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87화
무대의 뒤편(8)
이 정도면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몸에 새긴 건지, 영혼에 새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1기영이 박덕구를 잊지 않으려 수를 쓴 것만은 확실했다.
잔존사념 같은 것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럴듯해.’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애초 박덕구를 고기 방패로 쓸 생각을 했던 것도, 그냥 녀석의 덩치가 가장 크고 스탯이 나쁘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녀석이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우연이었다는 거다. 김현성이 회귀자라는 정보를 먼저 마음의 눈으로 읽었다면 어쩌면 굳이 박덕구를 이쪽의 품으로 끌어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끌어들였더라도, 돼지의 부족함을 실감하고 중반에 유기해 버렸겠지.
물론 이쪽 역시 돼지 새끼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사실이고 녀석이 없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첫 시작이 꼬였었다면 굳이 박덕구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다른 것들은 모두 제쳐두더라도, 내가 돼지 새끼에게 가지는 애정에 녀석의 잔존사념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내 몸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볼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미 전에도 한 차례 겪은 적이 있는 의심, 지금은 그저 잔존사념일 뿐이지만 이게 점점 커져, 어느 순간 갑자기 1기영이 내 몸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녀석과 내가 천천히 동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이 모든 것들을 보여주는 이유가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깨우기 위함이 아닐까,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되지만 한 번 즈음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니야. 너무 지나쳐.’
녀석이 내 안에 자신의 씨앗을 심어놨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을 1회 차의 이기영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녀석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신격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 혼자 섀도복싱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김현성을 회귀시키고, 돼지새끼에 대한 잔존사념을 남기는 것이 한계였을 터다.
결정적으로 만약 이걸 1회차 이기영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맞다면 굳이 김현성의 사연도 함께 보여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나는 김현성에게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놈이 처한 상황을 이해한다.
당시 김현성을 어렸고, 무능하고, 미숙했으며, 유약했다. 물론 비난받을 짓을 한 것은 마땅하나, 언제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 아니었던가.
만약 이걸 1기영이 보여주려고 한 것이 맞다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하수다.
물론 같은 것을 보더라도 서로 느끼는 바가 다를 테니, 1기영의 입장에서는 김현성의 무능이나 미숙함, 우유부단함에 대한 분노를 느낄 수는 있겠지만, 이 구역 김현성 악개인 나로서는 녀석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1기영 역시, 박덕구의 죽음이 없었다면 김현성에 대해 원색적이고 맹목적인 분노를 쏟아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걸 보여준 주체가 1기영이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이걸 보여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간다.
사실 답은 뻔하다고 생각이 든다.
“…….”
“…….”
‘대륙이겠지. 뭐.’
처음 이 세계로 빨려들어 오게 된 과정이나, 지금까지 봐왔던 것들을 떠올리니 그것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정체불명의 1회차의 바다는 전반적인 1회차의 상황을 무작위로 보여주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중심이 되는 것은 나와 김현성의 이야기였다.
굳이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시스템은 나와 김현성을 이 대륙의 공동 소유자 같은 개념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아니, 공동 소유자보다는 공동 양육자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독립 후 공중으로 붕 떠버린 대륙을 입양한 양육자 말이다.
이 대륙을 아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상황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육망성은….’
아픈 거지 뭐.
‘바이러스 독감 걸린 거자너.’
김현성과 이기영의 대륙의 개연성을 부과하기 위한 과정이기는 했지만, 직관적으로 표현하면 바이러스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무척 치명적이고 위험하지만 한 번 즈음은 무조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말이다.
그리고 이 바이러스의 백신이 무엇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김현성과 이기영일 게 뻔하지 않은가. 백신이자 양육자였으니 응당 이걸 치료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당연지사.
문제는 지금 두 양육자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아마 바이러스로 몸살을 앓고 있는 대륙의 입장에서도 무척 당황스러운 상황이 아니었을까.
자신을 돌봐주고 치료해 주어야 할 두 양육자가 이를 악물고, 서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갈라설 위기에 처해 있고, 심지어는 파국을 맞기 일보 직전이었으니 본인 나름대로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아마 이게 그 결과겠지. 적절하지 않은 예였지만, 엄마 아빠 싸우지 마. 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문제는 놈의 방법이 그리 올바른 방법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대륙을 관장하는 시스템의 의지는 말 그대로 의지일 뿐이다.
대륙은 생각할 수 없고, 어떤 것이 옳을지 판단하는 능력이 없다. 녀석은 자연의 법칙마냥 이 세계를 유지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거기에는 그 어떤 악의도 없고, 목적도 없다. 갑작스레 강림한 색욕과 영면의 군주를 튕겨낸 것처럼, 놈은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것을 뿌렸을 뿐이라고 추측된다.
우리 부모님이 서로 사이가 안 좋고, 숨기는 게 많은가 보다. 그러니까 내가 진실을 알려줘야겠어. 라고 생각하고 두 양육자가 꽁꽁 감추고 있는 비밀 보따리를 풀고 달려온 셈이다.
