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464화 (1,462/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464화

대륙전쟁(44)

언젠가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았던 학교폭력 근절 캠페인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같이… 멈춰라고… 해줘야 되는 건가?’

모두 다 입을 모아서 손을 뻗고 멈춰! 라고 해줘야 하는 거냐고….

페인트 영애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당연지사. 물론 그 원인은 저도 모르게 급발진을 해버린 우리 성검용사 때문일 것이다.

‘이건 아니잖아. 시바.’

본래의 작전은 류한을 포함한 지휘부를 타격해 적의 지휘 체계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하는 것이 맞다. 통제할 지휘관들을 잃은 병력들이 스스로 물러나기를 유도하는 것이다.

당연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신속과 은밀, 갑작스레 우리가 왔다고 떠벌리는 건 녀석이 할 수 있는 트롤짓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트롤짓이었던 셈이었다.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걸 바라보지 못했던 것일까. 이 새끼의 젊은 혈기가 가만히 있는 것을 거부했던 것일까.

물론 땅굴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봐왔으니 꾹꾹 눌러 담아왔던 감정이 터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무리수를 던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앞선 두 번의 멈춰로는 부족했는지 신성력을 있는 대로 담아 다시 한번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녀석,

“전쟁을 멈춰!!!!!!!!!!”

더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뭔데… 왜 다들 멈추고 있는 건데.’

저게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뭔 상황인 건데….’

이게 왜 효과가 있는 건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1회차에서 전쟁 근절 캠페인이라도 벌였던 것일까.

“멈춰!!!!!!!”

모두 다 멍하니 땅굴에서 튀어나온 성검용사를 바라보고 있다.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채로 검을 휘두르고 있던 병사도, 동료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있었던 이들도, 모두다 멍하니 성지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무기를 떨어뜨리는 이들도 시야에 비쳐온다.

당황스러움에 헛웃음이 나오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니 마냥 황당한 상황도 아니다. 물론 성검에서 뿜어져 나온 환한 빛이 전장 전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는 게 그나마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 정도면 다들… 멈추고 싶었던 거 아니냐고….’

그렇지 않아도 체력적으로 한계를 맞이한 상황이었다. 피와 땀에 젖고, 더 이상 움직이기 힘든 몸으로도 검과 창을 휘둘렀던 병사들이다.

모두가 나라와 가족을 위해 검을 들고 있던 이들이었을 터, 성지훈으로 인해 그들 역시 갑작스레 깨달은 것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이 전쟁에 명분 따위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어째서 싸워야 하는 것인지, 어째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인지, 어째서 죽어야 하는 것인지, 그 의미를 찾지 못하는 있는 이들이 대부분, 어쩌면 모두가 자신들을 말려 줄 누군가를 기다려 왔을지도 모르겠다.

성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환한 빛을 뿌리고 있는 용사가 전쟁터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서둘러 페인트 영애를 비롯한 전투원들에게 메시지를 전한 것은 당연지사.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으니 일단은 보험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거 진짜로 될 수도 있겠는데?’

“웃… 웃기지 마! 저… 저 개새끼들이! 내 동료들을 죽였어! 이대로… 이대로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겁먹은 개가 크게 짖는 법이자너. 싸우고 싶으면 싸우면 되지. 굳이 지훈이한테 왜 결재를 받으려고 하냐고.’

“그… 그래! 이대로 멈추라고? 개 같은 소리!”

‘말려달라고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죠?’

아까 전에 있었던 폭발로 인해 이미 상당수의 지휘관들이 죽었다. 아니, 남아 있는 이들 역시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이 싸움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야 서로 죽고 죽이고 서로의 전력만 깎아내리고 있었으니 전술적으로도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닐까.

쉽게 타오른 만큼 쉽게 열이 내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몇몇이 무기를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성지훈 녀석은 계속해서 환한 빛을 뿌리는 중, 저게 효과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분명했다.

다들 저 새끼가 누군지, 어디서 올라온 새끼인지 관심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은 듯한 모양새.

