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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492화 (1,490/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492화

소실(2)

“이곳에 알타누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바.’

“정확히 이 세계에 알타누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

‘역시 없었던 거였구나.’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모르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지만,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충격적인 이야기도 아니었다. 알타누스는 이미 소멸된 존재였으니 말이다.

물론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의 사례를 생각해 보면 그녀의 의지가 아직 대륙에 잔존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확실히 알타누스의 의지라는 것은 대륙 어딘가에 부유하고 있다.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에 의해 나는 그녀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육망성 안의 세계에서 그녀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이건 알타누스와 베니고어의 대륙이 아닌, 나와 김현성의 대륙이었으니까.

알타누스와 베니고어가 만드는 세계가 아니라, 이기영과 김현성이 만드는 세계였으니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알타누스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물론 의문이 아예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알타누스가 육망성 안의 대륙에 없다면, 이곳은 누가 관리하고 있는 것인지, 성지훈에게 성검을 내린 것은 누구인지, 녀석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은 누구인지, 사제들은 신성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제국의 교단은 대체 누구를 섬기고 있는 것인지, 따위의 의문점 말이다.

그에 대한 해답은 아마 녀석이 이야기해 주지 않을까.

“물론 저 역시, 알타누스가 없는 이 세계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저뿐만이 아닙니다. 아마 그 누구도 이 사태에 대해 정확한 답을 내릴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 사태와 같은 사례가 이전까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이를테면 이 사태는… 새롭게… 정의된 자연법칙 같은 것입니다.”

“너희들도 모르고 있는 것이 있나?”

“저희들은, 아니, 우리들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불멸하며, 스스로를 신이라고 자청하고 있지만, 사실상 시스템의 허락을 받고 한정된 범위 내에서 활동하는 관리직에 불과합니다. 일부는 이를 굉장히 불쾌하게, 또는 모욕적으로 여기기는 하지만, 제가 느끼기로는, 여전히 우리들은 전능하지 않습니다. 물론 조금 더 많은 접근 권한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는 모양입니다만… 그들도 결코 시스템 아래에서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제한적인 자유는 누릴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

“너도, 더 많은 접근 권한을 가지고 있는 이들 중 한 명인가?”

“저는 단순한 4급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럼, 더 많은 접근 권한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누가 있지? 1급 정도면 더 높은 권한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건가? 시스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도 가능한가?”

“…….”

“…….”

“…….”

“…….”

“이곳이 완전한 1회차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냥 무시하시겠다.’

“노을빛의 검신과, 희생과 부활의 신께서 이 대륙을 독립하신 이후로 만들어진 새로운 1회차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겠지요. 실제 1회차에서는 육망성도, 노을빛의 검신과 희생과 부활의 신께서 개입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

“편의상 본래의 1회차를 0회차로 분류하셔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알타누스 님과 함께 소실된 세계선 말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추측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저는 육망성 안의 1회차가 0회차의 일부를 그대로 다운로드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 나도 그 생각 방금 했어.’

애초에,

그것밖에는 답이 없을 테니까.

이를테면 성검용사가 받은 메시지 같은 것들도 그대로 잘라내기, 붙여넣기 했을 것이다. 아니, 메시지뿐만이 아니다. 이 대륙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인간들도 잘라내고 붙여놨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혹여나 이 육망성 안에 사는 인간들이 더미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복사 붙여넣기가 아니라, 잘라낸 다음 붙여낸 것이라면 더미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물론 0회차도, 1회차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 모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중요한 것은 이미 컴퓨터 안에 옮겨진 파일들이 아니다. 완전히 소실되어버린 알타누스라는 파일이었다.

당연히 우리의 입장에서는 문제가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2회 차는 알타누스가 스스로를 갈아 넣으면서 만들어진 세계선이었으니 말이다.

알타누스는 다른 녀석들과 같은 평범한 파일이 아니다. 물론 성검용사나, 이기영, 김현성, 정진호 같은 굵직굵직한 파일들도 중요하다.

아니, 그들뿐만이 아니다. 이 대륙을 구성하는 주민들, 이를테면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이나 빅보이 패밀리 같은 녀석들의 파일들도 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데 필수적으로 필요한 파일이다.

이 삶의 터전 그 자체와 대륙을 유지하는 신성 역시, 육망성의 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이 모든 파일들도 알타누스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알타누스는 단순한 파일이 아니다. 우리 대륙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서사를 완성시켜야 할 프로그램이다.

그녀 없이는 이 컴퓨터를 재부팅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

“…….”

알타누스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누군가 그녀를 대신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바. 시바. 시바.’

애초에 이 사태 자체가, 김현성과 이기영의 대륙이 되는 개연성을 충족시키는 과정이 아니었던가.

아마, 이게 우리가 충족시켜야 할 가장 중요한 개연성이었을 것이다.

아마, 이게 우리가 충족시켜야 할 가장 마지막 개연성이었을 것이다.

‘시바. 시바. 시바. 시바. 시바.’

곧바로 정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째서 김현성의 존재가 사라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째서 김현성이 모래가 되어 사라졌는지는 뻔할 뻔 자였다.

어째서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끊어졌는지도 뻔했다.

어째서 김현성을 유지하던 많은 퀘스트들에 락이 걸려 있었는지도 답이 나온다.

“…….”

“…….”

“김현성이… 대신 했구나?”

“…….”

