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02화
소실(12)
꽤 극적이고, 슬픈 상황이었다. 특히나 혼자 속을 삭이고 있다는 점에서 더 그러했다.
더 이상 녀석에게 개지랄을 떨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의외의 유효타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초기에는 진정해야 한다고,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녀석이었지만 막상 이쪽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꽉꽉 눌러 담고 있으니 이전보다 더 마음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절대로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녀석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지사. 결정적이었던 것은 다음 날 아침에도, 그다음 날 아침에도, 또 그다음 날 아침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에 있었다.
‘써도 써도 먹히는 것 같기는 해.’
꿋꿋한 건 언제나 먹히기는 해.
괜히 예전 히로인들의 특성 중에 꿋꿋함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아픔을 숨기고 있다면 패배할 가능성 따위는 단 1퍼센트도 존재하지 않는다. 왕도가 괜히 왕도가 아니지 않은가.
같이 있을 때는 애써 밝고 희망찬 모습을 보여주고, 혼자 있을 때면 탈진할 때까지 울어버리기.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스탠스를 계속해서 유지해 주기,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기.
물론 이 모든 아픔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티내지 않기.
도치기영에게 있어서 더 이상 미카엘이 원망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제는 이게 미카엘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녀석을 완전히 용서할 수는 없다는 것이 도치기영의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언제나 복잡한 법이 아니었던가. 녀석을 용서할 수 있으면서도, 용서할 수 없다.
녀석을 조금 원망하면서도, 녀석의 아픔에 공감한다.
녀석에게 분노를 느끼면서도, 녀석을 동정하게 된다.
절대로 녀석을 들이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미카엘이라는 이를 들이고 있다.
‘도치기영이… 정도 많아.’
“하지만… 미카엘 님…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전선에서 직접 싸우실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심지어 미안해하고 있자너. 화내야 할 상황이 오히려 더 미안해하고 있자너.’
편한 곳에서 편한 생활을 영위하게 해주기 위해, 미카엘을 전장에 서게 했다는 죄책감이 어렴풋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기영 님. 필연적인 선택이었으니 말입니다. 정확히 현시점에서 어느 정도 머물러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만큼 조금 더 정보를 얻기 쉽고,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배경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피난민들에게 섞이는 것보다는 운신의 폭이 좁아지겠지만, 훨씬 더 활동하기 용이할 거라는 판단이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바깥으로 나갈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다는 뜻은 아니지만….”
“하지만….”
“정말로 이기영 님 때문이 아닙니다. 게다가… 저 같은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전장에 서지도 않고 말입니다.”
“…….”
“결계나 보호마법에 특화되어 있는 병과라고 설명을 드렸던 터라… 운이 좋게도 현재 캐슬락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인력이라고 하더군요. 덕분에 조금 과도한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구만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본신의 능력을 전부 다 보여준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단순히 필요 인력이라는 사실만으로 이런 대우를 받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자너. 네가 생각해도 웃기지? 날 바보로 보고 있는거지? 이건?’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을 보니 결계나 보호마법에 특화되어 있는 직업이라고 설명한 건 거짓말이 아닌 것 같긴 했지만, 아마 이 시점을 기준으로도 군침을 흘릴 만한 능력을 보여주기야 했을 것이다.
‘대우 좋다니까.’
삼시 세끼 따뜻하고 맛있는 식사, 따뜻하고 안락하고 넓은 방, 언제든지 호출이 가능한 병사들, 뭔 시바 목욕 시중을 들어줄 사람까지 등장했더랬다.
물론 가장 후자의 경우에는 조심스레 거절하기는 했지만 미카엘 녀석이 옛날 사람이라는 걸 실감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캐슬락에서 이 정도면 감지덕지. 당장 지휘관들도 물자를 아끼기 위해 꿀꿀이죽을 먹는 상황에서 나만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이 새끼가 신경을 쓰기는 쓴 거자너.’
막말로 이 정도면 핵심 인력을 넘어 그 이상으로 평가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거다.
“더불어서… 아마 도움이 되는 정보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아직까지 항전 중인 다른 도시들과도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고 하니… 제국 내에 있는 소식들은 금방 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네. 물론 김현성 님에 관한 소식을 당장 듣기는 힘들겠지만 머지않은 시일 내에 이기영 님의 동료분들에 대한 이야기는….”
‘얘도 이런 거 생각할 줄 아네….’
“아! 그랬었죠. 다행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많이 걱정이 됐던 차였는데….”
“아마 모두 무사하실 겁니다.”
“네. 저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도 아니라 그… 진청 님도 함께 계시고… 믿을 만한 사람들이니까요. 마음이 급하기는 하지만….”
“…….”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하고 있는 거겠죠. 오히려 저보다 미카엘 님이 더 신경을 쓰고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
“…….”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 미카엘 님.”
“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잔뜩 흥분했던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이상하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일을 전부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적절한 시점에 도착했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차근차근히 해내고 있는 과정이잖아요.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 초조할 수 있겠지만 결국에는 현성이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꼭 그게 아니더라도 결국에는 다른 방법을 찾게 될 수도 있고요.”
“다른 방법….”
“네.”
“혹시… 기억은 괜찮으십니까.”
“네. 아직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라고 말하면서 살짝 비틀거리기.
“이기영 님.”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쓰러지기 직전에 나를 붙잡는 녀석이 눈에 들어온다.
‘점점 더 주기가 빨라지고 있자너.’
“잠깐… 혼자 있을게요.”
