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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496화 (1,494/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496화

소실(6)

이 새끼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래야, 내가, 김현성이 살 수 있을 확률이 높아진다.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이 새끼가 알타누스의 자리를 대신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럴 마음이 생기도록 만들어야 한다. 극단적으로는 김현성을 찾는 것보다 녀석을 구워삶는 것이 더 중요했다.

물론 현시점에서 무엇 하나 급하지 않은 일이 없기는 하다.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개구라이기는 했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지금부터 기억을 잃어갈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조금만 더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본다면….

‘어차피 뻔해.’

김현성이 노을이 되는 것을 선택하기 전에, 들릴 곳이라고 한다면 이미 정해져 있다. 정확히는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니는 것 보다, 한 곳에 체류하는 게 더 김현성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자면….

‘헤르엔의 오두막.’

여기는 뭐… 무조건 들리겠지.

오두막뿐만이 아니다. 이 외에도 추억이 깃든 장소는 무조건 한 번 들를 확률이 높다. 보통 누구나 자신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고 싶어 하는 경향이 존재할 테니 말이다.

김현성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렇다. 주어진 시간이 무한정하다면, 결국 이곳에서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김현성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거다.

물론 무작정 여기서 놈을 기다리는 것은 하책이었지만, 마음먹고 이곳저곳을 뒤지고 기다린다면 언젠가는 녀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1회 차 이기영.’

장담하건대… 직전에 1회 차 이기영을 찾아가리란 것도 너무나 자명했다.

물론 2회 차의 이기영이 1회 차와 동기화하고 있기는 했지만, 아마도 직접 1기영을 마주한 뒤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모든 걸 마무리 지으려고 하지 않을까.

물론 극단적으로 엉킨 실타래들을 생각하면 녀석이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아마 김현성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무조건 1회 차의 이기영을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굳이 김현성을 만나지 않아도….’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자너.

녀석이 갈려 나가기 전의 시간 선보다 먼저 녀석의 대체제를 세우는 것으로 말이다.

‘그 대체제가 바로 내 앞에 있자너….’

훌륭한 신격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다. 물론 쓰레기 같은 내구 수치를 생각해 보면, 껍데기만 뒤집어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녀석이 보여주고 있는 비상식적인 능력을 생각해 보자면 아마 자격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 않을까.

“…….”

“…….”

슬그머니 다시 한번 녀석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이미 방금 봤었던 것처럼 녀석의 침착함에는 금이 간 지 오래였다.

언제나 한 발자국 뒤에서 이 사태를 지켜보듯 방관했던 녀석이 지금은 무대 위에 올라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녀석이 스스로 갈려 나갈지, 갈려 나가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제 이 대륙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때마침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던 시점, 무대가 꽤나 그럴듯해 보였다.

배경은 헤르엔의 오두막, 거친 숨을 몰아쉬고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태도를 취하는 이기영과 그런 이기영의 팔을 잡고 있는 미카엘 녀석, 내 손을 꽉 쥐고 있는 녀석 때문에 팔이 바들바들 떨리기는 했지만 당연히 단검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씩 팔에 힘이 빠지고 있다. 이유는 당연히… 녀석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일이지만… 아직도 그때의 일이 머릿속에 뚜렷합니다. 그때 느꼈던 그 무력감을, 그때 느꼈던 그 좌절감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뿐인 위로는 집어 치….”

“44차원에서 일어났었던 1000년 전쟁.”

“…….”

“저는 그 전쟁에서 가족과 동료, 전우들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

“…….”

‘44차원 전쟁이고 나발이고….’

당연히 관심 없는 정보. 시바 솔직히 녀석의 사연도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다.

허구한 날 악마 새끼들과 으르렁거리고 이를 갈고 있었고, 이런저런 일이 터지다 보니, 어딘가의 차원에서는 피 터지게 싸우고 있다는 것도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1000년 전쟁이니 뭐니 엄청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그냥 지들끼리 이권 다툼 한 거고… 사실 시바 내가 차원 역사를 공부해서 어디 다가 쓰겠냐고….’

