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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468화 (1,466/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468화

대륙전쟁(48)

물론 단순한 웃음이 아니다. 마치 태초로 돌아간 듯한 순수함을 담은 웃음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생명들이 꺼지는 것을 보는 게 무척 기쁘다는 듯, 정진호가 벌인 일들에 대해 순수한 감탄과 기쁨을 보내는 것이 중요했다.

딱히 다른 말을 덧붙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렇게 저렇게 부연 설명하는 건 넘 추하자너.’

적어도 녀석이 이미지하고 있는 죽음과는 어울리는 행동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시점의 정진호는 어린 죽음의 존재해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녀석이 어린 죽음에 대해 깨닫고 죽음을 신봉하게 되는 것은 녀석과 여단의 죽음 끝에서였지만, 지금은 이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어린 죽음과 만나고, 그와 소통하고, 그와 교류하기 전 동화 같은 이벤트가 하나 들어가는 것이 개연성을 딱히 해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결단.

아니, 어쩌면 이번 이벤트 역시 녀석에게 꼭 필요한 이벤트일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1진호와 처음 마주쳤던 순간을 떠올렸던 것은 당연지사.

생각해 보면 녀석이 너무 쉽게 이쪽의 요구에 응한 것 같다는 느낌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야 그때 당시에 녀석은 전 대륙에게 쫓기고 있는 입장이었고, 지쳐있었으며, 비빌 언덕이 라파엘과 나를 비롯한 정체불명의 집단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너무나 쉽게 이쪽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놈은 덩치와는 다르게 용의주도하고, 심계가 깊다.

더 죽이고 싶지 않냐고, 이제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모른다고 물었던 도발 아닌 도발이 먹혀들었을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정진호가 이쪽의 제안을 받아들인 결정적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분명 녀석이….

‘뭐… 따로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저희도 저희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고…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결과는 같을 텐데…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들었습니다.’

라고 했었나.

갑작스레 나타난 정체불명의 소년에게 신뢰를 보내는 이유로는 합당하다 볼 수 없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이쪽의 피를 받아 마신 것만 봐도 그렇다. 다른 여단원들을 실험용 쥐로 사용하지도 않고, 녀석이 가장 먼저 거리낌 없이, 이쪽의 피를 받아 마신 것으로 기억.

내 피를 담은 포션 병을 받았을 때, 조금씩 조금씩 떨리던 녀석의 손이 괜스레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진화를 마친 이후에 가장 처음 내뱉은 말은….

‘하…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있었다니… 정말로 있었다니!! 하하하하하하하하!’

그 직후에는….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핫! 드디어! 드디어! 보답받았다고!!’

뭐가 있었다는 것인지, 뭐에 보답받았다는 것인지는 이해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 개연성을 지금 만들어주는 것도 딱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게 꿈이나 환상, 환각처럼 느껴져야 한다는 것. 너무 많은 정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 녀석과 너무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황당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와중 다행이었던 것은….

녀석이 내 생각보다 더 감성적인 인간이라는 것.

물론 정진호가 의외의 감성파였다는 것은 이미 깨닫고 있는 바였지만… 이 새끼의 감성이 충만해지면 셰익스피어에나 나올 것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미친놈이라는 사실도… 이미 깨닫고 있는 바였지만….

‘표정이 너무… 너무… 이상하잖아.’

녀석의 얼굴을 보니 소름이 끼쳐온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 얼굴.

자신의 두 눈을 비비고 있다. 이게 현실인지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쉬이 눈앞에 있는 것들이 사라지지 않자 놀이동산에라도 온 것처럼 입꼬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래. 분위기 죽이기는 해. 이거 어떻게 봐도 현실이 아니자너.’

녀석에게 쓸려나간 패잔병들도 눈앞에 있는 걸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으니 말이다.

아마 정진호에게는 더욱더 꿈 같은 광경처럼 보였을 터다. 코를 찌르는 혈향 때문에 정신이 멍해질 지경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굳이 혈향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로 독한 냄새가 코를 찌르게 되면 본래 정신이 멍해지게 마련이다. 남들보다 감각이 수백 배나 예민한 초인이라면 더욱더.

