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91화
소실(1)
‘제길….’
“하아… 후우… 하아… 하아….”
‘시바 진짜….’
“하아… 하아… 후우우… 하아… 하아….”
피로 얼룩진 손과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진 미켈레를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
“…….”
‘실수했어.’
실수했다는 것이었다. 순간 이성을 잃어버린 것 같아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드문드문 돌로 녀석의 얼굴을 내려치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정황상 놈의 얼굴을 보자마자 달려가 머리를 내려찍고 쓰러진 녀석 위에 올라타 마구잡이로 돌멩이를 든 손을 휘둘렀던 것 같았다.
당연하지만 멍청한 선택이었다. 이성을 잃은 것도 그랬고,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로 녀석에게 달려든 것도 그랬다.
녀석이 전투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하지도 않고, 그냥 이성을 잃은 채로 무작정 달려든 것이다.
결과는 나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래도 녀석에게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는 게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극단적으로 정보가 부족한 상황이었으니 뭐가 됐든 간에 녀석에게서 정보를 수집했어야 했다.
어째서 김현성과 함께 1회차의 대륙으로 왔던 것인지, 김현성에게 무엇을 들었던 것인지, 왜 김현성에게 들러붙었던 것인지, 지금 이 사태에 대해서 아는 게 있는 것인지.
설령 녀석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질이 터무니없이 낮을지라도, 녀석과 조금이라도 더 대화하며 빼낼 수 있는 것을 빼냈어야 했다.
물론 녀석이 죽어 마땅한 것은 사실이나, 다른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할 정도로 이성을 잃었다는 부분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히 뭔가를 말하려고 했었던 것 같았는데… 혹시나 살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보기도 했지만 완전히 피떡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럴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한 가지 의문이 들었던 것은 미켈레가 그 모든 과정에서 저항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
“…….”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아 놈이 저항하지 않은 것을 확실하게 알 순 없었지만, 만약 녀석이 저항하려고 했다면 충분히 내 행동을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꽤 자라기는 했지만 아직 애기영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고, 놈은 건장한 성인 남성 아니었던가.
분노 버프가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희라 누나도 아니고 근력이 강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언하건대 녀석이 저항하고자 했다면 아마 저기 누워 있는 건 녀석이 아니라 내가 됐을지도 모른다.
‘평범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당장 이곳을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것부터 녀석이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평범하지 않다는 건, 무력을 겸비하고 있을 확률과 비례하는지라 돌멩이 하나에 이렇게 녀석을 때려눕혔다는 게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다.
갑작스레 내 안에 숨어 있던 천부적인 전투능력이 각성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그럴 확률은 한없이 희박하다.
‘도대체 시바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머리를 식히기 위해, 손에서 돌멩이를 툭 하고 떨어뜨렸던 바로 그때였다.
“이제 좀 흥분이 가라앉으셨습니까?”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빠르게 고개를 돌리자….
“어? 너….”
“이기영 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는 미켈레 박사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지만 가까스로 올라오려는 화를 내려 앉힌다.
바로 몇 분 전에 실수한 것을 복기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았던가. 돌멩이 살인마마냥 다시 돌덩이를 쥐어 들고 녀석에게 돌진하는 것만큼 멍청한 행동은 없을 것이다.
그것보다는 녀석이 어째서, 어떻게 내 앞에 나타났는지 알아보는 것이 먼저였다.
“어….”
“…….”
“…….”
“너….”
“아마 생각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녀석이 성검용사마냥 부활한 것이 아니다. 아직도 내 밑에는 피떡이 된 미켈레가 널브러져 있다.
환영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내 직감은 이 모든 게 현실이라 판단하고 있었으니까. 내 밑에 깔려 있는 미켈레도, 지금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미켈레도 틀림없이 실존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판단하는 것은 빠르다.
‘한 시점에… 여럿이 존재할 수도 있는 거야.’
아마도, 여기에 널브러져 죽어 있는 것은 미래의 미켈레일 것이다.
미래의 내가 희라 누나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을 때부터, 머릿속에 생각해왔던 가설이 확실시된 셈이었다.
한 시점에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공존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니, 이론적으로는 무한대로 공존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 내일 모래의 내가, 일주일 뒤의 내가, 한 달 뒤의 내가, 일 년 뒤의 내가 모두 한 시점에 공존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걸 의도할 수 있는지 의도할 수 없는지는 아직 정확히 판단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육망성을 돌아다니다 보면 겹치는 시점이 하나 즈음은 존재할 것이다.
이곳에서 4년 동안 머물러 있었던 김창렬을 예로 들면 조금 더 생각하기 편할지도 모른다.
아마 현시점의 김창렬이 계속해서 육망성을 타고 차원 여행을 시작한다면 언젠가는 본인이 머물렀던 4년 안의 과거, 어느 시점에 당도할지도 모른다는 거다.
같은 예로, 지금의 내가 계속해서 육망성을 타고 지금보다 더 과거 시점으로 향하는 포탈로 빨려 들어간다면, 데뷔탕트 어느 시점인가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나와 영애들이 모여 있던 바로 그 시점으로 말이다.
육망성 자체가 한 시점을 랜덤으로 골라 차원여행을 시켜주는 시스템인지라, 굳이 확률로 따지자면 천문학 적으로 희박한 확률이겠지만….
‘이곳은 달라.’
노을빛으로 물든 이 세계는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내가 마주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이 세계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 동안 존재하고 있었을 테니까.
아마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미켈레 박사는… 꽤 오랜 시간을 이 곳에서 기다렸을 것이다. 나를 만나기 위해서, 혹은 미래의 자신과 내가 마주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얼마나 기다렸지?”
“그리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녀석의 말이, 내 가설이 전부 사실이라면….
