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86화
무대의 뒤편(7)
정황상 김현성의 편지는 이기영이 훼손한 것으로 보여 읽을 수 없었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에 문제가 없었다.
이기영의 편지로 김현성이 보낸 편지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녀석에게도 지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애초 청소 사건에 동의한 것 자체가 실책이었으니 잘못의 정도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기는 했지만, 어쩌면 한 번 즈음은 되돌릴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처음 받은 편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것, 이를테면 적의 함정일 수도 있을 가능성에 대해 떠올렸던 것은 어떻게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는 하다.
하지만 중간중간 다소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에는 약간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편지의 흐름을 보면 역병이 거짓이라는 걸 숨긴 채로 대응했으니, 김현성의 대응이 미흡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하기야 했을 것이다. 앞선 의심이 전부 풀리지 않았을 경우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지 않은가. 어느 날 갑작스레 자신의 거처 안에 남겨진 편지를 어떻게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암살자에 트라우마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고 있었던 녀석으로서는 이기영을 완벽하게 신뢰하기 어려웠을 것이 분명했다.
슬프게도 그게 녀석의 대응이 미적지근했던 이유는 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마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니, 조심스레 접근해야 한다고… 되뇌었겠지만, 제국에 무엇을 받기로 한 것이냐 이기영이 물어온 시점부터 놈이 적극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마 본인이 가진 것들을 잃기 싫었다는 심리도 기저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뭐 나름 이해는 돼.’
애초 김현성은 완전하지 않았으니까.
자신에게 들어온 권력과 힘을 포기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어쩌면 속으로 이기영의 말이 거짓일 거라고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드디어 안전해질 수 있고, 내 것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어떻게 갑작스레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겠는가.
만약 이게 단순한 욕심 때문이었다면 포기하기 쉬웠을지도 모르겠지만, 김현성에게 있어서 이번 작전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아닌, 자신의 생존에 대한 욕심이었다.
솔직히 김현성이 모든 것을 이기영에게 오픈하고 적극적으로 그를 돕기로 결심했다는 게 대견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시기가 조금 더 빠르지 못했다는 게 아쉬웠지만 말이다.
‘거기에다가….’
“…….”
“…….”
‘완전 빈껍데기 지휘관이었으니까.’
이 새끼가 조금만 더 정치 감각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진짜 무능 그 자체자너.’
그렇지 않아도 정치 감각이라는 게 없다시피 한 녀석이었다. 심지어 지금 회차에 들어선 타이밍에도 거지 같은 정치 감각은 김현성의 약점으로 남아 있지 않았던가.
오랜 전쟁으로 싸우는 것밖에 할 줄 모르고, 이제 막 24살이 된 김현성이 토벌대 전체를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넌센스다.
그 정도 규모의 병력을 다룬 적도 없었을 것이고, 심지어 그런 자리에 앉은 경험이 처음이었다고 장담할 수 있다.
대륙에서 굴러볼 대로 굴러본 정유라와 송정욱 같은 놈들이 휘하에 있었으니 사실상 토벌대 지휘관 김현성은 허수아비였다는 거다.
앞에서는 놈을 존중하고, 명령을 따르는 척하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 속으로는 김현성을 다루기 쉬운 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이방인들뿐만이 아니라, 제국군들 역시 마찬가지일 터.
‘이게 그 결과야.’
지휘관의 명령을 듣지 않는 병사들, 샤를롯트에게 따로 명령을 전달받은 제국군, 눈앞에 있는 공에 눈이 먼 이방인들, 무능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무것도 컨트롤할 수 없는 지휘관.
녀석이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결과가 보인다. 김현성이 도착하기도 전에 토벌대의 선발대가 라헬을 습격했고, 그대로 청소가 진행된다.
여기저기에서 화려한 마법들이 하늘로 치솟고 거대한 폭음과 함께 비명이 들려온다. 조금이라도 더 공을 챙기고 싶어 하는 이방인들은 오히려 제국군들보다 청소에 적극적이다.
-전부 봉쇄해!!!
-아아… 아아아아아아악!
-발사! 발사!!!
-단 한 명도 빠져나가게 하지 마라!! 지엄하신 여왕 폐하의 명이시다!
-실리아의 잔당들이다!! 적에게 자비를 베풀지 마라!!!
말 그대로 도시 하나가 쓸려가고 있었다. 저항하지 않는 이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저항 자체가 무의미하다. 애초에 마법사 인력이 압도적으로 부족했던 라헬의 방어마법은 떨어지는 화살조차 막을 수가 없다.
압도적인 위력을 지닌 폭탄이 계속해서 도시 위로 떨어지고 있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자니 이게 정말 현실이 맞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라헬 주민들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마 김현성조차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을 터였다. 녀석이 도착한 이후에는 상황이 거의 마무리 되고 있었던 느낌이었을 테니 말이다.
라헬은 큰 도시가 아니다. 물론 결코 작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마음먹은 제국군을 오랜 시간 버텨낼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이윽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성이 시야에 비쳐왔다.
예상했던 것처럼 도시 하나가 쓸려나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 실리아 내전의 전쟁영웅이었으니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겠지만, 전쟁과 학살은 엄연히 다르다.
김현성은 지금 그걸 실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본인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에 찬성했던 것인지, 지금에서야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아… 으….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말이 목에 막혀서 나오지 않는 모양, 그만두라거나 멈추라는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녀석도 깨달았을 것이다. 지금은 그런 말을 하는 게 전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자신이 명목뿐인 지휘관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힘이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김현성 님!
-김현성 님! 잠… 잠깐!