후각을 차단해도 모자랄 판에 녀석은 아무 거리낌도 없이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는 중, 심지어….

‘뭐야. 시바 저 새끼….’

흥분했는지 얼굴이 붉어져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심지어는 시바… 시…바….

‘미… 미친 새끼….’

아니, 터벅터벅 이쪽으로 걸어오는 녀석.

‘뭐야. 왜 오는 거야. 뭐 어쩌게.’

무기도 손에서 놓은 채로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다. 철퍽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발이 피 웅덩이 호수에 담긴다.

움직임이 마치 종교행사라도 뛰는 교황 같은 모양새였다.

놈이 발버둥 치듯이 팔을 뻗는다. 연극을 하는 것도 아닌데, 저 새끼 혼자만 무대 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뭐야. 오지 마. 와서 뭐 어쩌려고.’

“아… 아아아….”

‘이상한 소리 내지 마.’

소름 끼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싶어진다. 솔직히 지금 당장 날개를 뻗어 하늘로 솟구치고 싶어지기는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 만무, 오히려 녀석을 환영한다는 듯이 날개를 활짝 펴는 것이 옳은 선택지라는 판단이 선다.

힘 있게 날개를 뻗자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이리저리로 튀기 시작, 그렇지 않아도 피를 머금은 날개라 움직이기 힘들다.

쥐가 날 뻔하기는 했지만 비주얼 이펙트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녀석이 한 발 더 다가오기 무섭게 살짝 손을 들어 올린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제스처였다. 저 이성을 잃은 미치광이 사이코패스가 내 제스처를 읽을 수 있을지 걱정되기는 했지만 다행히 천천히 몸을 멈추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안 돼. 너무 가까이 오면 안 된다고.’

붕대로 얼굴을 대충 감기도 했고, 여기저기에 피가 묻어 있었지만 내 얼굴을 자세히 본다면 1기영과의 연관성을 의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이유보다 그냥 이 새끼가 내게 다가오는 것 자체가 소름 끼친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지만 뭐가 됐든 간에 정진호가 내게 가까이 오는 것은 환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

“…….”

“아직은….”

“하… 하하….”

“아직은 때가 아니에요.”

“…….”

“언젠가… 당신이 끝에 섰을 때. 지금과는 다른 제가 당신을 찾아갈 겁니다.”

“넌… 넌… 뭐지….”

‘나도 몰라. 이 새끼야.’

이럴 때는 그냥 아무 말이나 하는 게 정답이 아닐까.

“저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가장 어둡고, 가장 밝은 무언가. 여러 가지 형태로 자리하지만, 어떤 형태도 아니한 존재.”

‘우리 성검용사가 진짜 미친 듯이 좋아할 것 같자너.’

개소리 중에서도 월클급 개소리였지만 눈앞에 있는 녀석은 그 개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중.

슬쩍 신성을 뿜어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 개소리에 힘을 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솔직히 먹힐 거라고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미친 사이코패스는 한층 더 진지해지고 있다.

다시 한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표정은 가관, 몸을 바들바들 떨기까지 하고 있었다.

“제가, 저희가, 우리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기억해 주세요.”

‘대화는 이걸로 끝내야 돼.’

더 이상 접촉하는 것도 그다지 반갑지 않다. 마치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이렇게 녀석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옳다.

하지만 정진호는 이대로 헤어지는 것이 반갑지 않은 모양, 다시 한번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무기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배때지에 칼이 찔릴 걱정이 없기는 했지만 저 커다란 손으로 목을 부러뜨려도 이상하지 않다.

‘겁먹으면 안 돼. 시바.’

단호해져야 돼.

“그만.”

우뚝.

“…….”

“…….”

“아직 당신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으니….”

접촉하면 죽는다는 복선이었다.

“언젠가….”

“언젠가….”

“…….”

“네… 언젠가는….”

