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470화 (1,468/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470화

대륙전쟁(50)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

‘내가 조금만 더 쓸모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페인트처럼 똑똑하고 강단 있었다면, 팔레트처럼 쉽게 흔들리지 않고 마법에 정통했다면, 파스텔처럼 강하고 멋졌다면 어땠을까.’

“…….”

‘내가… 내가 만약에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더라면.’

매일 밤 잠에 들 때마다, 악몽을 꾸고 일어날 때마다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던 기억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을 때면 그때의 그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손발이 덜덜 떨릴 정도로 강해 보였던 악마와 그 악마를 향해 몸을 날리던 페넬로티 영애의 뒷모습이 말이다.

매번 혁명이니, 변화니 울부짖었던 자신은 그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간신히 서 있는 것이 한계였고,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페넬로티가 그곳으로 향하면, 그녀를 잃을 수도 있다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어렴풋이, 페넬로티가 그곳으로 향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페넬로티라면, 뭔가 기적을 일으킬지도, 눈앞에 있는 거대한 무언가를 막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나 페넬로티를 그런 사람이었다. 매번 말로만 떠드는 자신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움직이며, 항상 끊임없이 빛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 그녀만큼 혁명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언제나 당당하고, 언제나 꼿꼿하게 서 있으며, 언제나 아름다우며, 바닥 위에 우뚝 피어오른 꽃 같은,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조금이라도 그녀를 닮을 수 있다면,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다면 아마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그녀를 동경하고 있었다.

그렇게 브러쉬 영애라고 불렸던 그때의 풋내기 귀족 영애는, 언제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이나 페넬로티의 뒤를 좇게 되었다.

용기를 내서, 그녀의 뒤를 따라,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함께 빛을 쏘아 올렸다. 그녀와 함께 말이다.

어쩌면 그게 자신의 첫 발걸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셈이 되어버렸지만, 결국에 자신은 그녀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으니 말이다.

어디 그것뿐이었던가. 그녀가 죽은 이후에는 어려운 이들을 돕기로 결심했다.

전쟁 피해자들을, 고통받는 아무 죄 없는 이들을 위해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가치 있다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위해서, 이제는 귀족이 아니었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한때 귀족 영애였던 자긍심을 가지며, 도울 수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해 살아왔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아이나 페넬로티는 점점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지만 말이다.

“…….”

오히려 전쟁을 막고자 하는 진유라는 소년이 더욱더 그녀에게 가까이 닿았을 것이다.

언제나 자신은 마지막에 마지막에 가서 발걸음을 디디는 것을 두려워했으니까.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해야 할 일이 있어도, 끝끝내 마지막에 용기를 내지 못하며 변명하는 것은 자신의 습관 같은 것이었으니까.

위험하니까. 상황이 허락하지 않으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불가능하니까.

언제나 자신을 가로막는 변명들이었다.

혁명이라는 것은 발을 내딛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늘 변명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망상을 하고 있었을 때, 누군가는 직접 전쟁을 막기로 결심하고 검을 들어 올렸다.

진유라는 소년이 그러했다.

저 악마가 제발 사라져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을 때, 누군가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세상을 구했다.

아이나 페넬로티가 그러했다.

모든 영애들이 함께 한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브러쉬라는 인간은 너무나도 나약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짐만 되고 있잖아.’

“…….”

‘어째서 손을 뻗지 못한 거야.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였어. 네가 할 수 있었잖아.’

“…….”

“물러서세요! 브러쉬 영애!”

“…….”

‘그… 그래… 난… 난 전투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보조하는 게 도와주는 걸지도 몰라.’

“…….”

‘페인트도 내가 전투에 미숙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나를 후방 지원으로 뺀 거야. 페인트의 판단을 믿어야 돼. 괜히 설친다면 다른 친구들에게 방해만 되고 말 거야.’

스스로 자신을 합리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악이구나… 브러쉬 너….’

페인트가 위험에 처했을 때에도.

‘움직여야 돼. 브러쉬. 움직여야 돼! 네가 대신 죽더라도 막아야 돼! 페인트를 잃으면 우리는 끝장이야.’

갑자기 나타난 파스텔이 페인트를 위험에서 구해줬을 때에도.

‘파스텔이 와줬어. 이제는 됐어. 이제는 된 거야. 파스텔이 와줬어! 파스텔이….’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갑작스레 페넬로티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함께 빛을 밝히도록 하죠! 영애들!]

저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자세히 설명하기는 힘들었지만 아마도… 자기혐오와 자괴감이 반쯤은 섞여 있을 게 분명했다.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는 수치심과, 페넬로티가 자신들을 구해줄 거라는 믿음과 안도감까지 뒤섞여 있다.

계속해서 그녀의 뒤를 좇았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와서도, 자신은 아이나 페넬로티에게 도움을 원하고, 받으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흐어으으으으윽… 페넬로티….”

“흐으으으윽….”

“뭐야. 왜 갑자기 다들 울고 자빠진 거야? 아! 이제 자신들이 죽을 거라는 걸 알았나 봐? 슬슬 누구를 건드렸는지 감이 와?”

“…….”

“…….”

“설마요. 설명하기 힘들지만… 아무래도 옛 친구가 저희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네요.”

“…….”

“…….”

“저기는 도대체 무슨 개소리들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것보다 희영 씨 빨리 상처 좀 치료해 주시면 안 됩니까? 아프단 말입니다.”

“…….”

“장난은 슬슬 그만하시고, 저 멍청하게 죽은 놈들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시오.”

“…….”

