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73화
대륙전쟁(53)
온 정신을 집중해서 녀석과 부딪쳐도 모자랄 만한 상황이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전투에서 갑자기 어째서 이쪽에까지 생각이 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성지훈 녀석은 진유가 갑작스레 사라졌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는 탓에 화들짝 놀라 재빠르게 몸을 숨겼을 정도, 하필이면 땅굴 속에서 막 올라오려고 했을 때 녀석의 숨은 진유 찾기가 시작된 것이다.
계속해서 흔들리는 눈동자와, 불안한 듯한 표정, 얼굴 속에 드러나 있는 불안감은 당연히 진유가 갑작스레 사라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종류의 불안이었다.
이미 한 차례, 아니, 몇 차례나 진유의 최후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으니 그때가 지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분명했다.
‘작별인사도 못 했자너.’
잘 가라는 인사도 하지 못했다. 물론 진유가 유리엘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야 알고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배하지 않을까.
도대체 언제 사라진 건지,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혹시나 전쟁터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따위의 생각들 말이다.
솔직히 다른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류한과 검을 부딪치고 있는 시점에서 저런 잡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으니까.
적절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시속 300키로로 달리는 차를 운전하며 한 눈을 파는 것이나 진배없는 행동이지 않은가.
진즉에 목이 잘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어떻게든 류한의 검에 맞서고 있었다.
“후우… 후우… 하아… 으으윽!”
“…….”
당연히 전투의 양상은 아까와는 다르다. 밀어붙이고 있는 형국에서, 다시 밀려나고 있는 형국으로, 방금 전까지 보여줬었던 달라진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호흡은 이미 엉망이었고 상처는 늘어나고 있다. 단언하건대 이대로라면 30분이 지나가기도 전에 온몸이 넝마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그냥 밖으로 튀어 나가서 용사님! 힘내세요! 한 번 소리 질러줘야 되는 거냐고.’
4-1전선으로 향하는 길에 잠깐 경유한 것뿐이었지만, 이대로 그냥 김현성한테 향하는 것이 정답일까.
‘시바 당연히 정답이지.’
절대로 성검용사의 위기보다 그 발언의 김현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슬슬 독립할 때 되기도 했잖아. 내가 언제까지 품에 안고 케어해 줘야 돼?’
집을 나갈 시기는 진즉에 지났다.
“…….”
“…….”
‘여기서 혼자 일어나야 돼.’
이번뿐만이 아니다. 앞으로 성검용사는 성검이 빛을 잃고 미쳐 뒈지는 날까지 수많은 시련과 고난과 마주한다.
물론 지금의 위기가 녀석에게 있어 크게 다가오고 있고, 실제로도 지금까지의 녀석이 겪어본 적이 없는 위기이겠지만, 이후에 있을 여단의 본격적인 움직임. 심지어 외신전까지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적어도 이번은 혼자 헤쳐나가는 게 필요했다.
녀석에게도 진짜 성장이 필요하다는 거다.
김현성이 성지훈을 고평가한 이유가 단순히 종류가 다른 찐따들의 동질감 때문은 아닐 것이다.
무력과 지력을 겸비한 성검용사는 이곳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계속….
‘제자리걸음만 하다가 끝나겠지.’
극단적인 예로 녀석이 여기서 멈춰 설 생각이라면 차라리 뒈지는 것이 맞다. 냉정한 말이지만 류한을 성검용사로 추대하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좀 알아서 할 때도 됐어. 언제까지 시바 뒤치다꺼리해 줘야 되냐고.’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 저… 부길드마스터!”
“아. 오셨네요.”
“어…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하아… 하아… 하아….”
“네. 알프스 님.”
눈에 보인 것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알프스였다. 이미 예상했던 대로 발렌틴 졸렬산드로와의 전투를 마무리하고 내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찾아온 것이다.
당연하지만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는 얼굴이다. 심지어 창백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로 다치신 곳은 없는 거죠?”
“네.”
“어, 어디로 오신 건가요? 이 근처는 전부 전투 중이었을 텐데….”