“…….”

“…….”

‘제발 꺼져… 진짜. 제발 부탁이야.’

“…….”

‘내 마지막 소원이야. 시발 제발 사라져. 이 미친 사이코 새끼.’

“…….”

‘빨리 꺼져. 진짜. 당장 안 꺼져? 제발 사라져 이 소름 끼치는 새끼야.’

[언젠가는 당신은 보답받을 것입니다.]

도대체 몇 분이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움직임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당연히 이쪽은 녀석을 신경 쓰지 않는다. 멍하니 한곳을 응시하거나 피 웅덩이 호수에서 물장구를 치거나 날개를 가끔 움직이거나 하는 상호작용만 보여주는 것이 옳다.

마치 지금의 너는 자격이 없으며, 나는 너를 신경 쓰지 않겠다는 모먼트로 말이다.

‘제발… 제발….’

“…….”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난 직후, 녀석이 천천히 발걸음을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시바. 됐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다. 아직도 이쪽에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중.

여단원 쪽으로 가지 말라 충고하는 척해야 하는 건지 고민이 되기는 했지만 다행히 녀석은 여단원들에게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지금은 그저 달아오른 몸을 식힐 생각밖에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 당장에라도, 누가 되더라도, 마주치는 인간들을 찢어 죽일 것 같은 표정이다.

그래도 여단원들은 죽이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조금 더 축제에 함께하고 싶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정진호는 아까보다도 더 빠른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흐… 흐…하….”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오는지 손으로 입을 막은 채로 이동하고 있는 녀석.

“흐…히…하하하하하하….”

하지만 그마저도 참지 못하겠는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진짜 저 새끼랑은 상종하기도 싫자너….’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족쇄가 풀린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굶주려 보이는 녀석이 다시 한번 패잔병 무리와 마주친다.

‘제일 불쌍하신 분들이네.’

그 뒤로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 사실 보지 않아도 뻔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돌리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마구잡이고 적들을 베어버리는 녀석, 이전과 다른 차이점이 있다면 훨씬 더 야만적이었다는 것이었다.

손으로 사람을 부수고, 찢고, 여기저기에 과시하듯이 피를 흩뿌린다. 잠깐이었지만 마치 피의 비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으아아아악!”

“씨발… 씨발 뭐야!!! 으!!!”

“살… 살려줘… 살려아아아아아아아악!”

“흐….”

“아아아아아아아악!”

억지로 본인의 얼굴과 몸에 피를 묻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입안에 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있다.

크게 웃으며, 저 멀리서 전장의 소음이 들려오는 곳으로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다시금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녀석, 당연하지만 녀석이 돌아본 곳에는….

‘아무것도 없자너.’

기형적인 형태로 만들어진 신전도, 피 웅덩이 호수에서 물장구를 치던 소년도, 사방에서 흩뿌려진 피와 내장, 혈육도, 사라져 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마치 본인이 꿈이라도 꾼 것은 아닌가 하는 듯한 얼굴이 망원경 속에 비쳐온다.

딱 이쪽이 원했던 반응이었던지라 괜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될 정도, 녀석은 자신이 본 것이 초월적인 어떤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굳이 다시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걸음을 옮기지도 않았으니까. 아마도 확신하게 되는 것은 녀석이 죽음을 앞두었을 때가 아닐까.

녀석이 어떻든 간에 일단 이쪽의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을 해결한 셈이었다.

‘일단 가장 큰 건 해결했어.’

몸을 식히려면 한두 명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을 테니 한참은 전장에서 놀고 있을 거라고 본다.

정진호는 이성적이었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만류할 수 없는 미친놈으로 변태하는 녀석이었으니까.

‘다음은….’

-부길드마스터.

-네? 네?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는 상황,

곧바로 망원경을 켜고 김창렬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김창렬이 자리한 곳은 4-1전선. 그리고 녀석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

“…….”

“현성아….”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전쟁터를 바라보는 김현성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다음 페이지에 정진호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정진호 일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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