‘진짜 이 새끼 역대급 트롤러자너.’
김현성의 반응만 봐도, 답이 나온다.
‘사실 김현성이 제일 문제자너. 오히려 파국이자너.’
이기영이 가면 쓰레기였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설마 가면 쓰레기의 정체가 자신과 편지를 주고받던 사람이라는 것은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녀석의 팔이 덜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아마 표정을 확인하지 않아도 뻔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이쪽을 꽉 껴안는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진다.
“…….”
“…….”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침묵만이 감돌고 있다.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겠지만,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보자 멍한 김현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녀석도 눈물로 가득 차 있는 내 얼굴을 확인했을 것이다. 곧바로 시선을 피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내 얼굴을 기억 속에 담았음이 틀림없었다.
“아….”
“…….”
박덕구의 죽음을 확인한 이후에는 심지어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어마어마한 죄책감이 감돌고 있다.
그야 시바 내가 편지 형인지도 모르고 신나게 배때지를 쑤셔 박아댔으니 놈이 감히 날 바라볼 수가 있겠는가.
모든 원인과 그 시작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알게 됐는데 어떻게 녀석이 제정신일 수가 있을까.
무슨 염치로 가면 쓰레기를 증오하고 그에게 분노를 보낼 수 있겠는가.
당연히 나를 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물론 1기영과 2기영은 별개의 인물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느낀다고 해서, 당사자인 김현성도 그렇게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순히 볼 면목이 없는 것 정도가 아니다.
자기혐오로 얼룩진 얼굴, 당연히 호흡은 거칠어진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버린 듯하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 아마 녀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변명조차도 말이다.
‘그래. 뭐 여러 가지 오해가 있기는 했었는데… 애초에 청소에 동의했다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
거기에….
‘백작까지 낼름 받아먹기는 했자너.’
“…….”
“…….”
‘1기영이 병신도 아니고. 이건 진짜 나도 쉴드 쳐주기 힘들어.’
1기영 역시 중반부에 이르러서는 김현성이 청소를 막기 위해 발버둥 쳤다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놈이 작위를 받아 처먹었다는 게 문제가 될 확률이 높다.
물론 김현성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지난날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수단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생각해 보면 놈은 피로 얼룩진 작위를 받아 처먹은 위선자였다.
‘넌….’
넌 작위를 받았으면 안 됐어.
권력이나 힘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작위를 받지 않고, 홀로 그걸 이루어 냈어야 했다. 샤를롯트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 일어섰어야 했다.
개인적으로는 작위를 받은 것은 김현성이 할 수 있었던 최악의 실수였다고 본다.
1기영이 대뜸 데뷔탕트 파티에 나타난 김현성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나름의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1기영의 입장에서는 놈의 모든 행동이 기만이었고, 변명처럼 들렸을 것이다.
피로 쌓아 올린 탑에서 호의호식하는 것으로 비쳤을 수도 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놈은 몰락하지 않고, 여전히 백작이었다. 그 작위로 이방인들의 처우개선이나 대륙민들을 도우며, 대륙이 파국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었겠지만, 1기영이 느끼기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위선이다.
1기영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
“…….”
‘근데 1기영은 1기영이고….’
“…….”
‘나한테는 이득이 되는 상황은 맞아.’
“…….”
‘나는 세탁됐자너.’
물론 김현성이 어찌 됐건 간에 나는 세탁됐다는 사실이 기쁘게 다가온다.
복수할 이유가 있었고, 복수할 만했다. 물론 해왔던 악행 전부를 보여준다면 재평가가 될 여지가 있기는 했지만, 슬쩍 보기에는 그 모든 악행들 또한 정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불안해진 쪽은 김현성이다.
대륙의 의지가 트롤짓을 해버린 것은 사실이나, 엄밀히 따지면 내게는 유리한 흐름이다.
‘약해져 있자너.’
김현성이 약해져 있다.
‘이거 기회자너.’
여기에서 슬쩍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 맞다.
‘얘 돌아오겠자너.’
1기영을 대신해 용서해 주겠다고 말하는 것은 녀석에 대한 기만임을 알고 있으나 살 사람은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나중에 개인적으로 합의를 보든가 하겠지 뭐.
‘이 정도면 충성도 오르는 소리 제대로 들릴 것 같자너.’
대륙과 시스템의 의지에게는 감사의 인사라도 갈기고 싶어진다. 하지만 녀석에게는 잘된 일이다.
‘엄마 아빠 화해할게. 이제 안심해. 오랜만에 시바 가정 제대로 돌아간다.’
녀석을 꽉 껴안아주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기… 기영… 씨….”
“괜찮아요. 현성 씨.”
“흐으윽… 흐윽….”
하지만.
“…….”
“…….”
김현성의 눈을 보고, 이 새끼가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도대체 시발 이 새끼의 앞에 있는 대단한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 난리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아직도 내게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너무나 당연하게도,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라고 할 줄 알았어? 이 저주받을 위선자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