“땅굴로 왔다 갔다 했으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이쪽 구덩이에는 사람이 안 다니더라고요.”
“밑에 깔린 게 전부 시체이니 그럴 만하기는 하지만… 그, 그래도 이렇게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시면 저는….”
‘그래, 걱정될 만하기는 해.’
“혹시라도 부길드마스터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너무 걱정이 들어서….”
“아니요. 정말 별일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니까요.”
“그, 그렇지만… 만약 부길드마스터께서 잘못되시면… 주, 주제넘은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조… 조금 더… 아니… 아니요… 그, 그냥 잊어주세요. 아무튼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하아….”
마음 같아서는 묶어 놓는 게 낫겠다는 듯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발렌틴 알렉산드로는….”
“현재 전투 불능 상태일 거예요. 사제들에게 치료를 받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번 전투가 끝나기 전까지는 움직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그것보다… 지금은…. 저 전투에 합류하면 되는 건가요?”
“아니요. 저희는 4-1전선으로 향할 겁니다.”
“네?”
“창렬 씨가 현성 씨를 발견했거든요.”
“아! 창… 창렬 선배가….”
‘그러고 보니까 얘는 창렬이 살아 있는지도 몰랐지?’
살짝 울먹이고 있는 것 같은 알프스의 얼굴이 비쳐온다. 가방 안에 아직까지 창렬이의 팔을 보관해 놓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면 녀석이 생존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았지만 막상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으니 감정이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알프스 얘는 파란의 1기보다는 2기 멤버들과 가깝게 지내는 편이었으니까.
물론 조혜진과는 자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김창렬이나 유아영, 스미스나 벨리에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다.
칼 밥을 먹고 사는 이상, 언젠가는 누군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겠지만, 아직 누구도 잃어보지 못한 이 병아리가 어떻게 누군가의 위기에 초연할 수 있겠는가.
‘진짜 언제 병아리들도 기강 한번 잡아야 되기는 해. 요즘 대륙이 너무 평화로운가 봐.’
본인도 눈물을 흘리는 게 꼴사나운 행동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눈물을 꾹 참으며 말을 돌리는 모습.
“지금 곧바로 출발하면 될까요?”
“네. 일단은 4-1전선으로 가서 창렬 씨와 합류하는 걸 최우선으로 할 거예요. 전투는 최대한 피해주시고요.”
“네! 부길드마스터! 일단 안아드릴게요. 꽉 잡아주세요.”
알프스가 몸이 그리 큰 편이 아니라서 애가 애를 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속도는 내가 혼자 달릴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순식간에 배경이 휙 휙 지나가는 것이 눈에 비쳐온다.
‘얼마 안 있어서 도착할 것 같자너.’
아직까지 칼부림이 일어나고 있는 전쟁터를 이렇게 빠르게 지나치는 것은 내구 수치가 낮은 그녀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눈먼 화살, 마법들을 쳐내고, 본인에게 찔러 들어오는 창과 칼을 직접 받아내며 전진한다.
발로 한 번 땅을 박찰 때마다 무척이나 억센 바람이 몸을 때리는 것이 느껴진다. 심지어 이쪽을 안고 땅바닥을 구르기까지, 신기하게도 내 몸에는 별다른 대미지가 없다.
그러고 보니 2회 차 외신전 때에 뒈져 버린 김현성에게 직접 퀘스트를 전해주러 간 사람도….
‘알프스기는 했지.’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다. 물론 그때의 알프스는 붉은 용병의 단원들과 근처에 있었던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사실 임무 자체는 알에서 막 나온 병아리가 감당하기에는 힘들었었던 임무.
새삼스레 그녀가 이제 단순한 병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얘는 조금 유약하고 가끔 서툰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웬만하면 본인에게 주어진 임무나 작전을 완수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시죠?”
“네.”
‘성검용사 멘탈이 알프스 정도만 돼도 참 좋았을 텐데.’
이미 성지훈과 류한의 전장을 벗어 난지 한참이 지난 상황.
‘아니… 성지훈 이 새끼도 보고 들은 게 있을 테니까. 알프스를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어도… 도움이 됐을 거야.’
