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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476화 (1,474/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476화

대륙전쟁(56)

‘와….’

“…….”

“…….”

‘못 봐주겠네… 둘 다 진짜.’

역대급 졸전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물론 성검용사 성지훈이 눈물 나는 성장을 보여준 것은 긍정적이기는 했지만, 전투 자체가 맥없이, 그리고 다소 황당하게 마무리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본래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었던가. 전투 중반부터 급격히 무너진 류한을 보고 있자니 어째서 진청이 놈을 고평가하지 않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을 정도.

기계는 고장 나게 마련이라는 말이 괜스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말 그대로 고장 난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진 군사가 말한 고장과 내가 느끼고 있었던 고장이 같은 종류의 고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녀석이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인 것만은 확실했다.

물론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류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놈이 무슨 사연이 있는지, 튜토리얼 때 진청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구에서는 또 어떻게 생활해왔는지… 사실 알 필요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다.

대충 봐도 불행한 서사가 준비되어 있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건 오롯이 녀석의 사정이 아니었던가.

한 가지 확실할 수 있었던 것은 녀석이 속칭 이끄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진청이나, 달빛의 성자 따위에게 말이다.

도대체 뭐에 버튼이 눌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성지훈의 눈빛이나 대사에 흔들리지 않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이 새끼 그냥 진 군사 꼬붕 하고 싶었던 거 아니냐고.’

라는 생각이 들 정도.

아마 변하고 싶었던 욕구가, 작은 균열이 미약하게나마 자리하고 있었던 상태가 아니었을까.

자기 자신조차 그 미약한 감정을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었지만 성지훈이 전투 중에도 계속해서 변하며 성장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서 균열이 점점 커진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자신도 변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고,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감정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렇기에 녀석은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계속해서 잔잔한 상태에 있었던 바다에서 작은 균열이 커졌고, 그곳에서 시작된 태풍이 녀석의 바다를 완전히 집어삼켜 버렸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정의 파도에 평정심을 잃고, 혼란스러워하고, 당황해했으며, 결국 본인의 능력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고 리타이어했다.

심지어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주저하느라 검을 제대로 뻗지도 못했다. 솔직히 이 새끼가 생각이라는 걸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냥 본인도 깨닫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삼켜졌을 뿐이다.

얼핏 봐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반쪽짜리 승리. 성검용사는 그 반쪽짜리 승리에 취해버렸는지….

‘뭐 하고 있는 거냐구… 뒷정리 안 할 거야? 전쟁 끝났어?’

스스로의 점수를 깎아 먹고 있었다.

물론 류한의 패배를 확인한 공화국의 병사들은 싸울 의지를 잃어버리고 있었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쟁이 멈출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막타 안 쳐? 진짜 불살루트 탈 거야?’

우리 성검용사는 이후에 일어날 뒷정리에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 그 자리에서 유리엘을 꽉 껴안고 오열하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당연히 놈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꼭 지금 상황에서 저래야 하는 것일까.

게다가 어째서 하늘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걸까. 왜 고개를 위로 치켜들고 드라마틱하게 오열하고 있는 것일까.

보름달이라도 떠 있으면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보름달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슬픔을 안고 곧바로 전쟁터로 향했던 영애들과는 다른 행보에 심기가 불편해진 것은 당연지사.

당연히 놈을 너무 과대평가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류한이 삽질을 하기는 했지만 결과만 따지고 보자면 성지훈은 벽을 넘은 셈이었으니까.

오늘의 기억을 연료로 삼아 녀석은 더 강해질 것이고, 한층 더 단단해질 것이라는 건 너무나도 자명한 일.

‘색안경 빼고 보면… 솔직히 멋있기는 했어. 김현성이 비쳐 보일 정도면 말 다 한 거지 뭐….’

