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84화
무대의 뒤편(5)
‘조금은 안심해도 되는 거냐구….’
사실 김현성이 두려워하는 것과는 다르게 녀석의 민낯을 보는 것이 거북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배신감 같은 것도 없었고, 당연히 복수를 해야겠다는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그야 저 모든 일련의 과정에서 생기는 감정들을 내가 느낄 수가 없었으니 저 아픔과 상황에 공감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김현성의 선택이 윤리적인 선택이라고는 볼 수 없다.
어떻게 봐도 성숙하지 못한 선택이었지만 24살의 김현성으로서는 아마 저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녀석에게 저런 면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까지 했으니 왠지 모르게 익숙하기도 하다. 오히려 발가벗겨진 것을 보는 것 같아 속이 시원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내 민낯을 들춘다는 것에는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녀석이 민낯으로 들이댄다고 해도, 이쪽까지 민낯을 들이댈 이유는 없지 않은가.
시간이 몇만 년, 아니, 몇십만 년이 지난 이후에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선하고 착하고 따뜻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게 1회차의 이기영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청소 이전의 이기영은 더욱더 말이다.
야생의 시대를 살기 위해 온갖 짓거리를 감행해야 했던 시기였던지라 더욱더 불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
물론 김현성처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갑자기 어느 순간 개 같은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딱히 책잡힐 일을 할 만한 시기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당연히 여러 가지 일들을 저질렀겠지만 박덕구의 존재가 브레이크를 걸어주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돼지 새끼. 시바. 너밖에 없자너.’
이래서 사람이 평소에 착하게 살아야 되는 거자너.
나름대로의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심지어 선을 넘을 때에도 돼지 새끼가 옆에 없을 때일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일단 블랙마켓은 무조건 운영했겠지?’
송정욱과 커넥션이 있었으니까. 걸치고 있는 옷의 상태도 나쁘지 않아보였으니 어느 정도는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도시 주민들한테도 호의적이자너.’
-저… 저희 괜찮은 겁니까? 이기영 님?
-네. 금방 해결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심지어 이미지 관리까지 잘해놨자너. 아… 넌 말 걸지 말아줘라. 딱 봐도 범죄자처럼 생긴 게.’
-이기영… 너도 알겠지만 지금….
‘아니야. 시바. 입 다물어. 이 새끼야.’
-사업에 차질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뭐… 뭐?
-철수할 생각이나 하세요. 좋은 시절 다 끝났으니까.
-제… 제길….
‘이 정도면 괜찮아. 좋아.’
박덕구 때문인지 몇몇 아이들과도 친분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친근한 것 같다.
딱 여러분들을 위해 일하는 일꾼, 기호 1번 이기영입니다의 느낌이었던지라 보여지는 이미지가 마음에 든다.
특히나 형아 오빠 하며 달려드는 꼬맹이들과 그런 녀석들을 들어 올리며 비행기를 태워주고 있는 돼지 새끼의 모습이 결정적이다.
‘훈훈해. 좋아. 이런 모습은 좋아.’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보고 있자니 반쯤은 라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 물론 이기영에게 라헬을 다스릴 자격 같은 것은 없다.
누군가에게 인증서를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본래 이런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집단은 자연스럽게 리더인 척하는 새끼에게 이끌리기 마련이 아니었던가.
이기영은 그 포지션을 정확히 먹고 들어간 것 같았고, 조금씩 조금씩 그 능력을 인정받아 실권을 쥐게 된 것처럼 보였다.
그야 제국에게 버림받은 화전민 마을을 소도시 급으로 키우는 것에 성공했다. 그 과정이 어떻든 간에 누구든지 이쪽을 존중하는 것이 마땅한 성과다.
돼지 새끼의 눈에는 그런 이기영이 꽤나 자랑스러운지, 존경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며 미소 짓기에 여념이 없다.
-흐흐흐… 거. 우리 형님 좀 귀찮게 하지 말라니까! 이 녀석들아!
-꺄아아아아악! 괴물이다!
-어흥!
-도망쳐어어!!! 근육괴물이다!!
‘지금 당장은 블랙마켓이고 나발이고 안 나올 거야. 지금은 청소부터 해결하는 게 먼저일 테니까.’
-켄지.
-어어… 왔어?
-부탁한 건?
-잠깐….
-덕구야. 잠깐 밖에 나가서 사람들 괜찮은지 둘러보고 있어.
-어? 어… 알겠소.
-…….
-…….
-뭐 보이는 거 있었어?
-여기저기 뒤져보기는 했는데… 딱히 나오는 게 없는 것 같은데. 물론 매번 그렇듯이 여기 아픈 놈들은 매번 아프고, 병 걸려 뒈질 놈들은 매일 뒈져나가지만… 딱히 역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너도 알고 있잖아.
-알지.
-애초에….
-역병 같은 건 없다는 거?
-그런데 왜 찾아보라고 한 거야, 도대체?
-송정욱이 약속을 어겼어. 아무래도 전하기로 한 이권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뭐… 뭐?
