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480화 (1,478/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480화

무대의 뒤편(1)

‘성장 같은 거 하지 마… 넌… 절대… 절대… 못 나가.’

“…….”

“…….”

나는 지금 김현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안다.

물론 회사설이 고장 나 녀석을 완벽하게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유추할 수 있다.

김현성은 궁지에 몰리면 몰릴수록, 자신의 판단보다 내 판단을 우선시한다.

김현성은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면, 평소보다 더욱더 내게 의지한다.

김현성은 자신을 믿을 수가 없게 되면, 나를 믿는다. 김현성은 생각할 수 없게 되면, 내 생각이 곧 자신의 생각이라고 여기게 된다.

내가 잘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녀석은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슬퍼하면, 같이 슬퍼하고, 내가 기뻐하면 함께 기뻐한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 같다고 말을 던지면, 녀석은 스스로를 의심한다.

그렇기에 지금 김현성을 자기 스스로가 정상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극단적으로 겁을 집어먹고 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있다. 빠져나가지 못하는 미로 속에 갇혀 버린 상태가 되어버렸다.

숨을 헐떡이고, 식은땀을 흘리며, 자기 자신의 정신이 점점 망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아니, 생각하는 것을 넘어 실시간으로 정신력이 마모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성 씨.”

“후우… 후우… 후우….”

내 눈이 차가워졌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대답…해 주셔야죠. 현성 씨.”

“하아… 후우… 하아… 하아… 하아….”

내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아마 이 모든 것이 김현성에게는 스트레스로 다가왔을 터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상자 안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상태에서, 이기영이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하고,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녀석이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이유였다. 현재의 상황에서 회피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다.

‘…….’

그렇게 강해 보였던 영웅이었는데, 지금은 무척 작게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손가락만 툭 가져다 대도 뻥 터지며 스스로 가라앉을 것 같다. 너무 녀석을 몰아붙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내가 상정했던 것보다 더 극한상황에 몰려 있었고,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처절하게 느껴진다.

한 발자국만,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망가뜨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 발자국만 앞으로 더 다가가면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망가진 김현성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흐윽… 흐…으으으윽….”

아마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과호흡으로 쓰러지거나 기절해 버렸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김현성은 차라리 쓰러지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현성의 신체 능력은 정신이 육체를 놓아버리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아…흐… 흐윽… 하아…후우… 후우….”

어디에다가 도움을 청해야 할지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야,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할 것이다.

도움을 청해야 하는 대상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미켈레 박사도 자신을 돕지 못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성 씨….”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성은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녀석이 저런 상태에 빠졌을 때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기가 막힌 이야기였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성은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은 아직도 나와 이 의미 없는 싸움을 생각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녀석의 눈을 확인한 이후에는,

김현성이 세뇌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공포에 질린 눈, 겁먹고, 두려워하는 눈, 혼란스러워하고, 자괴감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의 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꺾이지 않은 무언가가 보인다. 오글거리는 표현이지만 녀석의 눈에서 자그마한 빛이 보인다.

“…….”

“…….”

‘내가… 저래서 김현성을 좋아했었던 거자너….’

적절한 예로, 놈과 지금까지 마주쳤던 적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계속해서 두드려도, 절대로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쓰러져도 곧바로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내가 놈을 떠민 게 절반이 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애초에 김현성 나름의 의지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일어서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류한과 성지훈의 싸움을 졸전이라고 평가했었던 내가 녀석의 눈에 흔들리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자연스럽게 저걸 꺾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부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부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저게 김현성이자너….’

대륙을 구한 영웅,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

“현성아….”

“…….”

“현성 씨….”

“…….”

양보해도 될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생각이었다. 앞으로도 양보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녀석의 말대로, 이번 한 번만 김현성에게 관대해질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신적으로 몰리고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성이 끝까지 놓지 못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아니야.’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양보하면 두 번 양보하게 된다. 두 번 양보하게 되면, 이내 물러서게 된다. 지난 경험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인간관계에서의 주도권은 내어주는 것이 아니다. 물론 김현성이 내게서 멀어진다는 건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이후에는 아닐 수도 있다.

