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94화
소실(4)
당연히 개구라였다.
물론 있을 법한 일이다. 아니,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진행 중에 있을 수도 있다. 정말로 김현성을 잊어가는 과정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2회차에서 알타누스를 제대로 기억하는 이가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물론 그녀의 유지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고, 그녀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분명 존재하기는 했지만, 본연의 알타누스에 대해, 그녀의 서사에 대해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듯 소실된다는 것은 모든 것에게, 모두에게 잊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알타누스와 같은 상황에 있는 김현성 역시 같은 과정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개인적으로는 김현성이 그녀보다 더 최악의 상황에 있다고 여겨진다. 지난 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알타누스는 자기 의지라도 남겼지.’
무엇을 남겼느냐에 대한 이야기였다.
장담하건대 김현성 이 멍청한 새끼는 노을 빼고는 남긴 것이 없을 것이다.
조금이나마 그녀를 기리고 기억하는 이들이 있는 알타누스와는 다르게 김현성에 대해서는 모두가 까맣게 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거다.
문제는 녀석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는 시기가 도대체 언제였냐는 것.
사실, 이런 일을 겪는 것이 처음이었던지라 모든 것이 의문스럽다.
정말로 나도 녀석을 잊을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 현재 김창렬을 비롯한 2회차의 인원들은 이 현상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지, 회귀는 도대체 어디까지 진행된 것인지, 지금 2회차는 어떤 상태인지….
최악의 경우에는 2회차가 큰 혼란을 맞았을 수도 있다.
1회차에 변화에 비례해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처럼 말이다.
모든 것이 안개가 낀 것마냥 흐릿하기는 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몰라.’
갑작스레 내일모레 김현성에 대해 모든 걸 잊어버릴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내가 예상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급박한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정보가 부정확했으니, 모든 사태에 대해 대비할 준비를 해야 마땅했다.
“기억이 나지 않아….”
“이기영 님?”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그날 있었던 일들이… 현성이가 해준 이야기들이… 아무것도 기억이….”
‘나만 급하면 안 되자너.’
“…….”
‘너도 같이 급해야지.’
“…….”
“…….”
혼란스러운 것이 옳다. 눈물이 절로 좌르르륵 흘러내리는 상황, 최근에 너무 울어 이미 눈물샘이 말라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이놈의 즙은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은 그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
계속해서 기억을 더듬어 나가는 듯한 모션을 취해준다.
혹시나 이 새끼가 내 구라를 눈치채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지만 심각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이 사태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억을 잃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녀석은 시간이 조금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겠지만, 어쩌겠는가. 당장 이기영의 기억이 사라지고 있는데.
본인이 예상했던 것보다 진도가 더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밖에 없겠지.
머리를 부여잡은 것은 당연지사.
“아윽… 아…. 아아악!”
“이기영 님… 이기영 님!”
감히 손을 뻗지도 못하고 있는 녀석.
그만큼 이기영의 현 상태가 심각해 보인다는 것을 알려주는 방증이리라.
미카엘 녀석이 얼마나 나와 김현성에 대해, 대륙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대충 알고 있겠지.’
“기억이… 안 난다고…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제기랄… 제길!”
‘뭐 한 쌍으로 취급받고 있다며?’
“진정하십시오. 어쩌면 이건….”
“…….”
위쪽에서 김현성과 나에 대한 평가가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었지만 베니고어에게 듣기로는 대충 부부 신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모르긴 몰라도 두 신의 아름다운 우정에 대한 이야기 정도는 퍼져 나가고 있지 않았을까.
이쪽 대륙으로 직접 원정을 와야 하는 미카엘의 경우에는 다른 이들보다 더욱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현성이한테도 뭐 이것저것 주워들었겠지.’
미켈레 박사에게도 전해 들었을 것이고, 김현성과 함께 다니는 동안 녀석에게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워들었을 확률이 높다.
김현성과 내 관계성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현재 내가 보여주고 있는 행동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단순히 김현성이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김현성에 대해서 잊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자보다 더욱더 큰 문제였다.
‘우리 추억이 사라지는 거자너.’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는 거자너.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게 되는 거자너.
결국에는 그 존재 자체를 잊게 된다. 솔직히 똥 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생각을 하지만서도, 결코 반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슬그머니 미카엘 쪽으로 눈알을 굴려보자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흐릿하지만 얼굴에 죄책감이 드리운 것처럼 보인다.
환영할 만한 상황이라 함이 옳다. 애초에 녀석에게 부채감을 느끼게 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니 말이다.
“흐… 으윽….”
결국에는 조용히 ‘제길’이라고 중얼거리는 미카엘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어울리지 않기는 했지만 그리 간단하게 해결된 상황이 아님을 직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분명히 평정심을 잃지 않은 성격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 차분함에 조금 금이 간 것처럼 느껴졌다.