짧은 시간이라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녀석이 스스로의 의지로 저 자리로 향하게 만든 것이 진유 하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불행하게도 히로인 후보자로 이름을 올리기는 했지만 믿음직한 동료로 포지션을 변경에 성공한 여검사 알프스.
녀석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 없는 형.
소외된 자들을 지키기 위해 결의했던 영애들의 비석과 신 흑장미 살롱의 중심에 있었던 브러쉬 영애.
전쟁을 막겠다는 뜻에 함께 동참했던 옥사나와 달빛을 따르는 자들의 동료들.
교보재는 많다 못해 넘칠 지경이었다.
녀석보다 재능이 없고, 녀석보다 약했을지는 몰라도, 모두가 배울 점이 있는 이들이었다고 본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어떤 역경과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이들 말이다.
“알프스 님. 혹시 용사님이랑 사적인 대화를 나누신 적이 있나요?”
“네? 아… 아니요. 그… 그분은 물론 좋으신 분이지만 제 타입은 아니라서… 저는 조금 더… 뭐, 뭐랄까… 조금 더 침착하고… 친절한… 가끔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의지할 수 있는 사… 사람이….”
‘뭐가 이렇게 구체적이야. 너 좋아하는 사람 있어?’
“아니요. 그런 대화 말고요. 그냥 여러 가지로….”
“아앗! 앗! 네. 은근히 자주 이야기하기는 했었어요. 창렬 선배님과의 대련이 끝난 이후에… 따로… 물론 조금 대화하기 어려운 분이기는 하지만 나쁜 분은 아닌 것처럼 보였어요.”
‘그래. 얘는 착해. 그것밖에 없어서 문제지.’
“무엇보다 달라지고 싶어 하시는 게 눈에 너무 보여서, 바보 같을 정도로 솔직한 분이시더라고요.”
“…….”
“자기 약점을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보통 보기 힘들잖아요. 괜히 부끄럽기도 하고, 까발려진 것 같기도 하고요. 근데 그분은 다르더라고요. 자존심이 없는 건지 내려놓은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
“그러니까… 사람을 상처 입히는 게 무섭다고 하셨어요.”
“…….”
“자신이 약한 게 불만이라고 하셨고요.”
“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닌지 불안하다고도 하셨어요. 한편으로는 그냥 도망치고 싶다고, 더 이상 아무도 잃지 않고 싶다고도 하셨고요. 많이 흔들리고 계신 것 같더라고요. 솔직히… 눈만 봐도 대충 알 수 있잖아요. 곧 무너지실 것 같으셨는데도… 얼마 안 있어서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는데도….”
“…….”
“꾸준히 검을 휘두르고, 휘두르고, 또 휘두르시더라고요.”
“…….”
“저는 부길드마스터처럼 사람을 많이 만나보지도 못했고, 통찰력 같은 게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보통 그런 사람들은….”
“…….”
“무슨 일이 생기든 간에 결국에는 전부 다 극복하고 일어서는 것 같더라고요.”
“…….”
“그래서 그냥 지켜보려고 하시는 거죠?”
“…….”
‘틀린 말은 아니지.’
슬쩍 다시금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눈물 콧물을 질질 짜는 성지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흐윽… 흐어어어엉… 흐으으으윽….
당연하지만 꼴불견이다. 언제나 처럼 눈물과 콧물을 질질 흘리며, 길 잃은 꼬맹이마냥 질질 짜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더 이상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시선을 류한에게 똑똑히 고정시키고 부들거리는 손으로 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눈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깃들어 있다.
표현하기 애매하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눈에 머뭇거림은 들어가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알프스의 말을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흐어어어엉… 흐으으으으윽….
“…….”
“…….”
‘김현성도 그랬으니까.’
이를 악물고,
눈물을 닦고,
검을 들어 올리며,
자세를 다잡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류한에게 쇄도하는 성지훈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이… 이야아아아아아아아!
조금이지만 녀석에게서 김현성이 비쳐 보였다.
“…….”
어처구니없지만 녀석치고는 꽤….
“…….”
멋있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 아무래도 찐따들 좋아하나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