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62화
대륙전쟁(42)
류한이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 정진호가 외운 주문, 피의 화살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내렸다.
‘가슴이… 웅장해진다.’
누군가 불구경 다음으로 재미있는 것이 싸움 구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곳에 온 이래로 여러 놈들이 부딪치는 걸 봐왔기 때문에 이제는 이런저런 싸움 구경에 무감각해지기도 했지만 이번만큼은 흥미가 일 수밖에 없었다.
1회 차에는 존재하지 않은 역대급 빌런들의 대격돌이었으니 어떻게 진정할 수가 있겠는가.
막말로 팝콘이라도 가지고 오고 싶은 심정이다.
‘사실… 진호 형이 발릴 것 같기는 해.’
객관적인 전투력만 보자면 아무래도 류한에게 손을 들어주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솔직히 1회차의 희라 누나가 온다고 해도 놈을 이길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다. 아무리 방심했다고는 해도 이 시점에서 김창렬의 팔을 날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진청은 녀석이 쓸모가 없다느니, 기계는 고장 나게 마련이라느니 하는 혹평을 날리고 있었지만 녀석이 강자라는 것은 진청도 부정할 수 없을 터였다.
‘근데 이번에는 상대도 만만치는 않자너.’
역대급 사이코패스 살인귀 마검사 정진호.
큰 덩치를 가지고 있어 몸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타입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사실 정진호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살인귀였다.
녀석은 결코 덩치만 믿고 설치는 바보가 아니다. 애초에 웬만한 마법사들은 우습게 만들어버릴 정도의 마법을 갖추고 있다는 게 이 새끼가 무식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투할 때의 정진호는 호랑이보다는 사냥꾼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타입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법들과 무구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줄 알고, 함정을 파거나 주변을 활용하는 것을 즐겼으며 무엇보다 심리전에서도 엄청나게 능통했다.
정면승부를 고집하는 멍청한 김현성과 류한이 붙는다면 무조건 류한의 손을 들어주겠지만, 영악하고 야비한 살인귀 정진호 대 류한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해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 시작한다.
‘봐봐. 저 새끼 눈치 빠르자너.’
원거리 견제부터 시작하는 거 보라고.
상대방을 재고 싶어 하는 느낌이 강하다. 공화국의 첫 번째 기둥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많겠지만 정작 풀린 정도가 많지 않으니 하나씩 떠보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이런 견제기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정진호 역시 알고 있지 않을까.
피로 만들어진 화살들이 이유도 없이 중간에서 터져 나가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는 모습, 이윽고 여러 가지 마법들이 녀석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흐음….
-…….
물론 다른 마법 역시 류한에게 닿지 못하고 터져나가고 있는 중, 절대 퀄리티가 낮은 마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쉽게 터져 나가고 있으니 녀석도 의아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단언하건대 정진호 역시 처음 보는 타입. 물론 성장한 검사가 마법을 파훼하는 것은 많이 봐왔었겠지만 저런 방식으로 깔끔하게 절단하는 것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정진호만 마법을 쏘아 보내는 것도 아니다. 희라 누나와 사연이 있었던 마스크를 쓴 여자와 단희영, 심지어 쌍둥이들도 녀석의 등장한 이후 곧바로 마법과 원거리 공격을 쏟아붓고 있었지만 일정 구역에만 들어가면 픽픽 소멸되듯이 쓰러지는 마법들이 눈에 비쳐온다.
언제나 그랬지만 그 여파는 류한의 옷깃에도 닿지 않고 있는 중, 그 모습을 본 여단의 전위들이 뛰쳐나가려고 하고 있었지만….
-단장?
-접근하지 않는 걸 추천드리겠습니다.
-…….
-죽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당연히 정진호에게 저지당하는 중이다. 그때 눈치 빨랐던 돼지 녀석은 이 시점에도 눈치가 빨랐는지 이미 류한에게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단장 어떻게 하지? 이대로라면 시간에 못 맞출 것 같은데….
-작전은 저를 제외하고 진행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희영 씨.
-그럼 단장은 어떻게 하게?
-곧 따라갈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이 남자와 여기서 하루 종일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요.
‘얘네는….’
다른 목표가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정진호의 탈주 선언에 갑작스레 김이 확 빠지기는 했지만 일단은 다른 여단 멤버들이 작전을 진행할 시간을 벌어주려고 하는 모양, 여단 멤버들이 뒤로 몸을 빼기가 무섭게 류한을 향해 몸을 날리는 정진호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녀석 스스로도 의아하기는 하겠지만 일단은 검을 부딪쳐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율리에나를 손에 쥔 녀석이 검을 휘두른다. 류한 역시 정진호의 검을 막아내기 위해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댄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함정이자너.’
정진호는 율리에나를 휘두르는 대신 그대로 손에 놓아버린다. 율리에나는 정진호가 휘두르는 방향이 아닌 류한의 뒤로 돌아가는 중,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은 류한의 커다란 눈이 조금 더 커지기가 무섭게 정진호는 부무장을 꺼내 들었다. 물론….
‘저것도 함정이자너.’
정진호의 왼쪽 손에 남아 있는 것은 작은 마법진, 류한의 발 아래서 뻗어져 나온 붉은색 손들이 놈의 다리를 붙잡기 위해 뻗어 나갔지만… 저것도 함정, 진짜는 무장을 고려하지 않은 초근접전이었다.
‘센스 하나는 기가 막히네. 진짜.’
확실히 녀석의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놈이 신중하고, 함정을 자주 파놓는다는 게 탄탄한 피지컬을 살리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중첩으로 파놓은 함정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진호는 한 손으로 류한의 머리를 붙잡는다.