녀석 역시 상황이 그리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직감하고 있다. 애초에 스스로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무너지고 있는 고슴도치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기억을 잃고 싶지 않은 반발 때문인지, 무척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모습, 머리에는 열이 오르고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몸을 꽉 안아 드는 것이 느껴진다.
아직 전부 성장하지 않은 몸이었던 터라, 녀석이 이 몸을 안아 드는 데는 별 무리가 없는 모양새, 더불어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온다.
“괜찮을 겁니다. 모두 되돌릴 수 있을 겁니다. 일을 전부 해결하고 나면, 반드시 모든 게 떠오를 겁니다.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
“그러니 조금만 더… 당신이 무너지면 모든 게 끝입니다.”
‘으응, 아니야. 무너질 거야. 기영이는 무너지고 말 거야.’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
“이기영 님.”
“…….”
“일단은… 일단은 헤르엔으로 움직이겠습니다.”
물론 김현성에 대한 기억이 사라졌다고 해서, 1회차에 있었던 모든 기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본 기억도 있었고, 대략적인 타임라인을 스스로 정리한 것도 존재한다.
녀석이 카스가노 유노에 대해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장담하건대 내가 마음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겨내셔야 합니다.”
‘응. 네가 할 소리는 아니야. 이겨내기는 뭘 이겨내? 시바.’
“이기영 님.”
눈을 감고 있어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질감이 든다. 아마 녀석이 차원을 이동하는 느낌이 아닐까.
이윽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이 나를 침대에 내려놓는 것이 느껴진다. 아마 헤르엔에 도착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다행히 녀석이 랜덤으로 이동한 시간선이 전쟁터는 아니었던지라, 쓸데없는 전투에 휘말리지는 않았던 모양, 녀석의 기척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은 것은 약 10분 정도가 지난 이후였다.
실신해 버린 내 상태를 보고 일단 괜찮다는 판단을 내린 이후 홀로 김현성을 찾으러 떠나지 않았을까.
겸사겸사 현시점에 대한 정보도 확인해야 했으니 말이다.
‘아예 껍데기만 쓰고 있는 건 아니구나?’
“…….”
“…….”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자.
‘여긴 어디야. 시바.’
무척이나 허름한 모양의 여관이 눈에 들어왔다.
‘이 새끼. 진짜 현실감각 아예 없네.’
이런 곳에 꼬마를 홀로 내버려 두고 나간다는 발상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발상이란 말인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 놈이 아니구나? 이거. 성골 출신이셨어?’
괜스레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일단은 바깥으로 나선 것은 당연지사. 혹시나 헤르엔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바깥의 풍경은 틀림없이 예전 헤르엔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헤르엔에서 일어난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단은 급하게 헤르엔으로 나를 옮겨 놓은 것이리라.
이곳에 있으면 무언가가 떠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녀석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기억을 잃은 이기영도 마찬가지였다.
곧바로 김현성과 함께했던 오두막으로 달려간다.
“어이 조심해! 제길! 부딪혔잖아!”
“제길! 어이 거기!!”
“뭐야… 저 자식….”
김현성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저렇게 민간인들이 그냥 돌아다니고 있던 것만 봐도, 김현성이 헤르엔에서 머무른 시기와 맞물리지 않는다.
1현성도, 2현성도 만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시를 잃어버린 작고 귀여운 고슴도치는 달릴 수밖에 없다. 추억의 오두막으로 돌진하는 이유는 너무나 뻔했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당연히 합리적이지 못한 행동.
“하아… 하아… 하아아… 하아… 하윽… 하아….”
현시점에서는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 집착하기보다는 육망성 안의 대륙 어딘가의 김현성을 먼저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다.
하지만 현재의 이기영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 서 있다.
김현성에 대해서 전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는,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키고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달리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혹시 알겠는가. 이 새끼가 어디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 말이다.
“하아… 하아… 하으….”
달리다 철푸덕 넘어지고,
“아….”
“…….”
볼품없이 땅바닥을 구르기도 하지만, 결국은 예전에 김현성과 함께 있었던 오두막에 몸이 닿는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그 누구도 살지 않은 버려진 오두막이다. 집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장소이기는 했지만 김현성과의 소중한 추억이 담겨 있는 장소였다. 멍하니 그 오두막을 바라본 것은 당연한 행동이었다.
솔직히 너무 오래 머무르고 싶지는 않다.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아 썩은 내가 풍기고,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갖 해로운 물질들이 내 폐로 들어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그리운 냄새라고 자기 최면을 거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아마 곧 미카엘 녀석이 이곳을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기영 님.”
이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녀석을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그대로 오두막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
“여기서 김현성이 회귀자라는 걸 내게 고백했어.”
“…….”
“덜덜 떨면서….”
“…….”
“버림받을까 봐… 혹시나 내가 자기를 부정하게 될까 봐… 겁을 먹으면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한 채로… 시발 무슨 죽을죄라도 지은 것마냥 비굴한 태도로… 회귀자라는 걸 나한테 고백했었다고….”
*다음 페이지에 유아영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유아영 일러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