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95화
소실(5)
“버림받을까 봐… 혹시나 내가 자기를 부정하게 될까 봐… 겁을 먹으면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한 채로… 시발 무슨 죽을죄라도 지은 것마냥 비굴한 태도로… 회귀자라는 걸 나한테 고백했었다고….”
‘여기서는 감성팔이 한번 해줘야 되자너.’
당연한 흐름이었다.
“물론 당황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지만… 김현성이 얼마나 큰 결심을 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애써 웃으면서 괜찮다고 이야기했었는데… 그때 김현성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긴장해서, 떨리는 얼굴로 담담하게 했던 이야기들이 이제는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아.”
소중한 추억이었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그날의 공기가, 그날 김현성과 내가 서로에게 느꼈던 유대감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인데… 평생 기억 속에 가지고 갈 거라고 다짐했던 순간이었는데… 이제는 그게 흐릿해.”
무척이나 소중한 추억으로 보여야 했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제기랄! 그때 어떤 표정이었는지, 김현성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 전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악하듯이 터져 나오는 목소리를 줄이기가 힘들다. 당연히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것 봐. 나 연약하자너. 막 다짜고짜 사람 돌로 찍어 죽이는 그런 사이코패스 아니자너.’
“하아… 하아… 하아… 후우….”
‘멘탈 완전히 솜사탕이자너.’
이미 약한 모습을 몇 번 보여주기도 했지만, 날카로운 가시를 완전히 벗겨내자 남은 것은 연하디연한 피부뿐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을 것이다.
김현성만 이기영에게 극단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기영도 김현성에게 극단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서로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 틀림없었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닿았는데도 깨닫지 못했을 리가 없다.
당연히 다급하게 말을 이어오는 미카엘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온다.
언제나 그렇듯, 정론이었다.
“이기영 님… 이미 아시고 계시겠지만… 이건 노을빛의 검신께서 스스로를 희생하시면서 일어난 일시적인 현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비통한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지금은 잊혀진 기억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김현성 님을 찾는 것이 더 시급합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부 되돌릴 수 있습니다.”
“누가… 씨발! 누가 그걸 몰라!?”
“…….”
“내가 병신인 줄 알아?! 김현성만 되찾으면, 김현성을 설득해서 방법을 찾으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거…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해?! 제기랄!! 지금 여기서 청승 떨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걸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냐고! 제길! 잊고 싶지 않다고! 제기랄!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고! 제길! 그리고… 정답을… 찾으면… 씨발… 정답을 찾으면 이미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그건….”
“혹여나 정답을 찾지 못하면…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면?”
“…….”
“결국에는 김현성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게 되면… 걔한테는 뭐가 남는 건데… 기억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나조차도 그 새끼를 잊어버리고 있는데… 김현성한테는 뭐가 남는 건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기억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행동이다?”
“…….”
“…….”
“희생과 부활의 신답지 않은 행동입니다.”
“뭐?”
“저는 이 대륙에 관해, 두 분에 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만… 이기영 님께서 이 대륙을 위해 행하신 일들과, 그로 인해 일어난 긍정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실로 초월자다운 행동이었으며, 그 누구도 쉽게 이룩할 수 없는 업적이라 자부할 수 있습니다. 이기영 님께서는 언제나 멈추지 않고, 진취적이며… 이 대륙을 위해서….”
여기서는 한마디 해줘야 한다.
“네가 씨발 나에 대해서 뭘 알아.”
근본의 그 대사를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멈칫거리는 미카엘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뭐? 대륙을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해? 어디서 주워들은 몇 가지 정보 가지고 나에 대해서 재단하려고 하지 마. 너도 마찬가지야. 안에 들어 있는 미켈레 이 새끼야. 너희들이 씨발… 김현성과 나에 대해서 도대체 뭘 알아. 진심으로 그 같잖은 지식과 경험으로, 김현성과 내 관계를 전부 파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 아니지?”
“…….”
