딱 그런 정신상태로 계속 뛰면 되는 거야.’
“네가 인정할 수 있는 그런 멋진 용사가 될게. 소설 속에 나오는 그런 용사님이 될게.”
‘아니. 소설 속에 나오는 용사는 되지 마. 제발.’
“그러면… 그럼 언젠가 네가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니까. 내가 그럴듯한 용사가 되고 나면 언젠가 네가 다시 나타나게 될 수도 있는 거니까.”
“그건….”
슬쩍 부정의 뜻을 비쳐 보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이런 희망이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네.”
“아, 아니면 내가 만약에 세상을 구하게 되면. 윗놈들이 소원 같은 걸 들어줄지도 모르잖아. 그때는 너를 사람으로 되돌려 달라고 부탁할 거야.”
“세상을 구하기까지 하려면 엄청 힘드시겠는데요?”
“네가 같이 있으니까. 분명히 할 수 있을 거야.”
“…….”
“…….”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분명히 할 수 있을 거야. 네가 같이 있을 테니까.”
“…….”
“무섭고 두렵지만, 분명히 할 수 있을 거야. 네가… 네가 나랑 같이 있을 테니까.”
“…….”
“더 이상 울지도 않을 거야. 나… 나는 네게 선택받은 용사니까. 더 중요한 일들이 많으니까. 지금부터는 절대로 울지 않을 거야.”
‘멘트가 하나하나 부끄럽기는 하자너.’
하지만 표정만큼은 진심이다.
꼴불견인 모습으로 질질 짜고 있었지만 분명 녀석은 진심을 담아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전에 했던 약속들, 성자와 용사로서 한 약속들도 녀석을 묶어놓는 것에 도움이 됐었지만 성검과 용사로서 나누는 약속들을 더 효과가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류한을 막고, 전쟁을 막을 거야.”
‘류한은 막으라는 소리 안 했는데?’
오글거리는 대사를 지껄이는 건 조금 부끄럽기는 했지만 적어도 라노벨 같은 감성들은 아니다. 녀석이 자신 스스로에게 약속하고, 다짐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더 이상 의미 없는 피를 흘리지 않게,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이곳을 지킬 거야.”
‘그거면 된 거야. 시바.’
“네게 약속할게.”
이미 부러지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부러질지언정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깃발이 놈에게 꽂혔다는 걸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다음 페이지에 류한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류한 일러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