-아마 청소가 시작될 거야. 이미 제국 쪽에서 청소를 위한 토벌대를 보냈다는 소식이고….
-미… 미친… 그… 그래서 이제 어떻게 되는 건데.
-뭘 어떻게 돼? 다 죽는 거지.
-시… 시발 그럼… 다 죽는 와중에 왜 갑자기 역병 타령을 한 거야? 어차피….
-일단 표면적인 이유는 역병이니까. 제국이 매번 일을 거지같이 처리하기는 해도 뭐라도 하나 심어놨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 라헬이 역병을 제어하고 있다는 그림을 그려야 시간이라도 끌 수 있을 거 아니야.
-너… 너 안 도망가는 거냐?
-내가 여기 놔두고 어딜 가?
-설마… 돼지 새끼 때문이야? 돼지 새끼가 여기 사람들 불쌍하니까 같이 살 방법을 마련해 보자고 하디? 아니면… 그냥 네가 그렇게 판단한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여기 라헬이야. 라헬… 쓰레기촌 라헬이라고…. 서로 뒤통수치고, 맞고, 배신하면서 살아가는 라헬인데…. 뭘 기대하고 있는 건지… 후우…. 아, 아무튼 네가 남아있겠다고 하니까 다행이기는 한데…. 그,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계획은 있는 거지?
-일단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 전부 모아서 한곳에 모아놓고 격리시켜.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영감… 하 제길 치매만 아니었어도… 아무튼 영감한테 부탁해서 스캔 마법으로 싹 다 뒤져보라고 하고 보고서 작성해 놓고, 그래도 안 나오면 그냥 제일 몸이 안 좋은 놈 하나 잡아다가 역병이라고 우겨야지 뭐. 아까 말했다시피 우리가 이걸 컨트롤 하고 있다고 보여주는 게 중요해. 있던 명분을 막으면 그쪽에서도 눈치를 아예 안 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러고는… 내전 전범들이랑 숨어든 귀족 새끼들 싹 다 잡아 놔야지. 어차피 역병은 구실일 거야. 쟤네들 잡아 족치려는 구실, 우리가 먼저 가져다 바치면 돼. 라헬 남부랑 동부 쪽 애들한테도 싹 다 연락 넣어놔야 돼.
-그쪽이 협력할까?
-협력 안 하면 어떻게 할 건데… 자존심 때문에 전부 다 죽자고 하지는 않을 거 아니야. 당연히 우리 구역 쪽도 뒤져야 되고… 덩치를 너무 키웠어. 제길… 이건 내 실수야. 여기로 기어들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이토 소우타가 뒈진 뒤로 너무 허무하게 밀리다 보니까 여기까지 닿은 건지, 아니면 샤를롯트가 의도적으로 여기까지 밀어 넣은 건지… 아무튼 간에 싸울 수 있는 애들 전부 긁어 보아. 분명히 귀족 놈들 분명히 사병들도 데리고 있을 테니까.
-어… 으… 응….
-라헬 밖이나 근처 마을에도 분명히 있을 테니까. 레인저들 편성해서 그쪽 전부 다 알아보고….
-바깥에는 제국군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게 가능할까?
-누가 그 새끼들 넘어서 나가래? 선 안에 있는 지역을 1차적으로 뒤져보라는 거잖아.
-아… 알아들었어. 알아들었다고…
-믿을 만한 애들로 준비해야 할 거야. 그렇다고 너무 멍청한 놈들을 끼워 넣지는 말고, 똥오줌 못 가리고 귀족 놈들 혓바닥에 놀아날 만한 놈들은 죄다 거르라는 뜻이야.
-그럼 너는….
-우리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행차하신 별들과 접선해 봐야지.
-그게 가능할까?
-불가능한 게 어딨어? 직접 만나는 건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편지 몇 통은 보낼 수 있을걸. 그래도 여기 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예정이니까.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토벌대 지휘관도 말이 통할 만한 놈 같거든….
-…….
-김현성.
-김현성?
-전쟁 끝나고 파란 길드마스터로 취임했고, 제국에서 대놓고 밀어주고 있는 모양인 것 같더라. 린델에서도 꽤 유명인사야. 재능 있는 천재 검사, 이토 소우타를 미국 보내버린 전쟁 영웅. 여러모로 송정욱이나 욕심 그득한 놈들보다는 훨씬 나을 거다. 자세히 캐보지는 못했지만… 커리어 자체가 흠잡을 곳이 없어. 권력에 욕심이 있는 편도 아닌 것 같고….
-잘… 잘될까?
-잘돼야지. 리스크가 있지만… 일만 잘 풀리면 오히려 기회가 될 걸… 중앙에 우리 능력을 보여 줄 수도 있고, 어쩌면 린델과도 접점이 생길지도 몰라. 혹시 알아? 어쩌면 파란 길드에 스카우트돼서 린델과 파란을 재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지. 우리 돼지 새끼도 지원 팍팍 받아서 무럭무럭 자라고….