심지어는 녀석을 땅바닥에 처박는 것이 시야에 비쳐온다.
-으직. 콰아아아아아앙!
그대로 멈추지 않고 류한의 신 머리카락을 부여잡은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그대로 녀석을 내동댕이친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유효타 아니야? 저거?’
귀를 울리는 소리, 그리고 쏟아지는 마법과 율리에나. 절대로 상처 입을 것 같지 않았던 녀석의 몸에 상처들이 쌓인다.
심지어는 어디에선가 날아들어 오는 율리에나에 뺨을 베이기까지 하는 모습.
-하!
정진호가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부무장을 붙잡고 다시 류한에게 쇄도하려고 했을 때.
-…….
-…….
-분명히… 베였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정진호의 팔과 몸에서 피슉피슉 거리며 피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아마 정진호가 류한의 머리를 붙잡았을 때부터 베이지 않았을까.
어처구니없지만 대미지를 더 입은 쪽은 정진호였다. 물론 체력 스탯을 보자면 둘이 입은 대미지가 비슷하기는 하겠지만 정진호는 본인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본인에게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갑작스레 젠틀한 모습을 선보이는 녀석. 그야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율리에나한테 베였자너.’
아주 약간이라도 상처를 남기게 되면 정신계 저주에 노출된다. 저항력이 높다면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는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율리에나의 저주를 저항할 수 있는 저항력을 가진 놈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류한 역시 정신계 마법에 의해 착란을 겪게 될 거라는 게 정진호의 판단이겠지. 상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저 저주에 더욱더 잠식되게 되고, 종국에는 스스로의 몸을 컨트롤 할 수 없을 지경까지 들어설 테니 말이다.
강자들의 싸움일수록 이런 자그마한 변수가 커다랗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막말로 지금부터 거리를 벌리며 율리에나로 견제기만 날려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가능성이 높다.
딱 하나 정진호가 예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면….
-설마…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겁니까?
-…….
류한이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저항한 것도 아니다. 애초에 율리에나의 저주는 대상의 트라우마나 불안감 같은 것들을 건드리는 종류였다.
‘무슨 인형이냐고. 트라우마 같은 것도 없냐고.’
사실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 녀석의 어두운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호흡의 흐트러짐이나 감정의 변화가 없다. 환각이나 환청을 보거나 듣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정진호 역시 녀석이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을 곧바로 깨닫는다.
어딜 봐도 탐탁지 않게 느껴지는 정진호의 얼굴.
녀석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표정이었다.
-뭐… 그래도… 피는 붉은색이니….
-…….
-확실한 건… 당신은 저희들과 같은 부류는 아니로군요.
-…….
-…….
-그게 무슨 뜻입니까?
-뭐. 말 그대로의 의미겠죠. 입단제의라도 드리면 어떨까 생각은 해봤지만… 당신에게도 제게도 별로 의미 있는 제안은 아닐 것 같습니다.
‘하다. 하다 여단도 손절하는 새끼자너.’
-어떻게… 계속하시겠습니까? 피차 여기서 오랜 시간을 쓰고 싶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
-뭐. 대화가 통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진심으로 협상이 통할 거라고 생각했냐고.’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류한이 다시 검을 빼 들고 정진호에게 접근한다.
보통 상대방의 공격을 카운터 치는 것을 즐기는 녀석치고는 꽤 이례적인 모습, 상대방이 강자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쾅!!
-챙! 콰드드드드득!
-하하… 이것 참….
-…….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피슉!
-퍼억!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는 두 사이코패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전장 한가운데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점점 주변 환경이 전투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정진호가 계속해서 마법을 사용하다 보니 방패막이 되어주는 것들이 전부 날아가 버리고 있는 것이다.
전투는 상당히 치열하고, 수준도 높다. 중간중간에 깜짝깜짝 놀랄 만한 장면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중, 우리 성검용사에게 교보재로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진짜 다시 봐도 정진호 시바 잘 싸우기는 한다.’
류한과는 느낌이 다르다. 녀석은 그냥 괴물 같은 느낌이었다면 정진호의 전투에서는 배울 점이 수두룩하다.
덫을 놓는 방식, 긴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나가는 법이나, 아이템이나 능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까지. 완벽하다는 말이 부족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것 좀 보고 배워야 하는데 말이야. 진짜 수준 높은 싸움이라는 건 이런 건데….’
딱 둘의 표정만 보이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다.
언제나 무표정으로 검을 휘두르는 류한, 심지어 정진호까지 그다지 이 싸움을 하고 싶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어차피 류한을 베어봤자 별 느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인형 같은 녀석이었으니 별로 재미가 없다고 여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전투에 임하면서도, 몸을 뺄 생각밖에 없는 녀석. 류한에게 상처라도 좀 입혀줬으면 싶었지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녀석에게 큰 상처를 입힐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심지어 본인이 점점 밀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으니 점점 거리를 벌리는 중, 검을 맞부딪치는 것보다는 마법과 율리에나로 견제를 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무엇이 본인에게 이득이 되고, 무엇이 손해인지 알 수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여기서 인형과 드잡이질을 하느니 여단과 합류하거나 병사들 몇몇을 더 죽이는 게 낫겠다 생각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결과가 조금 아쉽게 흘러가는 것 같았지만….
‘곧 출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전장의 균형은 곧 무너진다.
여단 놈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리 없었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정진호의 목소리와 함께.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땅이 무너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지반이 무너지고 있었다.
‘지하에 뭐가 있었구나.’
“용사님. 준비하세요.”
“뭐?”
“지금 움직여야 해요.”
*다음 페이지에 엘레나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엘레나 일러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