말인즉슨….
“…….”
“…….”
‘어느 시점에서는 김현성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몰라.’
아니, 확실하게 살아 있다.
분명히 살아 있을 것이다. 나와 마주친 게 미래의 김현성이라면, 과거와 현재의 김현성은 어느 시점 어딘가를 유영하고 있다.
‘이걸 수정할 수 있어.’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 정하얀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그때는 어느 것 하나 바로잡지 못했지만, 그건 바로 잡을 수 없는 정해진 이야기, 이를테면 무슨 짓을 해도 결과가 돌아오는 대륙의 주요 서사였다.
김현성은 1회차의 주민이 아니다. 물론 마음에 걸리는 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를테면 어째서 김현성은 모래로 변해 버렸는가와 같은 의문이 남아 있었지만….
일단은 눈앞에 나타난 미켈레 박사를 향해 입을 여는 것이 먼저였다.
천천히 녀석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머리 색깔이 분명히 더티 블론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완전히 금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보자마자 쳐 죽였어야 했어.’
금발 머리, 특히 금발 머리 남자와는 상성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되새긴다. 특히나 저렇게 이질적인 종류의 금발은 괜스레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달라진 것은 머리 색깔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더 눈에 띄는 것은 녀석의 분위기였다.
마음의 눈에 여전히 읽히지 않았지만, 굳이 마음의 눈으로 읽지 않더라도 녀석이 어떤 존재인지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대로….
“…….”
“…….”
“너… 위에서 왔구나.”
“…….”
“처음 뵙겠습니다. 직급은 4급, 직책은 차원 관리자, 이름은 미카엘이라고 합니다.”
“…….”
“…….”
“처음 뵙겠습니다?”
“미켈레 박사가 이기영 님을 뵌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제가 이기영님을 뵙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때도 그 새끼 안에 숨어 있었구나.”
“깨어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황당하게 들려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냥 튜토리얼에서 뚝 떨어져 은거하듯 살고 있는 박사가, 아무 능력도 없는 녀석이 갑자기 젊어져 김현성과 함께 이곳을 거닐었다는 것이 더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당연히 지금은 이 새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다른 목적이 없지 않을 거라고는 말할 수 없었으니까.
일단 녀석이 밀입국자라는 사실만으로도 녀석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물론 우리 대륙은 위쪽과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 무척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자신과 파장이 맞는 인간을 찾아내고, 놈에게 씨앗을 뿌리고, 발아하기를 천천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겠지. 아마 미켈레 박사처럼 놈에게 잘 맞는 상대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확인한 미켈레는 실제로도 올곧다고 말할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었으니까. 신의 그릇으로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당연히 녀석이 젊어지는 것은 미켈레 박사와 미카엘이 융화되는 과정 속에서 일어난 현상일 것이고, 김현성 역시 처음에는 녀석이 미카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확률이 높을 것 같았다.
만약 우리쪽이 입국 허락 도장을 찍었다고 해도, 본신으로 현현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놈의 몸에서 신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껍데기만 둘러쓴 모양새였다는 거다.
“혹여나 오해하실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그는 아직도 제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제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와 상호동의하에….”
“누가 그딴 게 궁금하대? 내가 지금 그 몸 안에 주도권 같은 걸 신경 쓸 상황인 것 같아? 네가 하루에 몇 시간 동안 그 몸을 쓰기로 계약되어 있는지, 얼마나 제한적으로 몸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는지, 미켈레 그 새끼가 네가 하는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지 없는지, 하나도 관심 없다고. 내가 궁금한 건,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느냐야. 어째서 네가 우리 대륙에 들어와 있느냐라고….”
“…….”
“…….”
“정확히는 이 사태에 도움을 드리기 위해….”
“누가 네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어. 이 개새끼야. 내가… 언제 너희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 있었어? 누가 너희한테 살려달라고 이야기하기라도 했어?”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
“물론 이기영 님과 베니고어 님, 그리고 이 대륙을 관장하고 계시는 많은 분들께서 저희들을 반기지 않는 것을 알고 있습니만, 전 차원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이 문제를 좌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곳은 그저 삶의 터전이나, 조금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한 차원의 파멸은 전 차원의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나 차원 독립 문제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일어나지 않았던 이례적인 상황입니다. 저희들은 이 이례적인 상황이 초래할 문제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면 로헨 역시 영향을….”
“거기가 시바 망하든 말든 뭔 상관이야. 거긴 엄연히 내 땅이고, 어떻게 관리할지 판단하는 것도 내 몫이야. 내가 지금 바로 거기를 날려 버리든 말든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
“…….”
“아니, 백번 양보해서 네가 내 상황을 이해한다고 쳐도… 어째서 나를 먼저 찾아오지 않았지?”
“첫 번째는 제가 아직 깨어나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저를 반기지 않으실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이다.
녀석이 외부에서 들어온 초월자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장담하건대 녀석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검 휘두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순진한 새끼를 꾀어냈다?”
“…….”
“전 차원의 안전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에 순진한 새끼 하나 꼬여내서 이 사태를 한 번 막아내 보려고 한 거다? 그래서 이 개새끼야. 지금 이 게 그 결과야? 내가 널 어떻게 믿을 수 있는데?”
“솔직히 말씀드리건대, 절대 이기영 님을 기만하거나, 모욕하려는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노을빛의 검신께서 소멸하는 것 또한 저희가 바라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세 번째, 결정적으로 희생과 부활의 신께 말씀을 드리지 못한 이유는, 노을빛의 검신께서 그리하길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노을빛의 검신, 김현성 님과의 계약 때문이었습니다만….”
“…….”
“이미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기영 님.”
“…….”
“…….”
“이곳에 알타누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