“내가 김현성과 얼마나 지독하게 엮여 있는지… 전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 아니지? 스스로에게서 멀어져서 한 발자국 나아가야 한다고? 서로에게 조금 더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그걸로 가지고 있는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웃기는 코미디야. 감히 한낱 인간이 초월자를 재단하려고 한 것도 웃기지만, 어쭙잖은 대가리로, 우리 영혼을 찢어 놓으려고 했다는 게… 웃기는 코미디라고….”
“…….”
“이제 알겠지?”
“…….”
“네가, 너희들이 틀렸다는 거. 미카엘 너뿐만이 아니야. 너희들은 괜한 벌집을 들쑤신 거야.”
“미켈레 박사에게 악의는 없었습니다. 이기영 님. 물론, 그가 이기영 님과 김현성 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심지어 그는 두 분의 영혼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그래. 네가 틀린 거야. 미켈레. 하지만 두 번은 없어. 이미 일은 벌어졌고, 나는 너희들의 죄를 묻고 싶어서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니까. 그걸로 너희들을 처단하고 싶은 것도 아니야. 물론, 나는 너희들을 저주할 거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겠어. 네가 이 일에 부채감을 느끼고 있다는 거. 적어도 김현성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는… 알 것 같아. 적어도 그게 네 손을 잡은 이유였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김현성을 잊지 않을 거야.”
“네? 그게 무슨….”
“나는 절대로… 김현성을 잊지 않을 거라고….”
“그게 무슨….”
광기마저 엿보이는 눈동자를 일발 장전한다. 이미 이성 따위는 날아가 버린 지 오래다. 가시만 벗겨진 것이 아니라 피부까지 벗겨져 버려 남은 것은 집착과 광기뿐이다.
불과 몇 분 전에 미카엘과 협력해서 화해 아닌, 화해의 악수를 하고 김현성을 되찾겠다고 다짐하고, 그렇게 되지 않을 시 복수하겠다는 명대사를 갈긴 것치고는 진도가 무척 빠르게 진행되기는 했지만, 지금은 진도를 빠르게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본래대로라면 녀석과 함께 우당탕탕 모험기를 거치고, 서로를 점점 이해하며 기억을 잃고 있다는 떡밥을 던지는 것이 옳은 행동이었지만 시바 지금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는 거다.
정말로 기억을 잃을지도 모른다며 미카엘과의 서사도 급속도로 쌓아야 했으니까.
‘아마 미친놈인 줄 알 거야.’
이미 이기영이 제정신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울고불고, 개지랄을 떨고, 갑자기 돌로 미래의 자신을 내려찍으며 울부짖고, 갑자기 침착해졌다가 이제는 다시금 기억을 잃었다며 염병을 떨고 있었으니, 이 모든 것을 한 발자국 뒤에서 바라본다면 당연히 이기영이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할 만하다.
물론 모두 합당한 행동이었고, 개연성 또한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너무나도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지금 이기영은 그 어떤 짓도 저지를 수 있다. 녀석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다시 한번 녀석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벌린다.
“…….”
“난 원래 확률이 높은 쪽에 주사위를 던지는 타입이야. 미카엘. 네 말이 맞아. 네 말대로, 김현성을 되찾으면, 내 기억을 되찾을 가능성이 높을 거야. 아니, 높아. 평소대로의 나라면 주사위를 던졌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야. 김현성을 되찾아도, 김현성을 설득하지 못할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야. 만약 김현성을 설득한다고 해도 완전한 회귀를 하게 되리라는 보장도 없고. 내 기억이 원래대로 되돌아온다는 확신도 부족한 것… 같다.”
“…….”
“나는 내 새끼와 관련된 일에는 절대로 주사위를 던지지 않아.”
“…….”
“확률이 아무리 높아도, 김현성으로 도박을 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지금….”
“난 시간을 되돌릴 거다.”
“…….”
“김현성에 대해 전부 잃어버리기 전에, 다시 한번 시간을 되돌려서, 3회 차로 진입할 거야. 김현성은 나를 기억하지 못 할지도 모르겠지만 괜찮아. 내가 김현성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조금 일이 복잡해지기는 하겠지만 괜찮아. 내가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지금 회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건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미 김현성 님께서는….”
