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93화
소실(3)
물론 감정을 추스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왜 이렇게 감정적으로 변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냥 평소의 김현성이 하던 것처럼, 멍청한 놈이 멍청한 행동을 저지른 것뿐이었다. 김현성답지 않게 문제를 해결해 버린 게 오히려 문제가 되었을 뿐이다.
그래, 조금 큰 관점에서 보자면 김현성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성공했다. 대륙이 바라고 있던 개연성을 완벽하게 충족시킨 셈이었다.
본래 녀석의 자리가 저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결말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 결말을 납득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놓고 판단한다면 당연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모든 이야기가 끝난다니,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김현성이 사라지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게 이 대륙 이야기의 결말이라니, 이게 우리 이야기의 끝이라니,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시스템의 입장에선 이게 아름답고 그럴듯한 결말처럼 느껴질지는 몰라도 나는 결코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지만….
‘너도 납득하기 어렵구나?’
이 결말에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미켈레, 미카엘 역시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차원 관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어찌 됐건 간에 김현성으로 인해 이 초유의 사태가 해결된 셈이 아닌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녀석의 임무는 김현성이 노을이 된 시점부터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구태여 이곳에 당도해 나를 찾아왔다는 건, 녀석 역시 이 결말을 바꾸고 싶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리라.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한참을 엎드려 고개를 숙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당연지사. 슬그머니 눈치를 보자 머뭇거리는 듯한 미카엘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이미 한차례 녀석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는 했지만 확실히….
‘너… 착한 새끼였구나?’
놈이 김현성과 내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녀석도 예전에 소중한 것을 잃어본 기억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김현성과 함께 육망성 안의 세계를 유영하고 있는 동안 녀석에게 공감하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정황상….’
아마 정황상 전자의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녀석은 일반 관리직이 아니라 일선에서 직접 뛰는 현장직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꽤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본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집단에 인간의 몸을 빌려 들어온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녀석은 로헨에서 죽치고 있던 쓸모없는 관리자들과는 다르다. 함께 활동하던 동료들을 잃어본 적이 있다고 가정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고 싶은 마음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놈이 미켈레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김현성이 알타누스를 대신한다는 계획에 동의했을 리가 없자너.’
녀석도 녀석 나름대로, 김현성과 함께 더 나은 결말을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심지어 김현성과 맺은 계약도 그리 불공정한 계약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아마 주도권도 김현성이 쥐고 있었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협력을 요구하는 대신, 이기영에게는 이 모든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정도겠지. 김현성의 소멸로 계약이 끝나자마자 이렇게 쫄래쫄래 나타나 입을 터는 것만 봐도 그렇다.
녀석 역시, 김현성이 갑작스레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녀석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지만 미카엘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위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자의적인 뜻일 확률이 높다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확률이 높다.
놈을 용서한다거나, 그냥 내버려 둔다는 의미가 아니다.
막말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녀석이 뭐가 됐든 놈의 손을 잡았어야 했다. 적어도 목적은 일치하니 말이다.
문제는 녀석과 나의 첫 만남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일단, 일단….
‘더 울어보자.’
그간 너무나 까칠한 모습을 보이기야 했다. 심지어 돌로 사정없이 얼굴을 내려찍는 사이코패스 같은 면모를 보이기도 했지만, 아직 개선의 여지는 있다.
그래,
‘기영이는 작고 무해한 고슴도치자너.’
그런 설정이 괜찮은 것 같다. 그저 너무 많은 가시가 박혀 있던 것뿐이다. 본인조차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가시 말이다.
자신이 들고 있는 소중한 것들은 지키기 위해 언제나 날이 서 있는 상태였고, 언제나 가시를 세우고 있었지만 그 안은 너무나도 작고 연약하다. 살짝만 건드려도 곧바로 무너져 내리는 상태였다는 거다.
지금이 바로 그 무너진 상태라고 하는 것이 알맞다.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몸, 이러다 실신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처절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정답이다.
이제는 목이 쉬어서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상황을 제대로 살필 여유도 없다.
‘불쌍하지? 그렇지? 나 지금 불쌍하게 보이는 거 맞지?’
이러다 정말 기절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김현성이었던 것을 손으로 붙잡으며 오열하는 것도 필수적으로 해야 할 행동이다.
계속해서 흩날리려고 하는 것들을 억지로 밀어 모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누가 봐도 정상처럼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가시가 전부 다 빠져 버린 고슴도치의 모습이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지?’
“…….”
“…….”
‘그래도 위로는 해줄 거자너. 너도 일말의 책임감은 느끼고 있을 거 아니야. 네가 원하지 않았던 결과라며… 그냥 변명하자고 여기까지 찾아오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아, 죄송하게 됐습니다. 라고 말하려고 온 건 아닐 거 아니야.’
아니나 다를까.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조심스레 말을 이어오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래, 있을지도 모르겠지.’
녀석이 먼저 되돌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고무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하책, 이미 김현성이 과거 시점 어딘가에 부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기도 했지만 일단은 조금 더 칭얼거려 줘야 한다.