김현성이 갇혀 있는 새장을 넓혀줄지언정, 새장의 문을 열어줄 수는 없었다. 아니, 새장을 넓혀주는 것도 많은 합의가 필요하다.

차라리 날개를 꺾어버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넌… 절대로… 못 나가.’

한 발자국을 더 움직이려는 찰나에….

“어… 어?”

별안간 몸이 땅바닥으로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어?”

“기영 씨!”

“어? 현성… 현성아?”

시야가 뒤흔들린다. 지면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정확한 표현은 유리로 된 바닥이 깨지며 몸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미켈레 박사도, 알프스도,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김창렬과 선희영, 하연수, 진 군사 역시 이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직 김현성만이 내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인지하고 있었다. 마치 세계의 시간이 멈춘 것 같은데 내 몸만 땅으로 꺼지고 있었다.

“현성아!”

“제길!”

지금까지 움츠러들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김현성이 손을 뻗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당연하게도 손을 잡기 위해 녀석을 향해 허우적거린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날 잡아당긴 것이 1회차의 의지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처구니없지만 그것 외에는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끝없이 떨어지려는 찰나,

“기영 씨! 제 손을!”

“어? 어!”

눈앞에 날개를 활짝 펼친 김현성이 이를 악물고 손을 뻗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무척이나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김현성이 가까워지지 않는다.

내가 떨어지는 것보다 더 빠르게 김현성은 나를 쫓아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사실 이걸 떨어지고 있다고 표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몸이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것인지, 옆으로 휩쓸려 나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딘가를 거닐고 있는 것인지도 판단할 수 없다. 해류에 휩쓸리고 있는 것이다.

‘차원의 바다?’

아니, 1회차는 차원의 바다에 존재하지 않는다.

1회차는 이미 죽어버린 세계선이다.

차원의 바다가 아니라 1회차의 바다를 거닐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이곳은 무대의 뒤편이다. 계속해서 풍경이 뒤바뀌고 있다.

쨍그랑! 소리가 들릴 정도로 눈앞에 있는 것들이 거울처럼 깨진 이후에는….

-부디….

-…….

-부디….

1회차의 이기영을 뒤로하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카스가노 유노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니.

-부디… 옳은 선택을….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 그녀가 이쪽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기 때문에 어쩌면 나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기영 씨!!!”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계속해서 몸이 어딘가로 휩쓸린다. 또다시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세계가 깨지고 멈춘다.

이후에는 전쟁을 하고 있는 이들이 눈에 보여 왔다. 이미 질릴 정도로 많이 봐온 광경인지라, 딱히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어떤 전장인지도 알 수 없다. 1회차에서는 전쟁이 습관처럼 벌어진 곳인지라, 또 의미 없는 전쟁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죽여라!!! 전부 죽여!!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

그것보다는 나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김현성을 향해 손을 뻗는다. 하지만 이번에도 닿지 않는다.

김현성이 입술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멀쩡한 나와는 다르게 몸에 상처가 쌓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녀석은 차원의 파편에 상처 입으며 나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제길!!”

다시 한번 세계가 멈춘다. 이윽고 무너지며 몸이 굴러떨어진다.

-히… 히히히… 유리엘! 히히히히! 진유!!! 가자! 세계를 구하러! 가자!!!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성지훈이 유리엘을 들고 비둘기들에게 돌진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상했던 용사 코스튬도 벗어던져 버리고, 머리도 장발로 길러 꽤 멋지게 성장한 모습.

하지만 겉모습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정리가 되지 않아 산발이 된 머리였을 뿐이다.

자세히 보니 동공이 풀려 있고 입에서는 침을 질질 흘리고 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둘기들 사이에서 검을 휘두르고, 계속해서 이상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녀석이 쥐고 있는 검을 바라본다. 유리엘은 빛을 잃었다.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보인다.

몰골을 보아하니 저 상태로 수많은 전장을 거닐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하… 히… 히히…. 하…흐…히히히… 히… 히히히히….

누가 보더라도 광인이 된 것 같은 모습은 가관. 기존에 비둘기들과 전투를 벌이던 병사들은 깜짝 놀라며 성지훈을 바라본다.