“김현성을 열쇠로 쓰겠다는 게 아니야. 내가 열쇠가 될 거다.”
“…….”
“열쇠가 되면 소실된다는 건 알아. 하지만 세상에 불가능한 건 없어. 모든 건 거래야. 이건 시스템과 내 거래라고. 알타누스가 베니고어를 남겼듯이, 나도 나를 남길 수 있을 거야. 그건 내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김현성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을 거다. 한 번으로 되지 않으면, 그다음에, 그다음으로도 되지 않으면 그다음으로… 그다음으로도 되지 않으면 그다음으로, 대가가 부족하다면 계속해서 시스템이 원하는 걸 넘길 거다. 내가 가진 모든 걸 말이야. 그리고… 결국에 나는 원하는 걸 손에 넣을 거야. 미카엘. 난 언제나 그래왔거든.”
“미친 짓입니다. 당신의 존재가 사라진단 말입니다! 혹여나 기적적으로 당신이 노을빛의 검신에 대해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냐야. 어떻게 생각해? 가능할 것 같아?”
“…….”
“…….”
‘확률이 낮지는 않자너.’
“또 한 가지, 나는 내 목숨으로 주사위를 던질 때에는 결코 주저하지 않아.”
“…….”
“그게 내가 희생이라고 불리는 이유인가 봐.”
곧바로 품에서 단검을 꺼낸다.
‘나 이걸로 찌른다! 진짜 찌른다!’
물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해서 회귀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 당장 목숨을 버릴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이미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대충 목부터 찌르고 신혈이 땅에 닿으면 그때부터 시작되겠지 뭐.
사실 찌를 생각도 없다. 아니, 당연히 미카엘이 나를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걸 그냥 내버려 두겠냐고.’
차원 관리자로서도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다. 김현성과 내가 둘 다 자리를 비운다면 대륙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미지수.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내게 얽혀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면 내게 이곳에서 소실되는 걸 내버려 둘 리가 없다는 거다.
물론 차원 관리자로서가 아니라 미카엘으로서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행동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왕이면 후자가….
‘좋을 텐데….’
단검을 꺼내는 동작과 목으로 가져다 대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당연하지만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다. 만약 녀석이 이걸 막으러 오지 않는다면….
‘그냥 죽지. 뭐. 시바. 그렇게 터무니없는 계획도 아니니까.’
“다음 회차에서 보자. 만날 수 있다면.”
푸욱.
그리고,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정신인 겁니까?”
자신의 손으로 단검을 잡고 있는 미카엘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당연히 녀석의 손에서는 피가 흘러내린다. 돌로 맞아 죽을 때부터 알아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내구 수치 자체는 무척 낮은 상태였던 모양이다.
“너는 무슨 짓인데. 이거 놔.”
“놓을 수 없습니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렇지?’
“…….”
‘미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이해도 안 되고 그렇지?’
“…….”
근데 소중한 걸 잃어버린 도치기영이는 멈추지 않자너. 뭐든 일단 지르고 보자너.
“놔.”
“놓을 수 없습니다. 이런 짓을 가만히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비이성적인 행동입니다. 합리적이지 못한 행동입니다.”
언제나 침착했던 놈의 얼굴에 확실하게 금이 가기 시작한다.
‘돌발행동에 당황했자너.’
“비이성적이다. 아니야. 나는 지금 그 어떤 때보다 이성적이야. 넌 이해 못 해.”
“…….”
“아무것도 잃어보지 않은 새끼는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살짝 한번 던져주고….’
“…….”
“…….”
기다리자. 본래 낚시라는 건, 던져 놓고 기다리는 거니까.
아니나 다를까.
“저 역시 많은 것을 잃어왔습니다.”
“…….”
“물론, 이기영 님과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
“…….”
‘우리 오늘부터 베프 되는 거다?’
개인사를 이야기하는 순간 이미 80퍼센트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은 정설.
녀석의 눈은 언제라도 희생할 준비를 마친 것마냥 정의롭고 올곧아 보였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너… 대신… 죽어줄 거지?’
“…….”
‘대신 죽어줄 수… 있지?’
“…….”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어줄 수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