현 상황에서 놈의 배경과 이곳의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거다. 다만 이 새끼의 표정과 침통한 목소리를 듣고서 이게 차원 전체를 뜨겁게 달군, 의미가 깊은 역사라는 것을 대충 눈치챌 뿐이었다.

관계가 되어 있는 윗놈들의 입장에서는 감히 언급하기조차 힘든 역사처럼 느껴진다.

충격적이지 않지만, 충격적인 척하는 것은 당연히 국룰 이었다. 놈의 장단에 맞춰 줘야 했으니까. 괜스레…… “1000년 전쟁….”이라고 중얼거려 주는 것도 중요하다.

“끊임없이 몰려들었던 악마들과 그들을 막기 위해 희생된 이들의 비명 소리. 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끔찍한 전쟁이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지, 어떤 가치를 위해 싸우는지도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렸고, 초월자뿐만이 아니라 필멸자들도 자신들의 차원과 대륙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태워 버린 전쟁이었습니다.”

“…….”

“저는 그곳에서 만난 동료들 그리고 언제나 저를 위해 함께해 주던 가족들을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을 가슴 속에 묻고,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를 대신해 죽었던 형제들과 저 같은 이들에게 미래를 위해 길을 연 수많은 전우를 묻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

“저 역시, 당신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

“…….”

“저 역시… 제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저주스럽습니다. 이기영 님.”

‘뭐 어쩌라고 이 새끼야. 그럼 죽으면 되겠네.’

“…….”

‘그래서 시바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라고 말하기에는 힘든 분위기이기는 하다. 단언하건대 싸이코패스가 아니고서야 저렇게 대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절로 가라앉은 분위기. 비는 추적추적 내리다 못해 아예 쏟아지고 있는 상황, 예전 동료들이 생각난 것인지, 아니면 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녀석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 미카엘 역시 간만에 자신의 안에 있는 이야기를 꺼낸 순간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가슴 속에 고이고이 묻어왔던 이야기들을 자신도 모르게 꺼낸 순간이었을 터다.

“…….”

“…….”

“그렇기 때문에, 희생과 부활께서 노을을 잊으신다는 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습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무서운 것이 당연할 겁니다. 저 또한 그들을 잊는다는 걸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이건… 잘못된 선택입니다. 희생과 부활이시여. 노을께서 이걸 바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도… 노을빛의 검신을 잊는 것이 아무리 두렵다고 하더라도… 아직 이기영 님에게는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저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

“아직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

“두 분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

“…….”

이 정도 됐으면 단검을 떨어뜨려 줘야 한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손에서 단검이 떨어져 내린 것은 당연지사.

다음으로 무슨 대사를 던질지 생각이 나지는 않았지만, 일단 녀석의 스토리에 호응해 주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큰마음을 먹고 개인사를 꺼냈으니 마냥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1000년 전쟁은… 어떻게 됐지?”

“…….”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1000년 전쟁은 종식되고, 44차원은 평화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양 진영 사이에서는 새로운 차원 조약이 맺어졌으니, 표면적으로는 두 진영이 평화를 맞이한 셈입니다. 네. 저는 그곳에서 죽어간 많은 이들의 희생이 절대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차원 조약은 개뿔. 그거 다 그냥 무늬만 조약이자너.’

1000년 전쟁처럼 죽자 살자 달려들지 않을 뿐이지, 아직도 여기저기에서는 악마 새끼들과 윗놈들이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지 않았던가.

이 멍청한 새끼는 자신들의 희생으로 안전한 평화의 시대가 열린 줄 알고 있겠지만 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윗놈들은 악마들이 없으면 제대로 된 신성을 수급할 수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두 집단의 갈등은 서로의 이익과 이권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장치였으니 진지하게 평화협정 같은 게 가능할 리 만무했다.