-살았다… 미치광이 용사야! 시발! 미치광이 용사가 왔다! 하하하하!

-전투준비 해! 이길 수 있어!!

-무슨 전투준비야! 시발! 저 미친놈이랑 같이 싸우라고?! 차라리 저 미친놈이 시간을 끌어줄 동안 도망쳐!

“…….”

-빨리 도망치라고! 이 새끼들아!!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다고!!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수는….

“…….”

-히… 하… 히히히히! 지킬 거야!! 보름달 같은 사람이 될 거야!! 히…히히힛! 히히히히히히힛! 너희들한테는 절대 안 져!

-시발!! 저 미친놈이 시간을 벌어 줄 동안 그냥 도망치라고!!!!

-아무도 우리를 막을 수 없을걸! 우리는 최고의!! 히히히히! 파트너니까!!!!

병사들은 등을 돌린다.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성검에 비둘기들이 휩쓸려 나간다.

빛을 잃은 성검이었지만 무기로써의 기능을 잃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응! 나만 믿어! 진유!… 응! 응! 으응! 준비됐어! 준비됐어!! 우리가 대륙을 구하는 거야!!!! 사람들을 구하는 거야!!!!!!

이미 미쳐 죽어버린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입을 다물게 된다. 녀석의 상태를 그야말로 최악이라 할 만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이전에 류한에게 사용했던 달빛 모으기를 사용하려고 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당연히 모일 리가 없었지만 놈의 검에 마력이 집결되기 시작한다.

다시금 수많은 비둘기들이 휩쓸려 나갔지만,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몸 상태만 정상이었더라도 그들을 몰아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것 같은 몰골로 그들에게 저항하는 것이 힘에 부치는 모양이다.

이미 수많은 전장을 거닐고 있는 탓에 팔과 다리가 너덜너덜하다. 결국에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몸에 하나둘씩 창이 꽂히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좋아… 콜록… 전부 회복됐어!

이전과는 다르게 몸은 회복되지 않고 있다.

몸에 꽂힌 창들을 뽑아내며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대륙을 지키기 위해 분전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니, 어느새 그 많던 비둘기들의 숫자가 줄어든다. 이윽고 온몸에 구멍이 뚫린 채로 녀석은, 전장을 뚜벅뚜벅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풀썩 눈밭에 쓰러지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눈에서 빛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었지만 어딘가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떨어지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유우… 헤… 히… 히히히… 진유….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하지만 마지막 불꽃이 꺼지기 전, 조금은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아니, 정신이 돌아온 것이 아니다. 나이 든 성지훈이 아니라, 그때 나와 만났던 녀석의 모습이 비친다.

당찼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히… 히히히….

“…….”

-히…흐…히히히히히히하…히히…흐윽….

“…….”

-히흑… 히히힛…히흣… 히흐으으윽… 흐…흐엉…흐으으으어어어엉….

“…….”

-흐어어어윽… 흐어어어엉… 나… 나… 결국에는 용사가 되지 못하나 봐… 흐으으으윽… 히…흐으으윽… 미아내… 미아내에… 진유… 진유우….

“…….”

-보름달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해서… 미아내… 나는… 바보인가…바… 흐…으으윽… 끄으으윽….

“…….”

-약속을 지키지… 못했나 바…. 미… 미아… 미아내….

“…….”

-진… 진유… 진… 유우… 헤…헤헤….

“…….”

-진유…헤…흐… 헤에….

“…….”

-마지막으로… 우… 우리… 보름…달… 보러… 가… 가자아…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어… 우리이… 보름달… 보러 가자아… 응? 으… 응?

“…….”

-히… 케흑… 콜록! 콜록! 우리… 보름…달… 보러…가자…. 나…나…케…엑…. 큭….

“…….”

-같이… 가자….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흐으으윽… 옛날… 에… 그랬던… 것처럼… 흐으으으윽….

“…….”

-어… 어? 보름달… 보러… 보러 가자….

“…….”

-우리… 보름…달… 게르륵… 케흑… 으… 가….

“…….”

-자.

김현성의 팔이 나를 꽉 껴안는 것이 느껴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