-그건 너무 꿈 같은….
-그래 꿈 같은 소리지. 근데 지금은… 이런 꿈이라도 꿔봐야지. 이것…밖에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게다가….
-뭔데?
-아니… 아니다. 동명이인이겠지.
이기영도 자신이 꿈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중앙에 능력을 보여준다느니, 파란 길드에 스카우트된다느니 하는 소리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 방증이리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이기영이 긴장한 것이 시야에 비친다.
허세를 부리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표정이 어둡다.
녀석이 시선을 돌린다. 시선이 닿아있는 곳에는 저 멀리서 박덕구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이기영이 중얼거린다.
-…….
-…….
-내가… 미쳤지… 제길….
-…….
-내가 미친놈이지… 제기랄….
-뭔 소리야. 갑자기.
-…….
-…….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지금 곧바로 부탁한다. 라헬 남부랑 동부 쪽부터 연락해 줘. 지금 쓸데없는 걸로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입단속 철저히 하고… 괜히 제국군들 자극하면 협상이고 뭐고 없으니까. 그날로 바로 끝이야.
-그… 그래.
-…….
-…….
-돼지 새끼!
-아. 형님. 볼일은 다 끝난 거요? 역병은… 어떻게 된 거요?
-전부 잘 풀리고 있어.
-흐흐흐… 역시 형님이요.
-…….
-…….
-덕구야.
-뭐… 뭐요. 갑자기.
-고맙다.
-뭐요… 낯간지럽게… 내가 더 고맙지! 이렇게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도 전부 형님때문 아니요! 아… 근, 근데 배가 좀 고픈데… 우리 밥은 언제 먹는 거요?
-…….
-…….
-내가… 미쳤지….
그리고 세계가 멈추고 깨진다. 이번에도 여러 가지 광경들이 비쳐온다. 송정욱과 함께 있는 이쪽의 모습, 현 시점보다 과거, 청소를 막기 위해 로비 아닌 로비를 했던 시점인 것 같았다.
-기영아. 안 죽어…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고… 응? 이만 일어나야지.
-헤… 헤헤….
-그래. 그렇게 웃어야지. 기영아. 그게 부탁하는 사람의… 응? 샌드백의 자세지. 그런데 진짜 작은 바위로는 안 올 거야?
-…….
-그래. 내가 너한테 뭘 물어보겠냐. 또 돼지 새끼 때문에… 그 놈의 돼지 새끼 때문에… 왜. 돼지 새끼가 여기 와서 더러운 일에 휘말릴까 봐 기분이 그래? 내가 하는 일은 더럽고, 네가 하는 일은 안 더럽냐. 이 새끼야?
-짜악! 퍼억! 퍼억!
-아! 아악!
-새끼. 엄살 부리는 거 봐라. 내가 특별히 너를 봐서 응? 그 간의 정을 봐서… 약속을 지키는 거야. 후우… 씨발… 진짜….
계속해서 세계가 깨어진다. 화면들이 휙휙 돌아간다. 송정욱이 등장할 때부터 제법 빠르게 돌아가는 느낌인지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간 이기영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정진호와 접선하는 장면은 제발 나오지 않아줬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는데,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돼지의 지분이 압도적이다.
-돼지 새끼! 돼지 새끼! 돼지 새끼!
-형님!
-하하하하하하핫!
물론,
-금마 클랜 부단장님.
-제가 기영 씨 봐서… 힘 좀 써드리는 거예요. 앞으로는 이런 일 없어요. 알죠?
-네… 네, 물론입니다.
-그럼… 오늘도 식사하시고 가시는 거죠?
-아… 오늘은….
-또 덕구 씨가 기다리실까 봐 걱정하시는 거구나? 걱정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처리해 드릴 테니까. 모험가 펍에 덕구 씨 자리 마련해 놨어요. 함께 사냥 갈 파티원들이랑 미리 안면 좀 트시라고….
-아! 감사합니다.
-뭘요. 우리 사이에.
중간중간에 다른 장면들이 나오기도 한다.
-형님 어디 다친 거요? 몸에 왜 이렇게 상처가….
-몰라. 새끼야. 잠이나 자자.
-거, 일어나 보쇼. 상처에 좋은 약들 좀 발라줄라니까.
-아니, 하지 마. 새끼야!
-아 쫌 일어나라니까!
멈추고 깨진다.
-형님 미안하오….
-꼴사납게 울지 마라. 돼지 새끼야. 내가 하면….
-나…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그래. 내가 하면 너는 더 잘할 수 있는 거야.
멈추고 깨진다.
-고맙다.
멈추고 깨진다.
-우리 돼지 새끼.
그리고,
다시,
간이 텐트에서 편지를 읽고 있는 김현성이 눈에 보인다. 아마 라헬에 있는 이기영이 보낸 편지가 분명할 것이다. 동시에, 이기영도 김현성이 보낸 답장을 읽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다음 페이지에 안기모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안기모 일러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