“…….”
그리고 이 새끼 나가자마자 혼자 쓸쓸하게 울어버리기.
오늘은 또 무슨 기억을 잃었을까 더듬어 버리면서 울어버리기.
이제는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모습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 행사가 하루에 한 번씩, 아니, 하루 세 번씩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계속해서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던 미카엘 녀석도, 이제는 그 소리를 듣기 힘이 드는지 문밖에서 멀어진다.
차마 발걸음을 떨어뜨리기 힘든 것 같기는 했지만 때마침 병사 하나가 미카엘에게 접근하고 있는 상황, 이를 악물며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미카엘 님.
-또 공습인 겁니까?
-소집 요청입니다.
-소집 말입니까?
-네. 저도 정확한 사안은 아직 전달받지 못했지만 아마 지난번처럼 지원군을 파견할 예정인 것 같습니다. 현재 공화국이 총공세를 받고 있는 상황인지라… 아마 어젯밤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
-만약 본대가 떠난다면 캐슬락의 수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
-…….
-걱정이 되는 건가?
-천관위 님?
-…….
-…….
-안개는 그대로 유지할 예정이다. 거기에 네 녀석의 마법이라면 조금은 믿을 만해지겠지. 수성을 위한 방어병력은 당연히 남겨 놓고… 지휘관으로는 캐슬락 백작이 성을 지킬 거다. 아마 원정은 일주일을 넘기지 않을 것 같군. 우리로서도 캐슬락을 너무 오래 비우는 건… 그리 달갑지 않은 선택이니….
-…….
-인류를 위해 싸우라거나, 정의를 위해 싸우라는 뻔한 말은 하지 않겠다. 대륙이 이 지경이 될 동안 자신을 숨기고 있는 것을 보면… 딱히 이타적인 것 같지도 않으니….
-…….
-하지만, 값은 치러줬으면 좋겠군. 이쪽에서 네 편의를 봐주지 않나.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하자너.’
거절할 명분도 없고, 거절해서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천관위의 말처럼 캐슬락에 몸을 담고 있는 이상,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원정이다.
‘저 표현이 딱 들어맞잖어.’
먹여주고 재워준 값, 또 앞으로 먹여주고 재워줄 값을 치르라는 소리였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캐슬락에서 내쫓겠다느니 페널티를 줄 거라느니 하는 협박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지만 아마 미카엘이 저 제안을 거절한다면 상황이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
따뜻한 식사가 차가운 방으로, 그럴듯한 식사가 꿀꿀이 죽으로, 최악의 경우에는 캐슬락을 떠나 다시 밖을 전전긍긍하며 나돌아다니게 될 수도 있었으니 사실상 외통수에 가까운 제안인 셈이었다.
더불어 천관위에 입장에서는….
‘대규모 원정을 떠나는 와중에 미카엘을 혼자 캐슬락 성에 남기고 싶지는 않았겠지.’
인류와 외신으로 진영이 갈라지기는 했지만, 외신의 편에 선 인류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현시점에서는 변절자들은 대부분 소탕되고 난 이후인 것으로 판단되었지만 천관위 입장에서는 미카엘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저 정도의 능력자가 아무런 소문도 없이, 갑작스레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상황이었으니까. 조금은 경계하는 게 당연하겠지. 당연히 미카엘도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거절할 수 없겠군요.
라고 말하는 녀석이 시야에 비쳐왔다.
-…….
-출정은 언제입니까.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지금 곧바로 준비해 주는 게 좋을 것 같군. 작별인사를 할 시간이 필요한가?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천관위에게 짧게 인사를 마친 이후에 다시 한번 이쪽의 방문 앞에 선 녀석.
-저 이기영 님.
“…….”
-이기영 님….
“흐윽… 흐으으윽….”
결국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는 미카엘, 아마 병사들이나 편지를 통해 원정 사실을 전해오지 않을까. 딱 적절한 타이밍에 녀석이 스스로 빠져준 셈이라 고맙기까지 하다.
미카엘 녀석은 곧 동료들을 볼 수 있니 뭐니 하며 이쪽을 위로 하기도 했었지만….
‘이미 연락 됐자너.’
이미 통신망 뚫어놓은 지 오래였다. 정확히는 김창렬이 만들어 놓은 정보 길드에서 내게 접촉했다.
캐슬락의 도착한 첫날 만에 갑작스레 귀빈이 떨어지셨으니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 리 만무, 언젠가는 연락이 올 거라고는 예상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빠르게 접선이 왔던 터라 내가 다 당황스러웠을 정도였다. 정보 길드의 규모가 축소되기는커녕 오히려 커진 것이리라.
지금도 창문에 꽂혀 있는 몇 개의 편지들이 보인다.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편지들을 꺼내 들고, 미카엘이 정말로 돌아갔는지 확인하던 찰나….
-당신의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미켈레.
-…….
-입 다무십시오.
-…….
-…….
‘이 새끼 왔다.’
정신분열 터졌다.
아니, 애초에 정신이 두 개로 분열되어있었으니 정확히는 정신분열이 터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몸 안에 두 개의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갈등을 초래하게 된 셈이었으니 내가 놈을 정상으로 인도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필멸자에 불과한 당신이 도대체 뭘 알 수 있다는 겁니까.
‘왔다. 진짜 온 것 같다.’
진짜 터졌다.
“…….”
“…….”
미카엘과 미켈레가 분열되고 있었다.
*다음 페이지에 리무르아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리무르아 일러스트입니다!