‘위에도 진짜 썩었어.’

진즉에 독립했던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위쪽도 제정신은 아니다. 이미 로헨 고인물들을 보고 많이 느끼기는 했지만….

‘에라 모르겠다. 위에서 시바 뭔 개지랄을 하든지 말든지 나는 시바. 개소리나 해야겠다.’

때마침 적절한 타이밍처럼 보였고 마침 녀석의 말에 꽤 감명을 받은 타이밍이었으니 결코 이런 말을 던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한 호흡 쉬어주고….

“…….”

“…….”

“나는… 나는… 비가 내리는 걸 싫어했어.”

“네?”

“그야… 그렇잖아. 기분 나쁘고… 축축하고… 짜증 나잖아.”

“…….”

“그래도…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비는 그친다는 걸 알게 됐거든… 너무 당연한 거지만… 현성이랑 함께 있으면서, 언젠가 비가 그친다는 걸… 알게 됐단 말이야. 그래서… 그래서 지금은 그다지 싫어하지 않아. 그렇게 싫어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래… 비는 결국에는… 언젠가는… 그친다는 걸 알고 있는데…”

“…….”

“지금은 이 비가… 그칠 것 같지가 않아….”

“…….”

“흐윽… 흐으으윽… 흐으윽… 지금은… 지금은 이 비가… 그칠 것 같지가… 않단 말이야… 흐윽… 흐어어어엉… 비가… 그칠 것 같지 않다고… 그치지 않을 것 같다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기.

실제로 아직 성인이 된 몸은 아니었으니 엉엉 우는 게 부끄럽지도 않다. 눈물이 말라버려 이제는 즙 짜내는 것도 힘든 상황이기는 했지만 비가 도와주고 있었다.

‘진짜 시바 갈 데까지 갔다. 기영이.’

“비가 안 그칠 것 같다고… 흐으으윽… 흐으으으으으윽… 끄으윽… 콜록! 콜록! 흐윽… 히끅….”

‘하얀이 딸꾹질까지 섞어주면서….’

“히끅… 흐으으윽… 비가… 비가….”

‘눈치 왜 이렇게 없냐. 이제 그만 좀 멈춰 주라. 제발.’

“멈출 것 같지가 않아… 멈출 것 같지가… 않다고….”

녀석의 옷자락에 엉엉 우는 얼굴을 숨긴 것은 당연한 행동이었다. 녀석 역시 어색하게나마 내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장담하건대 녀석 역시 지금 내리고 있는 비가 그치길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별것 아니더라도, 지금 이 상황과는 관계가 없다고 해도, 조금이나마 희망을 주고 싶을 테니까.

1000년 전쟁이라는 비도 결국에는 그친 것처럼, 이 대륙에 내리고 있는 비도 그칠 수 있다는 것을 바라고 있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시야에 비쳐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

“…….”

난데없이 녀석을 중심으로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아주 자그마하고 가느다란 빛이기는 했지만 그 빛이 하늘로 치솟는 것이 똑똑히 눈에 들어온다.

갑작스레 먹구름이 갈라지며 햇빛이 그사이를 촘촘히 수놓는다. 아름답다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비록 인위적이기는 했지만, 부자연스럽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더욱더 멋지게 느껴진다.

비가 그치고 있다.

비가 그친 곳은 헤르엔뿐인 것처럼 보였지만 틀림없이 햇빛이 쏟아지고 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말이다.

금발의 머리카락에서 맺히고,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쏟아지는 해를 맞으며 미소를 짓고 있는 미카엘의 얼굴도 시야에 비쳤다.

“…….”

“…….”

“그쳤군요.”

“…….”

녀석의 상체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어 보였다.

“비가 그쳤습니다. 이기영 님.”

장담하건대 분명히 이 새끼는 아직까지 미소 짓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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