일단 빛을 뿌리고 있으니 대충 넘어가게 되는 것일까. 물론 성지훈은 계기에 불과하다. 병력들은 빛이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난 참극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피와 혈육으로 범벅이 된 지면과 비참하게 죽어 있는 시체들, 방금 전까지 여기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뜨거웠던 전쟁터가 술자리가 파투나는 것마냥 애매모호해지기 시작한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들은 굳이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일단 똑똑한 새끼들부터 빠지겠지.’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공화국이나 연합에 소속된 이들이 아니라 돈을 받고 고용되거나 이해관계에 얽혀 전쟁에 합류한 집단들이었다.

“우… 우리 용병단은 빠지겠다.”

“…….”

“너무 많은 동료들이 죽었어. 계약은 파기다. 어차피 우리 용병단은 끝난 셈이니… 이전의 계약이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 우리 길드 역시… 여기서 빠지겠네….”

“뭐… 뭣! 웃기지 마. 이렇게 전쟁을 끝낸다고? 누구 마음대로! 지금 후퇴하면 명령불복종으로 사형이다! 이런 배신행위가 용납될 수 있을 것 같아!”

“전쟁을 지속하고 싶거든, 자네가 먼저 앞장서게나. 지금 이 모든 걸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느끼는 게 없는 겐가?”

“뭐라고!”

“우리도… 더는 이곳에서 싸우지 않을 거다. 만약 싸우고 싶다면 4-1전선으로 향해 제국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는 걸 추천하지.”

공화국 진영에서도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 물론 제국과 왕국연합에 비하면 단일화된 군대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녀석들조차 떠나는 이들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팔을 내리고 흑장미 살롱과 달빛을 따르는 자들에 합류하는 이들도 시야에 비치기 시작, 정말로 전쟁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이들이 눈에 띄고 있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이게 여기서 끝나리라는 보장은 아무도 없자너.’

병력들 대부분이 전의를 잃기는 했지만 불이 완전히 꺼진 것도 아니었다. 아주 자그마한 불씨 하나로도 다시금 타오를 수 있는 게 현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전쟁을 끝내고 싶지 않아 하는 세력이 분명히 존재한다.

애초에 이곳에 혼란을 불러일으켜 온 놈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슬그머니 망원경을 돌린 것은 당연지사. 병력들이 조금씩 조금씩 눈치를 보며 흩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놈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저건… 뭐야?

-이거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생겼네요. 조금 더 재미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머리에서 연락은 없었나요? 희영 씨?

-아직 없습니다.

-단장은 왜 이렇게 안 돌아오는 건데. 그놈 꽤 강해 보였는데 우리 단장… 괜찮으려나.

-뭐… 어디 가서 쉽게 죽을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은 단장보다, 저걸 어떻게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방금 전까지 서로 죽일 듯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뭐 하고 있는 짓 인지… 그리고 저 빛은 또 뭡니까? 대체… 어디서 성자라도 나타나서 전쟁을 말리고 있기라도 하고 있는 겁니까?

-이상해.

-응. 나도 동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희영 씨.

-…….

-…….

-큰 주문을 하나 떨어뜨려 주면 곧 알아서 싸우기 시작할 겁니다.

‘그래.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게 그거였어.’

-휴전이라는 건 상호 동의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렇네? 우리는 아직 휴전에 동의한 적이 없잖아.

‘일단 저건 막아야 될 것 같자너.’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지라 타이밍을 맞출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전에… 이쪽에 찾아온 불청객을 먼저 처리해야 될 것 같습니다만….

-누가 와 있어?

-투명화 마법입니다. 숫자는… 16명, 아니, 17명, 18명… 정도… 4년 전 데뷔탕트의… 생존자들로 보이는군요.

‘18명?’

서둘러 주변을 둘러본 것은 당연지사.

‘뭐야. 다 어디 갔어?’

페인트, 브러쉬, 팔레트, 함가드리아, 라이넬피아, 루스빌라, 그리고 데뷔탕트 때 같이 싸웠던 영애들 전원.

‘어디로 간 건데.’

지금 이 자리에 보이지 않는다. 페인트 영애에게는 전쟁이 끝나지 않기는 바라는 이들이 주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전해준 것뿐이었다.

