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69화
대륙전쟁(49)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가장 눈에 띈다. 조금 초췌한 모습도 함께 말이다.
‘시바 내 새끼…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그야 물론 잘 먹고 잘살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더 여윈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집을 나가 길을 잃어버린 반려견의 모습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언제나 반듯한 모습을 유지했었던 피부는 수분이 다 빠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입술도 완전히 마른 것처럼 보인다.
‘그 발언’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어 가만히 있다가도 분노가 치솟아 오르기는 했지만, 역시나 녀석도 회사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모양새.
그야 가깝다면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반짝이지 않는다는 것은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점점 더 흐릿해지고 있다는 방증이나 다름없다.
아마 그 누구보다도 김현성이 그 사실을 실감하고 있을 게 틀림없을 것이다.
조금은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는 표정과 자꾸만 한쪽 눈을 쓰다듬는 행동 따위에서 김현성이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끊어지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당연히….’
괜스레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을 때, 다시 한번 김창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장은 떠나실 것 같지 않아 일단은 거리를 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미켈레 박사는….
-아니, 잘하셨어요. 일단은 접촉하지 않고, 자극하지 않고, 해당 거리를 유지하는 데 집중해 주세요.
-네.
-연수 씨나, 희영 씨를 비롯한 작전참가 인원들에게도 전부 대기하라고 전해주시고요.
김창렬의 말대로 당장은 4-1전선을 떠날 것 같지 않은 모양새. 녀석은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전선 전체를 관망하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김현성의 옆에 자리하고 있는 젊어진 미켈레 박사도 시야에 비쳐온다.
젊었을 적 좀 먹어줬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기생오라비 느낌이 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외적으로 변한 것은 단순히 나이 정도밖에 없는 것 같았는데, 조금 더 속을 들여다보자 안쪽에서 뭔가 특수한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무언가의 수혜를 받은 것이 틀림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악마 수혜자 새끼였자너.’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우연치 않게 눈먼 마법이 그쪽으로 떨어지자 김현성이 한쪽 팔로 미켈레 박사를 향해 쇄도하고 있는 마법을 쳐내는 것이 시야에 비쳐온다.
‘아주 시바 기사님 나셨네요. 멋지셔. 키야… 아주 멋지시네. 김현성 이 개새끼.’
쉽사리 녀석을 자극하는 건 지양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저도 모르게 메시지를 보낸 것은 당연지사.
어차피 손거울은 가지고 있지도 않은 녀석이었지만,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통신 채널이 존재하지 않는가.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현성 씨.]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어?’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현성 씨 지금….]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야. 안 받냐?]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시바 차단했어?’
몇 번을 해도 의미가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퀘스트를 보내고 있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진짜 차단했어?’
자신에게 오는 퀘스트 메시지가 오는 통로를 차단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수밖에 없는 상황, 설마 김현성이 날 차단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더 당황하게 된다. 몇 번을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이 개새끼… 이… 이 개새끼! 은혜도 모르는 새끼!’
멀지 않은 곳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당연히 고개를 돌리게 된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제기랄! 한 명 더 죽었잖아!!!
-죽은 놈이 잘못.
-동감. 연기가 까다롭기는 하지만 잡힐 정도는 아님.
-나를 지켜줄 방패막이들이 사라지는 거라고!
‘진짜 시바….’
-괜찮습니다. 뭐… 몇 명 죽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게다가 아까 그분과는 다르게 유의미한 죽음이라고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저분들이 복수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달려오신 것도, 단기간에 이렇게 눈에 띄게 강해졌다는 것도 전부 신기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체력적인 면은 아직 보완하지 못하신 것 같으니까요. 아마 슬슬 지쳐가고 있을 겁니다.
‘진짜… 시바.’
지금 당장 김현성에게 달려가고 싶다.
당장 달려가서 뺨따구를 한 대 시원하게 갈겨주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중,
-흥. 뭐 그렇게 보이기는 해. 아무래도, 이런 투명화 마법을 하루 종일 사용할 수는 없을 테니까. 연기도 마찬가지고. 공격들도 예리함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것 같거든… 귀찮기는 하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우리가 유리한 건 사실이지 뭐.
-…….
-하지만 그게 짜증 난단 말이야! 별것도 아닌 마법인데. 제길… 네놈들이 협조를 안 하니까. 어쩔 수는 없겠지만… 아아아아아악! 짜증 나! 나도 몰라! 시발! 다른 건 다 괜찮은데! 투명화 마법 쓰는 년은 건드리지 마! 죽이지도 말고! 너 말이야! 듣고 있지?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평생 실험실에서 괴롭혀 줄 테니까! 차라리 죽여 달라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괴롭혀 줄게.
-그 실험실 이야기 좀 안 꺼내시면 안 됩니까? 구역질 나온단 말입니다.
-마도의 발전을 위한 유산이라고! 온… 온다!
-콰아아아아앙!! 콰드드드드드득!
-연기 속으로 숨기 전에 빨리 붙잡아! 숨으면 다시 투명화 마법을 받고 나타날 테니까!
-어차피 그것도 슬슬 한계 아닙니까? 캐스팅하는 속도도 느려졌고… 마력도 쥐어 짜내고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칫! 조금 위험했네요.
-우리한테 맡겨. 일단 아무 곳이나 쏴보자!
-그래!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여기저기서 흙먼지와 함께 폭음 소리가 들려오는 중, 기어코 참지 못한 쌍둥이들이 사방에 광역기를 쏘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순간적이었지만 지역을 완전히 쓸어버리는 듯한 화력, 쌍둥이들의 공격에 여단 측도 피해를 입은 것 같기는 했지만, 아마 영애들보다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연기와 방어마법으로 최대한 방어를 했는데도 이 정도, 순간적으로 커다란 마력을 소비했으니, 투명화 마법에 사용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천천히 윤곽이 드러나는 영애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꺄아아아아아악! 잘했어! 쌍둥이들!