“그래서… 그래서 김현성이, 정확히는 김현성들이, 이 시간 선에 존재할 수 없는 거야.”

“…….”

“지금… 김현성으로 인해 이 세계가 재구성되고 있는 거야.”

“…….”

“그래서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거구나? 그 멍청한 새끼가….”

괜스레 하늘을 바라본다.

평소보다 더 붉게 느껴지는 노을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이렇게 완벽하게 개연성을 충족하는 이야기가 또 어디 있을까.

지금 세계를, 지금 나를 비추는 붉은 노을이 바로 녀석이다.

이렇게 완벽하게 끝을 낼 수 있는 이야기가 또 어디 있을까.

노을빛의 검신이 스스로 자신을 희생하고, 세계를 노을로 물들여 모든 것이 재탄생하게 한다니….

잊혀진 신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서사이지 않은가.

노을로 시작하고, 노을로 끝을 맺을 수 있다니, 어떤 것을 가져와도 이보다 더 완벽한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녀석으로 인해, 대륙이 재부팅되고 있다. 녀석으로 인해 세계가 재탄생되고 있다. 녀석이 지금 다시 태어나게 하려는 세상을 비추고 있다.

이 노을빛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다. 이 노을빛이 세상 곳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껴지는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다.

“…….”

어째서 녀석이 미켈레의 병원에서 허구한 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째서 녀석이 사라지기 마지막 날, 후련한 표정을 지었는지도 말이다.

이미 녀석은 그 시점부터, 이 육망성의 세계에 대해 듣고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시점부터 이미 육망성을 노닐었는지도 모르겠다.

육망성 안의 세계와 2회차의 세계의 시간개념은 비례하지 않는다. 정확히 몇 대 몇의 비율인지는 확인할 수도 없고 확인할 방법도 없었지만, 육망성 안의 세계에서 지낸 시간은, 2회차의 세계에서는 찰나가 아니었던가.

김현성이 되돌아오지 못하고 사라졌던 것은, 이미 이 육망성 안에서 노을이 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미 한참 전부터, 녀석은 이 대륙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어렴풋이, 아니, 분명히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놈은 멍청했으니까.

그렇게 멍하니 2회차의 세계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녀석은 자신의 마지막을 고민했을 것이다. 노을로 시작된 이야기는 노을로써 끝을 맺어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겠지.

이것 외에는 다른 해답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스스로 반쯤은 결론을 내어버린 채로 말이다.

그렇게 녀석은 그곳에서 홀로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야 내게 이로울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 아마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러 가지 고민을 했을 게 뻔했다.

당연히 무서웠을 것이 틀림없다. 김현성은 겁이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새끼가 아니었던가.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녀석은 죽는 것보다 혼자가 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사후가 있는지, 없는지도 정확히 모르고, 본인이 갈려 나간 이후에도 어떻게 되는 것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그 무엇보다 두려웠던 것은 눈을 감은 이후에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였을 것이다.

그 두려움 때문에, 녀석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고민했고,

결국에는 자신이 노을이 되기로 결심했다.

아니, 갈려 나가는 게 아니라 노을이 되는 거라고 스스로 자위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고서는 김현성이 용기를 내지 못했을 테니까.

노을이 되면,

‘와… 혹시 혼자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 거 아니지? 현성아?’

노을이 되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 아니지? 지켜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 아니지? 너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지?’

노을이 되면,

‘함께 있는 거라고 막 이딴 병신 같은 생각한 거 아니지? 우리 현성이 그런 이상한 생각 하는 사람 아니지?’

어처구니없는 발상이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이렇게 멍청하고, 창의적으로 갈려 나갈 생각을 하다니, 다윈상이라도 수상해야 알 맞는다.

겨우 그런 이유로 그런 큰 결심을 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김현성이라면,

‘와 시바… 진짜 멍청한 새끼자너….’

다른 누구도 아닌 김현성이라면 왠지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을 것 같다.

‘진짜 병신 새끼가 따로 없자너. 멍청한 줄은 알고 있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멍청하자너.’

이 새끼가 나한테 노을 진 하늘을 판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아니, 시바 애초에 나한테 말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도대체 지가 아는 게 뭐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개지랄을 하고 다닌단 말인가.

물론 놈은 자신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 셈이다. 지금까지 펼쳐왔던 이기영 희생쇼를 지켜보던 놈의 심정도 이해가 가기는 했지만 도대체 지가….

‘취소자너. 시바 사과고 나발이고 전부 다 취소할 거자너.’

물론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확실하게 되돌릴 것이다.

회귀는 순간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재부팅은 진행 중이다. 로헨을 바꿀 때에도 이상 현상과 함께 시간이 꽤 걸렸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아마 아직도 시간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아직 노을이 되지 못한 김현성이 과거 시점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김현성은 단지 이 시점에 존재하지 못할 뿐이라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다. 김현성을 되돌릴 수 있다.

‘이 새끼 만나기만 하면 욕 한 바가지 해줄 거자너.’

그 어떤 때보다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

‘제대로 교육시켜 줄 거자너.’

그래, 냉정해야 하지만,

‘이 멍청한 새끼 때문에, 진짜 나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냐구….’

호흡이 고르지 않다.

‘시바 속 터져 진짜. 내가 속이 터져서 진짜….’

눈앞이 점점 흐려진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게 된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게 된다.

손을 타고 무언가가 흘러내린다.

흘러내린 것이 바닥으로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다음 페이지에 천관위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천관위 일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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