보험 삼아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힌트도 전해주기는 했지만 그게 페인트 영애도 함께 떠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적을 생포하거나 죽이는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억제하기 위해서였으니 말이다.

적당히 병력을 붙여 작전에 임할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건 내 희망사항에 불과했던 모양, 데뷔탕트 무도회 당시 생존해 있던 영애들을 전부 데리고 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당연지사. 어째서 영애들이 전부 떠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4년 전? 데뷔탕트?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왕국연합에서 말입니다.

-아아아아… 그때였구나. 우리 머리가 송정욱 죽이러 갔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여단원들 사이로,

가장 먼저 뛰어든 것은 함가르디아 영애였다.

-콰아아아아아앙!

거대한 대검을 들고 점프를 하며 키가 큰 멀대 녀석을 향해 내리찍었지만 녀석이 쉽게 공격을 허용할 리 만무했다.

순식간에 몸이 흐릿해지는 녀석, 이윽고 무방비 상태에 있던 함가르디아 영애를 향해 기형적인 무기를 휘두른다.

-쾅!!!

어느새인가 투명화 마법이 풀린 라이넬피아 영애가 방패를 든 채로 모습을 드러낸다.

-너희였구나.

라는 말을 남기면서 말이다.

-뭐야? 너는.

-너희였어.

이윽고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페인트 영애가 라이넬피아 영애의 말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

-…….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었는데…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참 길었네요. 4년. 참 긴 시간이었죠. 참…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는데… 4년 동안… 정말로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죠.

어디에선가 파스텔 영애가 연기를 내뱉는 소리가 들려온다.

-쓰으으으읍… 후우우우우우우….

-그동안 지옥 속에서 살았는데… 아니, 우리 모두가 지옥에 있었다는 말이 더 어울렸겠네요. 조금 힘들었거든요. 여기저기 흩어져서 당신들을 찾기 위해 보냈던 시간만 3년이에요. 얼마나 용의주도한지, 꼬리조차 밟히지 않더라고요.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어디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건지, 도무지 잡히지 않아서…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있었답니다.

-쓰으으으으읍. 후우우우우우우우우우….

연기들이 점점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결국은 이렇게 만나게 됐네요. 상황이 좀 좋지 않기는 하지만… 또 제가 준비한 무대는 아니었지만… 어찌 됐건 간에… 겨우… 이렇게 만나게 됐어요. 정말로 많은 친구들을 잃기도 했었는데… 하하… 모두 다 함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후우우우우우우우우우….

-살인여단.

-쓰으으으으읍.

-이미 확인할 것도 없지만… 당신들에게 묻겠습니다.

-…….

-4년 전,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벌어진 일들… 당신들 짓이었죠? 제국에서 일어났었던, 청소사건의 생존자를 포함한 여단원 전원, 목적은 청소사건의 주모자였던 작은 바위의 송정욱을 포함한 다른 요인들에 대한 암살과 대륙에 전쟁과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

-글쎄?

-…….

-그런 일들이 많아서 전부 기억할 수 없는데 말이야. 히힛.

‘진짜 전형적인 대사자너.’

페인트 영애를 놀리는 듯한 마스크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가 봐도 도발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단희영은 굳이 이 자리에서 전투를 지속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아마 여기서 영애들과 드잡이질을 하는 것보다는 임무를 완수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거겠지.

-물러나십시오. 이곳에서 당신들과 상대하고 있을 시간은 없습니다.

-그럴 리가요. 이렇게 겨우 만나게 됐는데… 그냥 물러날 수 있겠어요?

껄렁해 보이는 양아치 한 명이, 단희영의 뒤를 이어 페인트에게 말을 건넨다.

-다 알고 왔다며? 도대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야?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건가?

‘멍청한 질문.’

목적이야 뻔하지 않은가.

기다렸다는 듯이 페인트 영애가 입을 열었다. 지금 것 본 적이 없었던 죽어버린 눈으로 말이다.

-…….

-…….

-복수.

-…….

-복수하러 왔어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