“후우… 단장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다른 영애들 모두가 전열을 정비한다. 상황은 당연히 최악이다. 어디부터 이걸 풀어나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모두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고 있다.

엉엉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어코 주문을 외우고 있다. 파스텔은 마치 구원이라도 받은 것 같은 표정이었고, 페인트는 눈앞이 제대로 보이는 것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있었다.

웬만해서는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는 팔레트조차 계속해서 눈을 비비고 있었다. 함가르디아도, 라이넬피아도, 루스빌라도, 모두가 페넬로티의 목소리에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안심하고 있는 것은 자신뿐일지도 모른다. 페넬로티가 함께해 준다는 것에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는 것은 자신뿐일지도 모른다.

두렵고, 무서운, 마지막 한 발걸음을,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뿐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생기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지 않은가.

‘나… 뭐 하고 있는 거야. 도대체….’

“덤벼어어어어! 이 개새끼들아!”

“파스텔은 여전하네요.”

“페인트 괜찮으시겠어요?”

“네. 물… 흐으으윽… 물론이에요.”

‘왜 나는… 항상….’

[그래도.]

‘페넬로티….’

[브러쉬 영애는 꾸준히 걸어오셨잖아요.]

‘나… 나 정말로 할 말이 많은데….’

[…….]

‘너를 다시 만나게 되면, 정말로 하고 싶은 말 들이 많았는데… 미안해. 미안해요. 페넬로티. 이렇게 멍청하고 나약해서, 정말로 미안해…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어서 미안해… 여전히 도움도 안 되는 멍청이라 미안해.’

[…….]

“나… 나는… 페넬로티….”

[다른 생각은 하실 필요 없어요. 브러쉬 영애. 브러쉬 영애는 브러쉬 영애 그 자체로도 너무나도 멋지고 존경스러운 사람인걸요. 브러쉬 영애는 매번 발을 뻗으셨어요. 매번 걸어오셨다고요. 브러쉬 영애만의 방식으로, 또 브러쉬 영애만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요. 단지….]

“…….”

[단지 브러쉬 영애는 아직 목적지에 닿지 못한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아니, 어쩌면 이미 도착한 것일 수도 있고요. 삶은 길잖아요? 브러쉬 영애의 발자취로 만들어낸 것을 보세요.]

“…….”

“…….”

[브러쉬 영애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브러쉬 영애에게 구원받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기억해 보세요.]

“…….”

“…….”

[눈을 크게 떠서 지금 눈 앞에 있는 것들을 보세요.]

“…….”

“…….”

위로받아도 되는 순간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흐… 흐으으윽….”

지금 이 자리에서 감상에 빠지는 것처럼 멍청한 행동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위로가 절실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잘하고 있다고, 힘내고 있다는 말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다른 이들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자신과는 다르겠지만, 페넬로티는 분명히 지금 이 순간, 모두에게 위로를 전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계속해서 “응! 응! 페넬로티….”라거나, “응. 나도 사랑해. 나도… 나도 사랑해… 흐으으윽… 나는… 나는 죽을 때까지 페넬로티를 사랑할 거야.”라고 중얼거리는 파스텔 영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으며 살인여단과 몸을 맞대고 있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페넬로티 영애. 저는… 저는….”라고 중얼거리는 페인트 역시 눈에 띈다.

빛으로 전술 카드를 띄우면서도 계속해서 페넬로티와 함께 소통하고 있었다.

아마 사과를 하는 것 같아 보였고, 페넬로티 영애는 그녀를 이해해 주고 있는 듯했다.

팔레트 영애와는 오랜 친구가 만난 듯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라이넬피아 영애와는 몸에 난 상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함가르디아 영애와도 마찬가지다. 모든 영애들이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 와중에도 우리들이 저 살인여단을 밀어붙이고 있는 사실이었다.

적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이미 죽였다고 생각한 이들이 죽은 자가 되어 몸을 일으켜 이전과 같은 능력을 선보이고 있었고, 다른 이들의 공격 또한 겁이 날 정도로 맹렬했다.

심지어 계속해서 상처를 입혀도 어두운 기운과 함께 순식간에 회복하는 터라, 전투는 계속해서 장기전으로 흘러가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영애들이 힘을 모아 그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상처가 쌓여가고 있음에도, 당장에라도 꺼질 것 같은 체력으로 말이다.

전투에 문외한에 가까운 자신이 보기에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보세요. 브러쉬 영애.]

“…….”

“…….”

[브러쉬 영애가 아니었다면 모두가 모이기 힘들었을 거예요.]

“흐으으으윽… 흐윽….”

[저는 브러쉬 영애에게는 특히 감사하고 있답니다.]

“흐…허으으어으으응으으응….”

[그럼…]

“페넬로티… 페넬로티 영애… 나는….”

[저와 함께 다음 목적지로 가 볼까요?]

“그게 무슨 소리….”

[혁명적으로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 외에는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응… 혁… 혁명적으로… 응! 혁명적으로!”

[자! 제 손을 잡고 같이 걸어요!]

“…….”

[발을 떼고.]

“으… 으응… 으응 페넬로티.”

[하나.]

“하… 하나.”

[둘!]

“둘.”

[셋!]

“세… 셋!”

그렇게 무심코 한 발자국을 더 뻗은 순간.

환한 빛이 시야를 감싸기 시작했다.

작은 빛기둥이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린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자, 앞에서 싸우고 있는 친구들의 상처들이 회복되기 시작한다.

적들이, 모두가 자신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스스로도 스스로가 한 일이 당황스러울 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웅 등급의 직업, 검은 장미의 신봉자로 강제 전직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