-제길… 제 왼쪽 팔이랑 왼쪽 다리가 전부 타 버리지 않았습니까!
-당한 쪽이 멍청한 거야! 어때? 귀족영애님들 이제 좀 느낌이 와?
-아니, 애초에 계속 숨을 생각도 없었으니까요.
-하! 허세 부리기는!
당연히 다른 전술, 수십 가지 작전이 더 남아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영애들을 향해 달리고 있는 돼지. 함가르디아 영애는 키가 큰 멀대와 평범한 놈과 대치하고 있다. 탱커 역할을 하고 있는 라이넬피아 영애와, 검을 든 다른 영애들도 보이기는 했지만 애초에 조합 자체가 정면승부를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마법사들의 비율이 높은 것이 바로 그 문제, 지금까지는 연기로 전위들을 대신하고 있었지만 마력이 떨어지는 순간, 순식간에 전열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지금까지 버텨왔던 게 거짓말처럼 말이다.
‘제길….’
한참 전에 했던 고민이 다시금 떠오른다. 이미 결정을 내리기는 했지만 실제로 김현성이 모습을 드러내자 발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다. 이를 악물고 영애들에게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던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쳐온 것.
다시 한번 앞을 바라보자 흩날리고 있는 투톤 머리카락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파스텔.”
그녀가 말도 안 되는 성장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엄청나게 빠른 속도, 이를 악물고 있는 파스텔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왜 저렇게 빨라.’
무투술, 그중에서도 발차기가 특기였으니, 그녀의 각력을 생각하면 저런 속도가 이상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게 된다. 애초에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생기기는 했지만 이유야 뻔하지 않을까.
입으로는 아이나 페넬로티의 곁을 지킨다고 말하기는 했었겠지만 전쟁터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음이 분명, 커다란 폭음과 함께 지면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것이지 않을까.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서로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아티팩트가 있었겠지.
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척이나 필사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잠깐 동안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연기로 가려진 곳을 쫓고 있었다.
혹시나 다른 친구마저 잃어버릴까 하는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거칠어진 호흡, 눈물이 맺혀 있는 눈동자. 복잡해 보이는 표정, 후회와 두려움. 그리고 각오.
‘굳이 가서… 정리해 줄 필요 없겠는데.’
영애들에게로 향하려는 발걸음을 돌린다. 김현성에게 향해도 될 것 같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물론 시선은 여전히 그녀들에게 고정한 것은 당연지사. 예상했다시피 영애들의 대열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이미 함가르디아와 라이넬피아를 뚫고 들어온 멀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영애들은 계속해서 캐스팅을 외우며 녀석에게서 떨어지려고 하고 있었지만 녀석의 기형적인 무기를 피할 수 있을 리 만무, 그나마 서브 탱커 역할을 하고 있는 한 영애가 이를 악물고 녀석을 붙잡으려고 하고 있었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아 보인다.
키 큰 멀대의 목표는 당연히 흑장미 살롱의 머리.
누가 이 작전을 주도하고 있는지 깨닫고 있었을 테니 현명한 선택을 한 셈이었다.
-페인트!!!
‘살짝 쫄리기는 해….’
그리고.
-퍼어어어어어어억!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를 뚫고 들어온 파스텔의 발차기가 놈의 안면에 틀어박힌다.
혹시나 페인트를 걷어차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지만 제정신은 지키고 있는 모양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다리에 깃든 힘이 상상 이상인지, 왼쪽으로 한참을 날아가던 마른 멀대가 벽과 나무에 부딪힌다.
-후우… 후우… 후우….
-파… 파스텔…?
-후우….
-파스텔!
-파스텔!!
-후우… 후우… 허억….
파스텔 영애가 페인트 영애를 바라본다.
-…….
-…….
그리고 멈칫거리는 파스텔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그녀가 상상하던 페인트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화상으로 뒤덮인 얼굴, 푸석푸석한 머리카락과 형편없이 마른 몸.
자신이 지금까지 오해 아닌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차마 입을 벌리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본다.
-…….
-…….
-뭐야….
-파스텔….
-…….
-…….
-뭐야… 그 모습은… 너….
-…….
-뭐냐고! 물었잖아!
-…….
-차라리… 차라리! 보란 듯이… 잘 지내든가… 보란 듯이 성공하든가… 그 모습은… 뭐냐고….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김현성 백작이랑 결혼이라도 하라고… 질투 나서 미쳐 버릴 것만큼… 잘살기라도 하든가… 그래야… 그래야 내가 널 원망할 수 있는데… 그래야! 너한테 욕이라도 해줄 수 있을 텐데… 그 모습은 뭐냐고….
-죄송… 죄송해요. 파스텔. 제가….
-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어. 흐으으윽… 사과는 필요 없다고!
‘감동 모먼트기는 하자너.’
괜스레 미소가 지어진 것은 당연지사. 계속해서 바라보고 싶은 훈훈한 장면이기는 했지만, 적들은 씬이 끝날 때까지 친절하게 기다려 주는 유아용 애니메이션 악당들이 아니다.
영애들 사이에 이것저것 쌓아둔 걸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지만 아마 교통정리는….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빛을… (0/1)]
[파스텔 외 18인에게 전설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어?
-어…. 어….
-어…어어… 어? 어….
-흐윽…. 흐으으으윽….
[밝히죠.]
-흐으으으어어엉….
-흐으으으윽….
[함께 빛을 밝히도록 하죠! 영애들!]
-흐어어윽… 흐으으으으으윽….
-흐으으으으윽… 페넬로티이… 흐으으윽….
아마 이것으로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