이성적으로 이 사태를 바라볼 수 없다는 스탠스를 그대로 유지해 줘야 한다.
“웃기지 마… 웃기지 마… 어째서 나한테 먼저 찾아오지 않은 거야… 어째서… 흐으으윽… 어째서 먼저 찾아오지 않은 거냐고… 흐으윽….”
“아직 전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웃기지 마!!!!!”
“이기영 님.”
“이 개새끼!!!! 네가!! 전부 네가!! 흐윽… 흐으으으으으윽… 으으윽….”
“이 시점보다 더 과거의 김현성 님은 아직 육망성 안의 대륙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뭐… 뭐?”
“확실하게 말씀드리건대, 아직 이 시점까지 당도하지 않은 김현성 님께서는 분명 과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직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
“…….”
“아….”
‘이제 깨달았자너.’
“그… 그렇구나… 어째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
“네.”
“미래를 바꿀 수 있어.”
“네.”
절박한 표정으로, 가쁜 호흡으로, 김현성을 되찾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느낌으로,
“어떻게 해야… 이걸 바꿀 수 있지?”
“그건….”
‘네가 대신 갈리면 되잖아. 그렇지?’
“송구하지만 아직까지는… 실제로 노을빛의 검신과 함께 다른 답을 찾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조사를 실시했지만 정확한 해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김현성 님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그 이후를 생각하는 것보다는 일단 노을빛의 검신을 찾고 확보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아니, 나는 그다음도 중요해.’
물론 녀석의 말대로, 김현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방법을 찾는 것은 그다음이었지만, 그럴듯한 계획이 없다면 김현성을 설득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첫 번째 계획은 역시….
‘미카엘 이 새끼가 대신 들어가는 거야.’
미카엘이 알타누스를 대신하는 것이었지만 페널티를 받고 있는 저 몸뚱이를 보고 있자니 녀석이 알타누스를 대신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래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게 있으니 훌륭한 소재가 되어주지 않을까.
두 번째는….
‘로헨.’
대부분의 신들이 전부 사라진 대륙이었으니 대신할 놈을 찾기는 꽤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곳에서도 가능성 있는 재료들이 많지 않았던가.
한 놈으로 안 되면, 두 놈으로, 두 놈으로 안 되면 세 놈으로, 세 놈으로 안 되면 대륙 전체를 이용할 수도 있다.
그 외에도 김현성을 대신할 수 있는 옵션들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일단 가장 가능성이 높은 옵션은 위에 있는 두 개 정도.
물론 대륙이 원하는 완벽한 결말을 충족시키는 개연성을 확보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이건 김현성과 이기영의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뭐든 시도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래… 일, 일단 현성이를… 흐윽….”
“…….”
“흐으윽… 흐윽….”
“이기영 님.”
“…….”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는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 넌 자격 없어. 이 새끼야.’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응. 그 어느 때보다도 냉정해. 네 뒤통수에 칼 꽂을 날만 기다리는 중이야.’
“너….”
“지금 당장은 저를 완벽하게 신뢰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제가 당신들을 도우러 왔다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분명히, 정답은 존재합니다. 당신들은 조금 더 나은 결말을 맞이할 자격이 있습니다.”
“…….”
“…….”
“힘드시겠지만 저를 믿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
살짝 위를 올려다보자 손을 뻗고 있는 금발 새끼의 얼굴이 시야에 비쳐온다. 그래도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는 인지하고 있는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은 가관이었다.
당장 달려들어 놈의 미간을 돌덩이로 찍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 만무, 일단은 여기서는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이 정답이었다.
“절대로….”
“…….”
“김현성이 만에 하나라도 잘못된다면 절대로 널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고슴도치 기영이!’
“이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야. 미카엘. 너뿐만이 아니라, 너희들, 이 사태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새끼들은 전부 다 죽여 버릴 거야. 아니, 그냥 죽이지 않을 거야. 차라리 지옥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최대한,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 버릴 거야. 내 말 똑똑히 기억해.”
“…….”
“내 말 똑똑히 기억해. 미카엘.”
그렇게 손을 뻗어 녀석의 손을 맞잡았을 때였다.
순식간에 배경이 뒤바뀐다. 마치 육망성 게이트를 타고 있던 것처럼 말이다.
무척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차원 관리자라는 녀석의 직책을 생각해 보면, 또 김현성이 사라진 곳에서 육망성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리 이질적인 능력이라고는 볼 수 없다.
제한적이겠지만, 아마 많은 페널티를 감수해야겠지만, 녀석은 이 시간 선을 이동할 수 있는 이능을 가지고 있다.
“미카엘 너….”
“정확히 제가 원하는 시간대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게이트를 활용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겁니다. 시간이 그리 여유롭지 않으니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움직이겠습니다. 혹시 이 시간 선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노을빛의 검신께서 찾아보실 만한 곳을….”
살짝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
“…….”
“…….”
“어….”
“이기영 님?”
“…….”
“…….”
“…….”
“네?”
“기억이….”
“…….”
“…….”
“…….”
“현성이가 헤르엔에서 해준 이야기들이… 기억이 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