문제가 있다면 진유리엘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며 성장했다는 것이었지만, 성검이 빛을 잃고 미쳐 뒈진다는 성지훈의 정사를 생각해 보면 그게 딱히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세상 잃은 것처럼 오열하는 성지훈보다는 공화군에 의해 전장을 빠져나가고 있는 류한에게 시선이 가기 시작한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듯해 보이는 녀석. 뭔가 후련해 보이는 표정과 담담한 얼굴, 만화 속 악당마냥 본인도 달라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부축을 받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아쉽게도 녀석이 달라지는 미래는 없다.

류한은 더 이상 정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어째서 저 정도의 강자가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지 의문이었지만 놈의 사정을 대충 알고 나니 이후에 있을 작은 이벤트가 트리거가 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1군사 사망.’

아마 안정을 위해 돌아가는 와중에 그 소식을 전해 들을 것이고, 그대로 은거하는 게 류한의 마지막이겠지.

알프스의 시선이 느껴진 것은 이제 막 녀석들에게서 눈을 떼었을 때였다.

너무 둘의 싸움에 집중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당연지사.

먼저 말은 걸어오지 않았지만 아마 그녀 역시 4-2전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야 그녀도 달빛을 따르는 자들이나 신 흑장미 살롱의 인원들과 나름 안면을 트고 있었으니 결과가 궁금할 만도 하겠지.

이쪽으로 말을 걸어오기에는 살짝 부담스러운지, 마른 침을 삼키고 있는 모습, 결국 그녀를 향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4-2전선은 좋게… 마무리된 것 같네요.”

“아! 역시… 용사님이 이기신 거군요.”

“조금 아슬아슬하기도 했고… 사실 상대가 스스로 무너진 게 큰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네. 용사님께서 해내신 것 같아요.”

‘좀 시원섭섭하기는 해.’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도 합류했고…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종식되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후우… 다행이네요. 사실 저도 입으로는 믿는다고 말했었지만 조금 걱정이 됐어서….”

“…….”

“저… 그… 그런데… 부길드마스터는 괜찮으신가요?”

“네?”

“제가 감히 이,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게 맞나 싶기는 하지만… 저… 조금 안 좋아 보이셔서요.”

“…….”

“아무래도… 용사님과는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시기도 했고… 또 다른… 흑장미 살롱 분들과도… 저희는 그나마 괜찮지만… 아무래도 부길드마스터께서는 일선에서 활동하시다 보니 정이 많이 드신 것 같아서… 문뜩 정말로 괜찮으신 건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얘 쓸데없는 생각 하네. 혜진이 케어했던 버릇 나오는 거냐구… 누가 누굴 챙기는 거냐구.’

“…….”

“…….”

“주제넘은 말을 했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그… 제가 부길드마스터였다면 무척 힘들었을 것 같아서….”

아무래도 본인이 힘드니 이쪽도 힘들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녀 역시 데뷔탕트 당시에 안면을 트고 지냈던 영애들을 잃었으니 말이다.

물론 다시 돌아가는 걸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만들지 않으려고 했겠지만…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억지로 다가오는 이들을 떨쳐내려고 해도 모두 떨쳐낼 수는 없다. 사실 이쪽은 별생각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위로받는 포지션이 좋자너. 동기부여도 해주고….’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요.”

“네… 당연히… 더 중요한 일이 있으시겠지만… 네… 그….”

“그것보다… 속도를 좀 더 올려주실 수 있을까요?”

“네. 부길드마스터.”

‘조금 더 빠르게 가야 돼.’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물론 얘 입장에서는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이나 성지훈과 작별인사를 하며 헤어지는 그림을 그리고 있겠지만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만은 않다.

‘최대한 빠르게….’

김현성의 어째서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레 류한과 성지훈이 부딪치며 생각이 끊기기는 했지만….

김현성이 이곳에서 체류하며 뭘 기다리고 있을지는 뻔하지 않은가.

‘1기영, 1진청이겠지.’