좀비처럼 터벅터벅 도시 안으로 진입한 녀석의 눈에는 자신의 손으로 일으킨 참상들이 눈에 들어왔을 터다.
새까맣게 타버려 정확한 신원을 파악하기 불가능한 시신들, 하지만 그들 중에 노인이나 아이가 섞여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김현성은 그 모든 걸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승전의 환호성이 들려온다. 물론 김현성과 같이 의문을 느끼거나 처참한 광경에 입을 꾹 다무는 병사들이 눈에 비쳐오기는 했지만 몇몇 이방인들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남기고 있었다.
-수고 많았어. 토벌대 지휘….
녀석의 어깨를 두드리는 한 이방인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순간적으로 어깨를 휙 돌린 김현성이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휘두른다. 아마 정황상 녀석이 토벌대 선봉의 중심이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김현성이 그나마 믿고 있었던 녀석일지도 모르겠다.
이 학살극을 막기 위해서는 손발이 필요했을 테니 누군가에게는 일을 맡길 수밖에 없었겠지.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뒤로 넘어가기는 했지만….
-하아… 하아… 후우….
-낄낄… 병신 새끼.
낄낄거리는 조소만 들려올 뿐이었다.
-…….
-후우… 후우… 후우….
-그것만 기억해. 김현성, 아니, 김현성 백작.
-…….
-내가 너 도와준 거야. 새끼야.
-…….
-내가 너 도와준 거라고! 새끼야! 그래서! 안 받을 거야?! 어!
김현성은 최대한 녀석과 멀어지고 싶어 한 것으로 보인다.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가는 김현성의 뒤로 계속해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 받을 거냐고! 김현성 백작! 어?!
-…….
-잊지 마! 내가 너 도와준 거! 잊지 말라고!! 알겠어!? 내가 너 도와준 거야! 이 새끼야!!!
서둘러 좁은 골목길로 이동한 김현성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다. 자기 자신이 찬성한 일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실감했는지 곧바로 허리를 숙인다.
-우욱… 우웨엑.
-…….
-우웨에에엑….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튜토리얼에서 이후로 처음 흘리는 눈물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24살 김현성에게서, 22살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그대로 무너질 것 같은 모습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난 이후, 김현성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곧바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변하고 싶다. 아니면 바꾸고 싶다. 힘을 가지고 싶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마도 이게 김현성이 선의의 중재자로 변하게 된 계기였을 것이다.
조금은 볼품없었던 검사가, 살아남는 것밖에는 떠올리지 못했던 검사가, 영웅으로 가는 계단을 오른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녀석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는 많은 것을 얻고 영웅으로 가는 계단에 올랐을 때, 누군가는 모든 것을 잃고, 밑바닥에 처박혔다.
허겁지겁 도망치고 있는 박덕구와 이기영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온다. 이미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봐왔던 광경이다.
‘이미 본 거자너.’
-버리고 가라는 말은 못 하겠다. 돼지야.
-형님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소.
-그래도 이만 두고 가는 게 좋을 거다. 몸뚱이는 무식하게 튼튼하니까. 너는 살 수 있겠지. 뭐… 조금 무섭기야 하지만 별로 후회되는 인생은 아니었는데… 네가 복수만 해주면 신날 것 같은데….
-거, 동정심 유발해서 버리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 아니요?
-이 새끼는….
-아무리 뭐라 말해도 안 버리고 가니까. 개소리하지 마쇼. 형님은 내가 살리니까.
-이빨 치지 말고 내려놔.
-허풍이 아니라 진짜라니까. 형님은 내가 살릴 거요. 거, 기억은 나는 거요?
-뭐가.
-형님이 내 목숨을 얼마나 많이 구해줬는지. 기억하냔 말이오.
-나는 별로 네 목숨을 구하려고 움직인 적은 없다. 네가 싹수 있어 보였고 그래서 너를 케어해 준 게 다야….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소. 형님이 뭐라 말하든 간에 형님이 나를 구한 건 마찬가지니까.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육체적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요. 못난 동생 때문에 몇 번이나 칼을 대신 맞아줘서 고마웠소.
-네가 죽으면 안 되니까… 그럼 투자한 게 얼만데… 돌려받아야지.
-던전에 갔을 때도 변호해 줘서 고마웠고,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마웠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나는 형님한테 구해지기만 한 것 같다니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정말로 그런 기억밖에는 없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신세 진 것밖에 없다… 이 말이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 차례라는 거요.
-같이 뒈질 거다….
-내가 분명히 형님은 살릴 거라고 이야기했소. 잊지 마쇼. 형님.
-뭐.
-형님이 할 수 있으면… 나는 더 잘할 수 있소.
-…….
-형님이 할 수 있는 건 나는 더… 잘할 수 있소.
-…….
-형님이… 할 수 있으면… 나는 더….
-…….
-더… 잘할 수 있소….
-…….
-형님이… 할 수 있으면….
-…….
-할 수… 있… 소….
-…….
-있… 소….
-…….
-…….
그래, 이미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본 적이 있는 장면이다. 지금의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장면 말이다. 1회차와 2회차는 확실히 분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네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장면이었다.
굳이 이걸로 감정이입을 하는 게 얼마나 멍청한 것인지, 이성적으로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다. 수도꼭지라도 틀어놓은 것처럼 계속해서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있다.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해 버리는 듯하다. 돼지가 나를 끌어안는 장면 이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몸으로 모든 것을 받아가면서도, 고통을 억지로 쑤셔가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몸으로 나를 지키기 위한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
계속해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다음 페이지에 집사 이지혜와 메이드 이기영의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집사 이지혜와 메이드 이기영의 일러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