녀석이 기다리고 있을 만한 건 그 정도밖에 없다. 아직까지도 이곳을 거닐고 있는 것이 맞다면 둘의 대화를 기다리고 있는 게 뻔했다.

이 새끼가 감히 진실에 닿고 싶어 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이 모든 걸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은 모든 걸 궁금해하고 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 이면에 있는 이야기들 말이다.

가면을 쓴 남자와 자신 사이에 얽혀 있는 이야기들.

본인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하는 이야기들.

‘옆에서 시바 누가 바람을 불어 넣었겠지.’

솔직히 내가 무슨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녀석과 만나는 것이 최우선과제.

4-2전선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4-1전선 또한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아니, 이미 무너지고 있는 게 확실하다.

4-2전선을 지나고, 4-1전선에 막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알프스는 병사들과 마주치지 못했다. 4-1전선에 들어온 이래로 알프스가 전투를 벌인 적은 없다. 말인즉슨….

‘전부 뒈졌다는 소리자너.’

죽었거나, 도망치거나, 숨어 있거나, 뭐가 됐든 간에 전쟁이 끝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끔찍하네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4-1전선에서 시작된 전쟁도… 4-2전선과 비슷하게… 시작하지 않았었나요?”

‘내 말이 그 말이야.’

“네. 아마도… 알프스 님 말이 맞을 거예요.”

“…….”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런 참상은….”

4-2전선에서의 피해가 적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무엇보다 여단에서 터뜨린 지뢰가 큰 역할을 해준 만큼 많은 생명들이 짧은 시간 동안 사그라들었고, 이윽고 일어나기 시작한 전투에서도 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기영과 1진청이 부딪치고 있는 전투에서의 피해와는 비교할 수 없었을 정도.

그렇게나 간을 보고, 병력을 아끼며,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하겠다고 몸을 사리던 녀석들이 막상 본 전투에 들어가니 병사들을 갈아 넣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히 내가 김현성을 관음하고 있을 때만 해도 정상적인 전쟁처럼 보였었는데, 성지훈에게 잠깐 눈이 팔린 사이 인간들이 떼로 죽어버렸다.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갈아 넣었는지도 참 가지가지.

대규모 마법이나 냉병기를 맞고 죽어 있는 놈들은 양반이다.

‘화학무기, 역병. 저주’

저주에 당했는지 온몸이 뒤틀려 죽어 있는 녀석도 있었고, 정신계열의 마법에 당했는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흔적들도 보인다.

단언하건대 이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이 지역은 한동안 오염되어 있을 것이다.

“괜찮으세요?”

“후우… 후우… 네. 부길드마스터.”

“축복이라도 걸어드릴게요.”

“감… 감사합니다.”

알프스의 저항력이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 역시 오염된 대지에 영향을 받고 있는 중, 도대체 저 뒤엉켜서 커다란 공을 만들어 놓은 시체 덩어리는 어디에 사용했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차라리 성지훈 류한보다 이쪽을 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서로 가지고 있는 병력들을 완전히 갈아버리는 수 싸움, 단 하나의 화살을 서로의 대가리에 꽂기 위해 허수에 허수를 반복하며 병사들을 죽음으로 밀어버렸던 두 괴물들의 전쟁, 마지막에 서 있던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1기영.’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녀석이 망원경 속에 비쳐온다.

시체들로 가득 차 있는 전장을 거닐던 녀석이 우뚝 멈춰 선 곳은 무너져 내리기 일보 직전의 폐허다.

폐허 안에 들어선 녀석은 이윽고 의자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

-…….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 건지, 오랜만입니다. 라고 해야 하는 건지….

-…….

-아무튼 만나서 반갑습니다. 군사님.

-그래. 반갑군. 이기영.

-…….

-…….

-지루해 보이시는데… 어떻게… 즐겨 하시는 게임이라도 같이 해보시겠습니까?

-…….

-생각했던 것보다 더 웃기는 놈이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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